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3 편

7

(1)

 

길림에서 리신건의 통신을 받은 련락원이 고유수에 도착한것은 바람결 쌀쌀한 가을날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 돈화로 떠나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있어서 차광수에게는 일정하게 결심이 있었던 모양으로 계영춘이를 데리고 그날 밤으로 길을 떠났다.

차광수는 그답지 않게 덤볐다. 오래간만에 온 길림의 련락원처녀에게 《볼쉐비크》신간을 한아름 안겨주더니 처녀 혼자서 그 많은 비밀출판물을 어떻게 날라가라는 대책도 없이 덮어놓고 길림시내는 물론 신안툰, 강동의 조직에도 다 배포하라는 지시만 주고 훌 떠나버렸다.

사실 차광수는 김혁의 비보를 듣고 단신 장춘으로 달려가던 때나 마찬가지로 길을 떠나 몇십리를 오는 동안까지도 무슨 구체적인 계획이나 타산이 있은것이 아니였다. 김형권소조가 체포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그에게는 자기로서 할수 있는 일을 생각하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김혁이 사건의 경우보다도 더 속수무책이였다. 일은 국경 넘어 몇천리밖에서 벌어지고있다. 이번에는 김혁이때처럼 탈환하려 나서자는 동무들조차 없었다.

차광수에게는 그것이 원통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할빈에서 벌써 이러한 사태를 예감하신듯 하지만 정작 불행한 소식을 접하시게 될 때 그이께서 겪으실 그 아픔을 생각하니 손맥이 아주 풀려버렸다. 그 순간에 그는 돈화로 떠나시면서 최효일의 누이동생 걱정을 하시던 김성주동지의 말씀을 상기하였다.

카륜회의로선을 홰불로 추켜들고 과감히 국내에 뚫고들어가 한방의 총소리로써 온 삼천리를 혁명에 불러일으킨 그 용감한 전우들에게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였다. 효일의 누이동생이라도 구원하자. 그것이 김성주동지께 큰 위안으로는 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200리 안쪽에 있는 옥섬이마저 원쑤의 수중에 떨어지고만다면 김성주동지의 수하에 전사가 있다고 말할수 있으며 조선혁명가들에게 의리가 있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그는 오래동안 쓰지 않던 권총을 만탄창을 해서 가슴깊이 품고 계영춘의 손을 잡아끌다싶이 해서 길을 떠났다.

일망무제의 초원에 달빛이 넘쳤다. 길은 넓었다. 그러나 인가 하나 없는 허허벌판으로 쌀쌀한 가을바람을 헤치고 가는것이 좋은 기분은 아니였다.

계영춘은 두손을 주머니에 지르고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속이 출출한데… 저녁이나 좀 먹고 나올걸 그러지 않았소.》

그는 차광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달빛에 안경을 번쩍거리는 차광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좀 싱겁게 된 계영춘은 한참 말없이 걷다가 이번에는 어지간히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 다 해치우자는거요? 집을 알기나 하오?》

그제야 차광수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은 그도 옥섬이가 있다는 집을 모르는것이다.

《계동무도 모르오?》

계영춘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차광수의 약간 기우뚱한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이처럼 맹랑한 차광수를 보기란 처음일뿐아니라 상상도 못해본 일이였다.

《과연 한심하구만. 내가 알기를 어떻게 알겠소?》

두사람은 하는수없이 길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가까운 강낭밭에서 땅땅 여문 강냉이 몇이삭을 따서 구워먹으며 의논하였다. 련락원이 도착한이래 처음으로 하게 되는 구체적인 토의였다. 그러나 그것도 초입에서 막혀버렸다. 우선 옥섬의 거처를 알수 없고 그가 있는 공주령의 형편을 알수 없으니 도대체 구체적인 계획이라는것이 생겨날수가 없는것이다.

《결국 종락동무한테 갈수밖에 없소. 원래 이런 일이야 종락동무가 전문가나 다름없지 않소. 차라리 잘됐소.》

차광수는 새까맣게 탄 강냉이알을 한알한알 뜯어먹으며 말했다.

