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 회)

제 2 편

(25)

 

날랜 말들을 탔건만 설경성의 일행은 의주를 나선지 한달만에야 개경에 들어섰다.

말을 달리면 며칠길인데 이다지도 오래 걸린것은 설경성이 병자를 보면 반드시 그냥 지나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설경성이 왔다는 소식에 임금은 왕후와 태자를 거느리고 연경궁에서 맞아주었다.

절을 올리는 설경성의 손을 잡아일으킨 임금이 껄껄 웃었다. 왕후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하였다.

설경성의 등을 두드리며 임금이 감탄을 터치였다.

《그대같은 큰 인재를 둔 덕에 짐이 큰소리를 칠수 있노라. 공의 의술이 힘을 쓴 결과에 원나라조정이 저희 군사를 곡주와 수안에서 즉시 끌어내갔으니 가슴이 후련하도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서도 두 고을을 되찾았으니 이런 통쾌한 일이 어데 있겠는가.》

태자가 두팔을 벌리자 정이 북받친 설경성이 와락 그를 얼싸안았다.

딸꾹질을 할 때면 무릎우의 량구혈을 눌러도 주고 배를 아파할 때에는 배도 쓸어주고 심심하다고 할 때에는 등에 업고다니며 옛말이야기를 들려주군 하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그사이 몰라보게 총각꼴이 잡힌 태자였다.

태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의원님이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소이다.》

《태자님.》

눈물을 머금은 설경성에게 임금이 말했다.

《짐보다도 태자가 그대를 더 그리워했네. 개경이 넓다 한들 그대처럼 구수하게 옛말을 들려주는 사람도 드무니 그럴수밖에…》

룡상에 걸터앉으며 임금이 말했다.

《공은 만명의 군사로도 할수 없을 큰일을 했네. 서방에서 온 명의도, 천축에서 온 명의도 어쩌지 못한 원나라군주의 병을 고쳐냄으로써 천하명의가 고려사람이라는것을 알리였으니 정말 장하네. 짐은 아주 만족하오.》

임금이 대도에서 있은 일을 모두 알고있으니 설경성은 할말이 없었다.

늘 사신들이 오고가는 형편이라 임금이 대도에 가서 설경성이 한 일을 모를리 없었다.

《신하가 제 이름을 떨치는것이자 나라를 빛내이는것이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젠 알겠노라. 그대같은 천하명의가 있기에 짐이 떳떳할수 있거늘…》

설경성이 고개를 숙이며 울분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거북하오나 귀향길에 본 서북면 백성살이가 말이 아니였소이다.》

왕후가 웃으며 대꾸했다.

《공께서 의주에서 올린 글을 받아본 원나라임금이 더는 서북면사람들을 들볶지 못하도록 관리들을 엄하게 신칙하라는 어지를 내렸다 하나이다.》

설경성이 고개를 저었다.

《원나라에서 저희 관리들을 엄하게 신칙한다 할지라도 성상페하께서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무리죽음이 날수 있소이다.

백성은 살아있는것만으로도 나라에 리득이다는 말이 있소이다.

성상페하께서 나라의 쌀로 그들을 구제한다면 나라에 복이 될줄 아오이다.》

임금도 서북면의 실태를 알고있었다.

설경성의 말대로 굶주리는 우리 백성들에게 쌀을 푼다면 때가 되여 군사를 쓸 때 그들이 더 힘껏 내응할것이 아니겠는가.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의 백성이 무리죽음을 당할수 있다는데 어찌 강건너 불보듯 할수 있단 말인가? 알겠다.》

설경성은 끝내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이윽고 설경성이 간절한 눈길로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상페하, 이제는 벼슬을 바치고 의술에 전심하려 하오니 허락해주소이다.》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바가 아니다. 허나 공은 나라에 없어서는 안되는 인재인데 어찌 놓아줄수 있단 말인가. 짐은 그대를 태의감, 상약국의 판사 겸 군부총랑으로 봉하노라.》

설경성은 어리둥절하였다.

태의감이나 상약국은 그렇다쳐도 나라의 군사일을 주관하는 군부는 의술과는 거리가 먼 관청이 아닌가.

군부총랑은 군부에서 두번째 가는 관직이였다.

임금의 다음말이 설경성의 마음을 흔들었다.

《공이 병법에도 밝고 지략도 있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바가 아닌가. 세상만사에도 밝고 충의 또한 깊으니 조정의 기둥이 될수 있노라. 공에게 군부를 맡기는것은 첫째로는 군사들이 그대의 비상한 의술의 덕을 입게 하자는것이고 둘째로는 그대가 남다른 지인지감의 재주를 써서 훌륭한 사람들을 장수로 천거하게 하자는것이다.

