(제 48 회)

제 3 편

6

 

찬란한 가을이였다. 두만강을 향하여 마치 손바닥을 펼친듯 파상형의 구릉이 뻗어내려 손가락짬같은 수많은 골짜기들을 째놓고 그 골짜기들이 또 잘룩잘룩한 손가락마디처럼 작은 골짜기들로 매듭져있는데 모든 구릉, 모든 골짜기에 단풍이 불타고 많은 시내물이 밀화쪼박같은 노란 락엽을 싣고 두만강으로 흘러든다.

골짜기를 따라 얼마 못가서 뭉클하는 냄새에 사람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을수 없다. 마치 신선의 술항아리에 코를 들이댄듯 만물이 익어서 괴는 들크무레하고 쌀쌀한 향기가 대번에 어찔하도록 가슴을 덮친다. 나무에는 새까맣게 익은 머루와 물크러져가는 다래가 하얀 보미를 쓴채 반짝거리고 그옆에서는 새빨간 살맹이, 찔광이가 고명처럼 빛을 뿌린다. 살이 진 다람쥐는 이 대자연의 향연을 마련한 시녀인양 화려한 옷을 자랑하며 분주히 단풍든 은행나무와 오리나무사이로 동동 그네를 뛰고 그때마다 민감한 이깔나무의 노란 락엽은 고물처럼 소리없이 이 잔치상에 뿌려진다.

시내물에 씻기운 갈뿌리가 기암괴석사이로 삐여져나와 인간세상의 진미가 반드시 달콤한데만 있지 않다고 귀뜀하듯 쓸쓸한 냄새를 풍기고 하얗게 센 갈꽃은 그렇다고 실망할것은 없다는듯 길손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골짜기가 통채로 잔치상이라면 하늘은 또 엄청난 차일이다. 저렇게 큰 차일을 저렇듯이 파랗게 물들이자면 직녀는 몇날몇밤을 베틀에서 밝혀야 하며 견우는 또 쪽풀을 몇천몇만바리나 실어들여야 할것인가. 그들은 그 가을을 마련하기 위하여 얼마나 골몰했던지 그들스스로의 안타까운 사랑을 기약할 은하수도 오작교도 모든것을 일매지게 푸른색으로 물들여버렸다.

그래 대체 이 모든것이 인간을 위한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 기름지고 향기로운 가을이 이 땅의 겨레들을 위한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골짜기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손님 없는 잔치집처럼 조용하고 대자연의 향연에는 맨발 벗은 조무래기나무군이 공사장함바에 해다 팔 싸리나무를 꺾고있을따름이다.

쓸쓸한 가을이였다. 철도공사장의 남포소리는 드릉드릉 골짜기를 울리고 허기영치기영 목도소리는 상두곡처럼 가슴허비는 비애를 몰아왔다.

제 겨레의 피를 말리우고 제 나라의 살진 젖가슴을 짓밟아뭉개는 저소리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이 땅과 한피줄로 잇달린 심장들은 느끼고있었다. 그래서 나무군의 노래도, 목도군의 선소리도, 대장쟁이의 타령도 다 애조를 띠고있다.

무르익은 산열매, 아름다운 단풍과 뭉클한 향기가 다 구슬픈 눈물을 자아내는 가을이였다.

김성주동지의 가슴은 골짜기를 타고오를수록 더 젖어들었다. 그러나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일어서야만 할 가을임을 통감하시기에 그이께서는 즐거우신듯 중화와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간밤에는 오중화의 동생 오중성이가 선생으로 있는 니마토본부락에 들려 그곳 청년들을 모아놓고 카륜회의의 기본정신을 해설하시면서 앞으로 조직을 내올 방도를 토의하시였다. 그러느라고 중성의 집에서 밤을 꼬박 밝히시고 이른아침에 산으로 오르시는것이였다.

중성은 동네에 떨어졌다. 낮반아이들의 자습을 조직해놓고 이곳 니마토지구의 조직을 내올 핵심들을 찾아본 다음 뒤쫓아오기로 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국경을 넘으실 때 변장으로 덧껴입으신 조선바지저고리를 벗고 학생복으로 나서시였다.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아름다운 자연속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놓으시는 김성주동지를 맞이하자 비로소 이 찬란한 가을, 이 아름다운 골짜기의 뜻이 뚜렷해진듯 단풍은 더욱 선명한 빛으로 설레이고 시내물은 전에없이 다정한 속삭임소리를 울리였다.