《그럼 오가자까지 간단 말이요?》

《어찌겠소, 하루쯤 밑지는셈이지만 하는수없지 않소.》

《하루? 공주령에서 오가자가 얼만지 알기나 하오? 110리요. 왕복 220리란 말요.》

《하루엔 좀 빠듯할가?》

《참 한심하군.》

계영춘은 투덜거렸으나 그로서도 재간이 없었다. 사실 집을 안다 해도 옥섬이를 빼돌려서 후환이 없게 하자면 그럴만 한 수를 써야겠는데 아무 반연도 없는 곳에서 차광수와 자기 두사람이 그 일을 솜씨있게 해제낄것 같지도 못했다.

강냉이 한이삭도 미처 다 먹지 못하고 차광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불속에 넣은 강냉이를 다 꺼내지도 못했는데 모닥불에다 흙을 끼얹는 차광수를 보고 계영춘은 혀를 끌끌 찼다.

《조급한것은 소부르죠아사상의 표현인데…》

《선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기요.》

두사람은 다시 길에 나섰다. 만철철길을 넘어서 한참을 가면 조선사람농막이 있었다. 오가자와 고유수사이를 오가는 사람은 의례 이 집에서 끼니를 에우고 하루밤을 자고 가군 하였다.

여기서 고유수가 80리, 오가자가 120리다. 오가자에서 고유수로 가는 사람은 새벽에 떠나서 밤이 좀 늦어 이 집에 들려가고 다시 새벽에 떠나면 저녁때에야 고유수에 가낼수 있었다. 반대로 고유수에서 오가자로 가자면 첫날은 완완하지만 다음날은 길을 다우쳐야 밤이 깊기 전에 오가자에 들어설수 있었다.

그들은 아침녘에 농막에 들려 따로 아침을 먹고 담배 한대를 미처 다 태우기도 전에 총총히 길을 떠났다.

아무리 길을 다우쳤지만 진가촌까지 오니 벌써 날이 저물었다. 진가촌은 농업학교도 있는 꽤 큰 거리였다. 보갑대를 비롯해서 반동의 눈초리도 많이 박혀있는 곳이였다. 이미 날이 어두웠기때문에 잘못하다가 보갑대의 단속에 걸리면 시끄러울것 같아서 아예 길을 에돌아나갔다. 가뜩이나 익숙치 못한 길인데 밤중에 오솔길에 들어서다나니 동료하기슭을 밤새 헤매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오가자언저리에 나섰다.

땅버들이 삼대 들어서듯 우거진 거치른 황무지에 들어섰다.

《에, 에, 그래도 사공을 잘 만나서 빠져죽지는 않았군.》

계영춘은 밤이슬에 화락하니 다 젖은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여보, 사공도 헐치 않단 말이요. 두덜거리지 않고는 길을 걷지 못하겠소?》

차광수도 물자루가 된 바지가랭이를 쥐여짜며 응수했다.

《두덜거리지 말라고? 허참!》

계영춘은 쥐여짜는 바람에 볼꼴없이 된 단벌 신사옷의 주름살을 쥐여당겨서 펴다가 너무 어처구니없다는듯 입을 쩍 벌렸다.

《두덜거리지도 못하면 차동무처럼 늘 정색해서만 살란 말이요? 나같은 사람도 있어야 우리 혁명이 좀 재미도 있고 랑만도 있지 모두 그렇게 부처상을 하고있어가지고서야 답답해서 어떻게 살겠소. 그러지 않아도 차동무를 뭐라고들 하는지 아오?

《뭐라고 하오?》

차광수는 시답지 않게 되물었다. 사실은 묻지 말것을 얼결에 말이 나와버린것이였다. 그는 계영춘이가 하자는 말을 대개 짐작하고있었다.

《목은 기울었는데 일하는것은 곧은 막대기다.》, 《혁명가가 아니라 소학교선생같다.》, 《푼전을 가지고 수판을 골백번도 더 놓는 회계원이다. 일을 크게 할 재목이 못된다.》

이런 뒤소리는 김성주동지께서 옥중고초를 겪으실 때부터 이러저러하게 들려왔다. 그때마다 차광수는 혼자 웃었다.

