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1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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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게 되여 두사람은 여기 《운명의 계단》우에서 다시 만난것이였다. 처녀도 총각도 다시 안 만날듯이 그랬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련인들의 부질없는 변덕에 불과한것이였다.

사실 처녀를 통해 전학선부상이 시험연구조의 일이 성공하여 전국적인 대학입학시험을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체계로 넘어가는 경우에 한생을 빛이 나지 않는 그 일에 바쳐야 한다고 했다는 말에 라영국은 자기의 앞날을 놓고 생각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였다. 누구에게나 발전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는 처녀의 말도 그른데가 없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권리보다 량심을 앞에 놓아야 한다고 라영국이 말한데는 처녀앞에서 사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희떠운 감정도 작용한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진심도 있었다. 자기 하나의 발전을 위해 집단에서 떨어져나가는것이 함께 위원회에 올라와 반년나마 한가마밥을 먹으며 고심어린 탐구의 나날을 보내는 동료들을 배반하는 량심없는 일로 생각되는것이였다.

그런데 라영국이쪽에서 먼저 오늘 만나자고 전화를 한데는 사랑하면서도 애인을 울려서 보낸 자신에 대한 후회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김광우부국장의 입김이 작용해서였다. 처녀는 그것을 알수 없었다.

바로 어제 시험연구조에 나타났던 부국장은 라영국을 보자 대뜸 애인과의 일이 어떻게 돼가는가고 물었다. 라영국이 지나가는 말처럼 여기고 마치 일이 끝장난것처럼 시들하게 말했더니 뜻밖에도 부국장은 무슨 큰일이나 난것처럼 화를 냈다.

《이보우 라영국동무, 처녀와 사랑을 약속하고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거요? 무슨 당치않은 소리요? 사랑을 약속한다는게 무슨 철없는 아이들의 놀음놀이인가 하오? 그게 사실이라면 동무문제를 단단히 봐야겠소. 그 처녀는 나도 잘 아는데 인물도 잘났지만 속에 든것이 있고 마음은 더 곱소. 세상처녀들을 다 갖다놔도 그런 보석덩이는 고르지 못해. 래일이 일요일인데 무조건 가서 처녀한테 용서를 빌라구.》…

라영국은 처녀를 만나자 그 말부터 하면서 우리 부국장동지를 어떻게 아는가고 물었다.

처음부터 새파란 인상을 보이며 《부리》로 쪼아댈 구실만 찾던 처녀는 그 소리에 놀라 대뜸 왕사발눈이 되였다.

《어마나! 동진 마치도 이 영랑이 그 부국장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우리사이 관계에 대하여 푼수없이 다 말한것처럼 생각하는게 아니야요? 내가 우리 상급도 아닌 부국장동지를 어떻게 알아요?》

라영국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그렇다면 이상한데? 동무를 잘 아는것처럼 말하지 않아.》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차대접하느라고 아버지방에 들어갔다가 한번 얼핏 봤던적은 있어요.》

《그-으-래? -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구만.》

《뭐가 이상하다는거예요?》

《부국장동지는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실현하자고 애쓰는 사람인데 동무의 아버지는 그 일을 믿지 못해서 그런다니 말이요. 정말 반대하는건 아니요?》

처녀는 대번에 얼굴이 새파래지며 독을 내뿜었다.

《동진 전번에도 그랬지요? 동지가 우리 아버지를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말해요?》

《아, 됐소됐소, 영랑동무.》 라영국은 항복한다는듯 두손을 번쩍 들어보이며 화해의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에이, 됐소. 그런 말은 그만하자구. 그런데 말이요.》

《뭐예요?》

《동무가 전번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것은 나의 전망을 생각해서였을거요. 하지만 난 동무가 집단을 선듯 떠날수 없어하는 이 라영국을 리해했으면 하오. 우리 김호성조장동지가 어떤 가정적부담을 안고있는지 아오? 안해없이 앓아누운 가시어머니를 모시고있으면서 집을 떠나 살고있단 말이요.