《그놈들이 무슨 중앙을 조직하든 무슨 재건을 떠벌이든 내버려두시오. 우리는 그따위 누구에게 잘 보이고 행세하기 위한 당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이끌어나갈 전투적인 참모부가 필요하기때문에 기층조직부터 꾸려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니마토에도, 석현에도 대중조직을 내오고 그속에서 우수한 핵심을 골라 당의 기층조직을 꾸리고 이러한 기층조직들이 혁명투쟁속에서 단련되고 뭉쳐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방법으로 당을 내오자는것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간밤 읍내에서 《무산청년의 각오》라는 강연을 하다가 림석경관에게 세번이나 주의를 받고 마침내는 해산당하여 쫓겨난 최창익이가 자기 영향하에 있는 청년들을 따로 모아놓고 당의 재건을 위해 당장 폭동준비를 다그쳐야 한다고 부르짖었다는 중화의 보고를 들으시고 말씀하시였다.

《구체적인것은 아침에 잠간 만나서 아직 자세치 않습니다만 거기 몰려간 사람들도 대개 근우회 녀강사를 보자고 간 패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큰 영향이 있을것 같지 않습니다.》

《큰 영향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도대체 왜놈경찰을 앉혀놓고 연설을 해서 당을 재건한다는것이 누구를 업수이 보고 하는 수작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민들을 모욕하는 이런자들을 도처에서 폭로해야 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격분을 억누를길이 없어 손에 잡히는 나무가지를 힘껏 비틀어 꺾으시였다. 쌔빨갛게 익은 찔광이가 그이의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한순간에 분노의 밀물뒤로 찌르르하고 가슴허비는 추억이 되살아났다. 심장이 약한 김혁이가 이런 찔광이를 자주 먹던 생각이 나시였던것이다. 그래서 전날 솜옷과 함께 찔광이도 조금 구하여 감옥으로 보내주시였었다. 그러나 그 찔광이는 지난해에 딴 묵은 찔광이였다. 오늘 조국의 햇찔광이를 보니 김혁이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시였다. 지금 어쩌구나 있는지? 소옥이의 편지를 받아보시고는 그후 소식을 전혀 모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잠시 국경너머 려순쪽하늘을 정깊으신 눈길로 바라보시였다. 소옥이가 편지를 쓴것이 팔월 스무날경이니 이제는 거의 달포가 되여온다. 그동안 별고가 없어야겠는데 어째서인지 예감은 좋지 않으시였다. 놈들은 분명 김혁이를 살려두고 있는 힘껏 기름을 짜려고 할것이나 오히려 정의감이 강하고 즉흥이 센 시인의 심장이 견디여내겠는지가 걱정되시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3층에서 떨어진 김혁이고 보면 감옥에서도 꼭 그와 비슷한 일을 벌릴것만 같아 몹시 걱정되시였다.

그이께서는 가슴에 층층이 쌓이는 시름시름을 애써 허무시며 부러진 찔광이나무가지에서 잘 익은 찔광이를 따시였다.

《여기 참 산열매가 많습니다. 이 찔광이도 여느데것보다 훨씬 크고 살이 졌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찔광이 한알을 씹어보시며 말씀하시였다.

《좀더 올라가면 더 우거졌습니다. 이제 내가 우리 고장 다래대접을 하지요.》

한참 올라가니 오지바위가 나타나고 그옆에 개원사라는 재가승들의 절간이 있었다. 따끈따끈하게 퍼져오는 가을해빛속에 단조로운 목탁소리가 울려왔다. 회합장소는 왼쪽 와굴로 넘어가는 골짜기등성이에 외따로 서있는 쌍가닥 소나무밑이라고 한다.

이제 그곳에 오중성이가 니마토의 핵심청년들을 데리고 나타날것이고 최춘국이가 심청골과 개묵 그리고 공사장의 선진청년들을 데리고 올것이며 오중흡이 역시 자기 고향마을의 청년조직책임자를 데리고 올것이다.