김성주동지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조직을 지키고 어려운 경로를 통해 짤막한 통신형식으로 전해지는 그이의 지시를 집행하자니 그는 자연 모든 일에 심중성을 기하지 않을수 없었고 자기나름의 해석이나 군중의 기분에 추종할수 없었다. 그는 오직 김성주동지께서 시키시는 일을 한치의 드팀도 없이 집행하였고 집행할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였다.

사업의 성격이나 비밀보장때문에 그러한 사실이 김성주동지의 지시로부터 출발된것임을 매번 설명할수 없었다. 때로는 맞대놓고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말하는 동무들도 있었다. 그럴 때조차 그는 속으로 웃었다. 김성주동지께서 지시하신 일을 정확하게 집행하기 위하여 내가, 한때 《덜렁광창》이라고 소문 높던 차광수가 딱딱한 사람이 되는것은 응당한 일이다. 아직도 기분에 들떠서 혁명을 무슨 모험소설속에 나오는 아슬아슬한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청년들도 없지 않은 실정에서 진정한 랑만으로 충만된 우리 혁명의 앞길을 개척해나가자면 응당 김성주동지의 신변가까이, 혹은 그이께서 계시지 않는 조직에 그이의 지시를 기계처럼 에누리없이 집행하는 《딱딱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차광수였다. 그는 한때 길림이나 신안툰, 혹은 고산자나 카륜의 청년들과 군중들의 가슴을 쥐여흔들던 열정적인 연설도 하지 않게 되였다. 그런 무대에는 대개 계영춘이나 리종락이같은 사람들이 나서게 되고 차광수자신은 뒤에서 내용이나 봐주고 군중이나 동원하고 출판물을 배포하고 강습을 조직하고 각 조직에 통신을 띄우는 등 눈에 뜨이지 않는 일을 하게 되였다. 그를 깊이 모르는 사람가운데는 자연 차광수라는 사람은 무슨 회계원이나 사무원같아보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오?》

계영춘은 다시한번 허두를 떼더니 차광수가 빙그레 웃자 옷자락을 빨래 털듯 탁탁 털며 내뱉었다.

《에, 그만두겠소. 사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아니니까.》

《계동무답지도 않군. 여느때는 몰라도 방금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소. 공연히 고유수에서 밥을 지어먹고 새벽에 떠나든가 아니면 진가촌 못미처 아예 자고 큰길을 온다든가 했으면 이런 고생 안할걸 차광수가 목은 비뚤어져가지고 곧은 막대기처럼 융통성없이 내밀기때문에 쓸데없는 고생을 했다고 생각한것은 사실이지… 단돈 5푼 가지고 수판을 50번이나 놓는 회계원같이… 하고 말이요.》

계영춘은 입가에 피여오르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힐끔 차광수를 돌아보았다. 안경알에 불깃한 노을빛이 어리였다. 광막한 지평선우에서 노을빛이 뻗쳐올랐다. 그 노을을 향해 웃고서있는, 밤이슬에 젖어 물귀신꼴이 된 차광수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두사람이 별로 어색한 기분이 되여 소오가자를 향해 막 걸음을 옮겨놓자고 하는데 한방의 총소리가 울려왔다. 어찌나 야무진 소린지 총총히 들어선 땅버들숲이 깜짝 놀라서 휘친하고 몸을 숙이는듯 하였다.

두사람은 습관적으로 괴춤의 권총을 뽑아들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불과 400~500메터 안쪽에서 울려오는 총소리였다. 총소리의 뒤로 틀림없이 무슨 움직임이 있을것이다. 맞총질소린가? 비명인가? 추격인가?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울려오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농민들이 토비가 두려워서 예방으로 쏘는게 아니요?》

계영춘이 속삭였다. 당시 토비가 아무데서나 득실거리던 이 일대에서는 농민들이 량식이나 값나가는 물건을 나를 때 이쪽에도 총이 있으니 아예 접어들 궁리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10리씩 사이를 두고 연방 총소리를 울리며 마차를 몰군 하였다.

《그런것 같지 않소. 권총소리요. 그것도 골드권총소리요.》

《그럼 뭐요?》

계영춘은 자기 권총을 손바닥으로 툭툭 뒤번지며 중얼거렸다.