셋째로는 우리를 넘보는 적을 견제할수 있도록 비상한 계략을 내놓기 바라기때문이다. 사실은 이 세번째가 더 중하다고 볼수 있노라.

뭐니뭐니해도 나라를 지키는 일이 제일가는 중대사임을 잊지 말라.》

임금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설경성은 스스로 깨달아지는것이 있었다.

내 지금껏 의술의 길을 걸어오면서 한탄한것이 무엇이였던가? 부자들과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악행을 두눈을 편히 뜨고 보면서도 손을 쓰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아니였던가.

그래서 어떤 때는 벼슬길로 걸음을 바꾸는것이 어떨가 하고 생각도 한것이고…

그러나 오늘은 권세를 옳게 부릴수 있는 벼슬이 차례졌다. 내가 백성구제의 량쪽수레바퀴를 동시에 다 움직인다면 한생의 뜻을 이룰수 있지 않겠는가.

백성구제이자 부국강병이다.

강심을 먹은자 못해낼 일이 없다는데 마음을 다잡고 나선다면 임금의 은총에 어찌 보답을 하지 못할고.…

심중한 안색으로 무릎을 꿇고있는 설경성을 굽어보며 임금은 만족해하였다.

때로는 백사람, 천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달라붙어도 해낼수 없는 일을 단 한사람이 어렵지 않게 할수도 있다.

수하에 그런 인재를 두었으니 군주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데 있겠는가.

앞길을 다시 정한 설경성이 입을 열었다.

《신 설경성 성상페하를 심신을 다 바쳐 받들겠소이다.》

임금이 설경성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왕후가 그대를 위해 주연을 차리게 했네. 오늘은 우리와 함께 즐기고 집에 돌아가 며칠 푹 쉬도록 하게.》

그러나 설경성은 이튿날도 집으로 돌아갈수 없었다.

임금과 왕후의 몸이 그사이 좀 축간것이 병색이 짙어보였기때문이였다.

며칠간 대궐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병을 보아주고서야 그는 황성을 나섰다.

설경성은 홀로 집으로 향했다.

왕택소는 로상에서 너무 지체된 연고로 즉시 원나라로 돌아갔고 두 제자도 고향을 다녀오도록 먼저 떠나보냈으니 홀로 갈수밖에 없었다.

말을 탄 설경성의 행장으로는 왕후가 지어준 옷을 담은 자그마한 상자와 의쟁기들이 든 자루뿐이였다.

집앞에 이른 설경성은 대문을 열라고 소리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뒤늦게야 어머니에게조차 안겨줄 색다른 물건 하나 없이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자책감이 든것이였다.

대문앞의 정자나무아래에서 서성거리던 설경성은 긴 한숨을 내그었다.

나는 왜 집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했을가?!

잠자리에 들 때면 언제나 식솔들이 그리웁고 늙으신 어머니는 앓지나 않는지 걱정이 앞서면서 집소식이 궁금하여 가슴이 괴로왔던 설경성이였다.

설경성이 빈손으로 돌아온것은 식솔을 위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였다. 오로지 세운 뜻을 위해 전심하다보니 그런데 관심을 돌릴새가 없었던것이다.

《증손아, 그렇지. 용타, 힘있게 또 한발을 내딛거라.》하는 소리에 설경성은 정신이 펄쩍 들었다.

오매에도 잊지 못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대문안에서 울려나오고있었다.

그럼 나에게 손자가?…

쿵쿵 가슴이 높뛰였다.

이태전 설경성은 원나라로 떠나기에 앞서 아들 문우와 옥춘이의 짝을 지어주었던것이다.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안고 대문으로 다가간 설경성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볕 잘 드는 뜨락에 어머니가 두팔을 벌리고 서있는데 그앞에서 기우뚱거리며 걸음마를 떼는 아기가 있었다.

그만 격정이 북받친 설경성은 대문을 떠밀며 목메여 불렀다.

《어머니!-》

대문으로 들어서는 설경성을 알아본 박씨가 아이를 얼른 안아들었다.

《아범아, 이 애가 증손이다.》

박씨가 안겨주는 손자를 받아든 설경성은 눈앞이 뿌잇하였다.

내가 할아버지가 되다니…

그날 저녁, 최유엄이 찾아와 설경성은 밤깊도록 그와 회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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