쌍가닥소나무밑에 맞춤하게 삐여져나온 바위가 있었으나 김성주동지께서는 잔디판에 앉으시였다.

등성이너머에서 개원사의 목탁소리는 가물가물하는데 졸음기를 날라오는 다양한 해빛이 아지랑이 낀듯한 그 파란 공간에 삼촌의 모습이 떠오르고 최효일이며 김혁이의 얼굴도 그려졌다.

(우리 전망은 결코 료원한것이 아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시였다. 광활한 지대에 흩어져간 우리의 청년전위들이 카륜회의로선을 실속있게 집행해나간다면 아무데나 이렇게 좋은 인민들이 있지 않는가. 광활한 동북땅에 군중적지반이 닦아지고 북부국경지대에 무장투쟁의 거점이 꾸려질 전망을 내다보실수록 초조감을 억누르실 길이 없었다. 문제는 역시 인민들을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세우는것이다. 우리 동무들이 이 철칙을 가슴깊이 새기고있다면 우리 혁명은 머지않아 총을 잡게 될것이다.

김성주동지께서 생각에 잠겨계시는 사이 오중화는 그렇게 점잖은 사람이 오리나무가지를 타고 까맣게 올라갔다. 다래넝쿨이 어찌나 뒤엉켰는지 마치 그물속을 빠져나가듯 고개를 휘저으며 올라가는것이 볼만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도 가까이 있는 찔광이나무의 큰 가지를 휘여잡으시였다.

《그만두십시오. 이 한 나무만 따도 한말은 되겠습니다. 찔광이야 맛이 있습니까. 시큼하기만 하지.》

오중화는 그이께서 드실만 한 산열매를 고르시는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뭐 먹자는것이 아닙니다. 하도 탐스러워서… 내 동무가운데는 이런 찔광이를 좋아하는 동무가 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찔광이의 짜릿한 맛에 한쪽눈귀를 쪼프리며 오리나무정수리에 가로타고앉은 중화를 쳐다보시였다.

《이제 중성동무가 오면 농민야학을 내올 문제를 좀 토의해야겠습니다. 여기서 로동자, 농민의 조직을 내오자면 그들에게 혁명의식을 깨우치는것이 필요합니다.》

《야학은 아이들을 위한 야학이 있으니 그것을 좀 확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창 다래를 따는데 열중해있던 오중화가 잠시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런데 사람들을 모으는것이 문제일것입니다. 가령 아까 그 고만녀아주머니만 봐도 혁명에 눈만 뜨면 누구보다도 잘 싸울 사람인데 야학에 나오라면 선뜻 말을 듣겠습니까?》

《고만녀아주머니요?》

오중화는 놀라서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런 아주머니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남편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가 옳은 혁명의 길에 들어서면 그것은 그 아주머니에게도 좋고 남편에게도 좋고 또 우리 혁명에는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오중화는 마른침을 꿀꺽삼켰다.

《저, 성주동무가 말하는것은 어떤 야학을 념두에 두는것입니까?》

《어떤 야학이라니 보통 농민야학이지요.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일정한 장소에 모여 글도 배우고 혁명도 배우는 성인들을 위한 야학말입니다.》

《글쎄 그런 야학이 여기 니마토에도 있고 나도 해봤는데 고만녀아주머니를 야학에 참가시키겠다니 하는 말입니다.》

《고만녀아주머니에게 야학에도 못 나올 사정이 있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중화의 말에서 혹 예상 못했던 어떤 불행이 그 녀자에게 있는것이나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서 근심스럽게 물으시였다.

《사정이라기보다… 아까 보셨지만 그 아주머니는 뭐라고 할가, 아무리 가르쳐야 글눈이 뜰 녀자도 아니고 원체 살림에 쪼들리다보니 그럴 경황도 없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설사 글을 배워서 편지나 뜯어보게 됐다 한들 혁명을 하자고 하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 아무 말씀 안하시고 찔광이 하나를 따서 냄새를 맡아보시였다. 오중화는 말을 이었다.