우리 조의 다른 동지들도 다 그렇게 가정을 떠나살면서 일밖에 모른단 말이요. 그런데다가 부국장동지는 시험연구조에 내려올적마다 우리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고 하지. 일이 긴장한것도 사실이요. 그런 형편인데 시험정보과가 나온다 해서 나 하나만 발전하겠다고 훌 빠져나가겠다는건 말하기 바쁜 일이란 말이요.》

전영랑은 실망의 한숨을 폭 내쉬였다.

《그러니 동진 100살을 살아도 여기까지 올라와보지 못하겠군요.》

라영국은 의아해서 처녀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여기까지라는건 무슨 소리요?》

《여기 마지막계단까지 말이지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이 자리에 앉아서 동지가 말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한생을 산다는것은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밟아오르는것과 같은거라구요.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에 그치고 어떤 사람은 중간에서 주저앉고만다구요. 동진 아마 한계단도 못 오른채 그 자리에서 생을 마치겠지요?》

라영국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처녀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것만 같아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이보라구 영랑동무, 우리 시험연구조의 선생들이 지금 어떤 각오를 가지고 개발전투를 하고있는지 아오? 나라의 과학을 저 하늘높이 우뚝 세우는데서 그것을 떠받드는 하나의 조약돌이 되자는거요. 동문 저 거대한 건축물들도 땅속에 묻혀있는 기초우에 서있다는걸 알지?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땅우에 솟아있는 건축물의 웅장미에 감탄하면서도 그 건축물을 땅속에서 말없이 떠받들고있는 기초가 하나하나의 모래알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안하거던.》

《알겠어요, 모래알동지. 하지만 그건 소학생때부터 들어온 〈철학〉이예요. 유치하다고는 볼수 없지만 뻔한〈철학〉! 동진 이제 나한테 모래알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자고 그러겠지요?》

《틀렸소!》

《그럼 뭐예요?》

《우리 사회의 원리에 대하여 말하자는거요. 아니, 발전의 원리이지. 아니, 량심에 관한 문제라고 할수 있소. 김광우부국장동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두고 뭐라고 그랬는지 아오? 우리 조국의 꿈을 싣고 미래로 질주하는 급행렬차가 되여야 한다고 했소. 난 그게 마음에 드오. 그 급행렬차에 올랐다가 도중에 내리고마는 락후분자가 될수는 없지 않소.》

라영국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처녀의 작고 보동보동한 고운 손을 급히 자기의 커다란 줌안에 넣으며 싱긋이 웃었다.

《됐어됐어, 동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소. 중요한건 내가 동무를 사랑한다는 그거요. 이젠 유보도에 나가 뽀트나 타자구. 가만… 이거 배가 의견이 있어하누만. 창고가 텅텅 비였는데 주인이란자는 뽀트생각만 한다고 말이요. 어! - 그러고보니 점심때가 다됐는걸. 차라리 식당에 가야겠소. 내가 우리 영랑동무 좋아하는 록두지짐을 사내지.》

《됐어요!》

처녀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하지만 처녀의 호수같은 눈에서는 기쁨이 은은히 빛발쳐나오고있었다. 애인을 만나면 한동안은 이지러진 소리를 하여 전날 《수모》를 당한데 대한 앙갚음을 단단히 하리라던 생각을 처녀는 그만에야 가뭇 잊어버린것이였다.

《오늘은 내가 하자는대로 해야 해요.》 처녀는 명령조로 말하며 애인을 모란봉너머 자기가 잘 아는 조용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두사람은 일부러 맨 구석의 빈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마주앉았다.

전영랑이 이런데서는 녀자가 나서는것이라면서 책임자인듯 한 녀자를 만나고왔는데 조금후에 물찬 제비같이 쭉 빠진 접대원처녀가 음식을 날라왔다.