《쉿, 뭐가 오오.》

차광수는 희슥이 가시여가는 어둠속으로 자박자박 울려오는 발자국소리를 가려듣고 계영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두사람은 다시 땅버들그늘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발자국소리는 뚜렷해지고 말소리도 울려왔다. 한두사람이 아니였다. 거의 20명가까이나 되는, 그것도 여라문살짜리로부터 열대여섯까지 나보이는 아이들이였다.

《히야, 난 정말 눈앞에 불이 번쩍할 때 죽는가 했다-》

《이 자식아, 불이 어데 번쩍했어?》

《불이 번쩍 안했단 말이냐? 너는 겁이 나서 눈을 감고있은게로구나. 불이 번쩍하기에 불질한다고 하지.》

《얘, 거기 기름종이에 싼것 있지 않니? 그게 폭탄이래.》

《정말?》

《폭탄은 무슨, 책같던데…》

들어봐야 무슨 소린지 알수는 없으나 어쨌든 방금 울린 총소리와 관련된것임에 틀림없었다.

차광수가 성큼 길가로 나서며 아이들의 앞을 막아섰다.

《얘들아, 말 좀 물어보자.》

차광수가 말을 떼는 순간에 벌써 절반이상 되는 아이들이 거미새끼 흩어지듯 땅버들숲속으로 달아나버렸다.

《특무다! 뛰여라!》

한놈이 이렇게 웨치며 개울을 따라 냅다 달아났다.

그래도 계영춘의 손에 큰놈이 한놈, 차광수의 손에 조무래기가 두놈 잡혔다.

《너희들 어데 있는 아이들이냐?》

《오가자에 있어요.》

아이들은 뚜렷한 적의를 가지고 대들듯 말했다.

《그래? 얘들아, 우리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 특무도 아니다. 우리는 바로 너희들의 마을로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너희 마을에 변대우로인이랑 곽상하로인이랑 있지?》

차광수는 앞에서 이렇게 얼리고 계영춘이는 뒤에서 어느놈이든 뛰면 잡겠다는듯이 지키고있었다.

아이들은 뜨직뜨직 대답했다. 리종락이라는 사람을 아는가고 물으니 그런 사람은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고유수에서 웬 연설쟁이가 와있다는 소문은 돌아가는데 연설쟁이가 너무 많이 오기때문에 어느것이 고유수에서 온 연설쟁이인지는 모르겠다는것이였다. 여기서 소오가자까지는 5리 남짓하다고 한다.

《그래 얘들아, 방금 난 총소리는 무슨 소리냐?》

차광수는 지금 당장 제일 궁금한것을 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눈이 둥그래서 서로 마주볼뿐 대답을 안했다.

《얘, 너희들 방금 울린 총소리 들었지?》

《우린 못 들었어요.》

계영춘이한테 잡힌 맨 큰 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이녀석들이! 바로 코앞에서 울린 총소리도 못 들어?》

계영춘이가 꿱 하고 소리쳤다.

그래도 아이들은 짚신끝으로 땅을 팔뿐 대답을 안했다.

《그럼 아무 사람도 본것이 없느냐?》

차광수는 이것이 꼭 무슨 곡절이 있는 일이라고 짐작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여기는 사람 다니지 않아요.》

이번에는 어린 놈이 당돌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어디서 총소리가 났을가? 우리는 바로 이앞에서 울린 총소리를 들었는데… 권총소리같더라.》

차광수는 다시 어린 놈의 눈을 들여다보며 유도질문을 해봤다. 그러나 허사였다. 어린 놈은 입을 꼭 다물고 눈만 말똥말똥해서 차광수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놈들아, 너희들 이제 무슨 말들을 하면서 왔니? 총쏘는 이야기들을 했지?》

계영춘이가 다시 뒤에서 소리치자 큰 놈이 맞받아 소리쳤다.

《우린 강냉이청대 해먹던 이야기를 했어요.》

《뭐, 강냉이청대?》

얼토당토 않는 수작이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말자체를 똑똑히 가려듣지 못했으니 더 캐고 따져볼만 한 건덕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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