《일반계몽이라면 또 모르지만 우리가 언제 고만녀아주머니같은 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혁명을 시키겠습니까.》

《중화동무.》

김성주동지께서는 이윽토록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심중한 목소리로 부르시였다.

《내가 왕청으로 나오면서 채수항동무에게서 중화동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말만 듣고도 중화동무를 리해했고 오랜 전우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중화동무의 리론수준이 높을것이라는 기대보다도 그 가위계에 반했던것입니다. 가위계라는 말속에서 벌써 인민들에 대한 남다른 관점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중화동무, 그 가위계를 무을 때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가 저 최창익이같은자들과 달리 소박한 인민들에게 의거해서 조선혁명을 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지금 당장은 막연해보인다 해도 고만녀아주머니같은 소박한 근로인민들을 교양하고 묶어세워서 그들이 힘을 쓰게 될 그때에야 승리할수 있습니다. 중화동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혁명을 합니까? 결국은 그 고만녀아주머니같은 불쌍한 우리 인민들을 위해서 혁명을 하는것이 아닙니까?》

김성주동지의 음성은 절절하고 마치 고만녀라는 자신의 혈족을 위해 힘써달라고 안타까이 호소하시는것 같았다.

오중화는 다래넝쿨사이에 고개를 떨구고 말없이 앉아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중화는 멍하니 나무를 타고 그냥 앉아있었다. 어쩐지 아래도리가 후들후들하는것이 어지럼증이 나는것 같기도 하였다. 머리속은 무슨 번개라도 맞은듯 사색이 중단되여버리고 가슴만 활랑거렸다.

겨우 생각을 수습했을 때 그는 무엇인가 웨치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어제 강가에서 자기가 카륜회의방침을 알것 같이 생각된것이 어처구니없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얼음산의 한귀퉁이를 본데 지나지 않았다. 최창익이가 인심을 희롱하며 고만녀의 불행에다 《계급적우애》같은 너울을 씌워 더 큰 불행에로 떠밀어넣는 그 너절한 멋에 격분을 느끼면서도 말 한마디 못했던 울화가 김성주동지의 진실한 사랑에 접한 그 순간에 참된 계급적원칙과 계급적형제에 대한 참사랑을 심장으로 느꼈던것이다. 그러나 김성주동지의 사랑은 한 계급의 인간을 동정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였다. 길가의 조약돌같이 가며오며 걷어찰뿐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무식하고 연약하고 불쌍한 한 아낙네에게서 혁명을 할 래일의 투사를 보시였던것이다. 그런 눈이, 그런 사랑이 어디에 또 있을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이며 불행한 우리 겨레가 영원히 받들어 추켜들고나가야 할 위대한 사랑, 혁명의 전기가 아닌가!

《이제 중성이가 오면

이윽고 중화는 갈린 목소리로 자기 심정의 한끝을 터놓았다.

《그 아주머니같은 사람들을 깨우치는 야학을 내오도록 실지 타산을 세워보겠습니다. 그런 야학을 여기뿐아니라 석현에도 세우고 사방에 일으켜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옳습니다. 고만녀아주머니같은 사람이 어디나 많습니다. 불쌍하지만 얼마나 좋은 인민들입니까. 사실 그런 사람들은 글눈이 뜨기전부터도 우리 혁명을 자기 생활감정으로 쉽게 리해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잡한 리론은 몰라도 몸으로 느낄것입니다. 나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여태까지 고만녀아주머니같은 사람을 혁명가로 만들 생각은 꿈에도 못해봤습니다. 이제는 카륜회의정신을 어렴풋이나마 알것 같기도 합니다.》

오중화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듯 고개를 떨구었다.

《허허허,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가만, 왜 그러고있습니까? 다래는 따지 않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한줌 따신 찔광이를 탐스럽게 들여다보시다가 중화가 멍하니 앉아있는것을 눈치채고 말씀하시였다.

《예, 땁니다. 고만녀아주머니를 야학에 끌어낼 생각을 하니 어찌나 신명이 나는지 이제는 다래쯤은 하찮게 생각되는구만요.》

중화는 얼굴이 벌개지도록 흥분되여 껄껄 웃었다.

그이께서도 허리에 한손을 짚고 시원하게 웃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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