라영국이 몰몰 흰김이 피여오르는 자기단지를 내려다보며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이거야 단고기국이 아니요? 동무가 좋아하는 록두지짐을 하자고 했는데…》

《동진 단고기국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거야 불공평하지 않소. 동문 록두지짐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단고기국이 나왔으니 말이요.》

좋아하면서도 처녀생각에 미안해하는 라영국을 보면서 영랑은 고운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담뿍 담았다. 그러고보면 녀자의 행복의 조건이란 요란한데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영국동진 밤낮 콤퓨터앞에 앉아있지 않나요. 영양보충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제 말을 명심해야 해요.》

《하하.》

《무슨 생각을 하고 웃어요?》

《무슨 생각? 과연 호텔료리사가 옳긴 옳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나를 비웃는거예요? 대학졸업생이 하늘을 나는 수리개는 못되고 기껏해서 료리사라고?》

그 말에 라영국은 바빠맞았다.

《그런게 아니요. 동문 별나게 오해를 하누만. 이보우 영랑동무, 내가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 할가?》

《단고기가 의견있어하겠어요, 음식을 차려놓고 이야기만 한다고요.》

《어, 하긴 그렇겠구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먹구보자구.》

식사를 채 끝내지 못했는데 처녀쪽에서 먼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려댔어요?》

《그건 말이요, 사람의 몸안에서 있은 일이요. 말하자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생겼을 때 입이 의견있어했소. 입이 말하기를 〈이거 공평하지 못하구만. 난 말이야, 식사시간이 되면 기껏해서 맛이나 보는데 음식을 씹어놓으면 위가 혼자 다 가져간단 말이야. 위는 참 량심이 없거던. 욕심쟁이야. 〉라고 했지. 그러자 눈과 코와 귀가 한마디씩 했다구. 눈이 〈입은 말도 말라구. 그래도 입은 음식을 씹으면서 맛이라도 보지 않아. 난 늘 사람이 길을 헛갈리지 말고 바로 가라고 앞을 봐주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식사시간이면 눈을 펀히 뜨고 진수성찬을 구경만 해야 하니 이런 기분 나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어. 〉 그러자 코는 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눈은 눈맛이라도 보지만 자기는 고소한 음식냄새만 맡아야 하니 더 죽여준다는거야. 그 말을 듣고있던 귀가 화를 벌컥 냈다구. 〈입이나 눈과 코는 말도 말라구. 나는 말이나 그밖의 온갖 소리를 듣고 주인이 제때에 결심채택을 바로하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식사시간이면 맛을 보거나 눈으로 보지도 못하면서 맛있게 먹는 소리나 들어야 하니 더 죽여준단 말이야. 〉하고 말했지.

모두 저마끔 그렇게 한마디씩 하는데 손은 입을 다물고있었지. 그게 이상해서 입이 말했소. 〈이보라구 손, 자네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나? 〉 그러자 부지런하고 과묵한 손이 말했지. 〈이보라구, 위를 욕하지 말라구. 사람한테는 입이나 눈도 꼭 있어야 하구 코나 귀가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한다고 그러나. 혼자서 묵묵히 음식물을 소화시켜서는 인체의 각 곳에 영양물질을 보내준단 말이야. 그러니 위가 없으면 자네들 입이나 눈과 코와 귀는 제구실을 하지도 못해. 〉 입과 눈과 코와 귀는 그제서야 자기들만 인체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게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위의 수고를 알게 됐지.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것을 알게 됐는데 말이야. 손이야말로 말은 없지만 그 어떤 보수도 바람이 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재부를 창조한다는거요. 그러니 결과는 뭐겠어? 》

처녀는 귀염상스럽게 입을 비쭉 내밀어보였다.

《음- 알겠어요. 사람은 명예나 보수같은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에 자기를 바칠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자는거지요?》

《옳소. 그렇단 말이요. 자자, 단고기국이 정말 의견있겠소. 빨리 맛있게 먹구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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