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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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마루에 오르자 앞이 활짝 열려졌다. 보기 좋게 구릉이 져서 물결쳐나간 산발들이 아득히 비껴갔다. 산과 들에는 봄기운이 짙었다. 이깔나무숲은 연두색으로 물들고 골짜기에서는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마의 땀을 훔치시며 말씀하시였다.

《어떻소, 해지기 전에 가둑령을 넘어낼것 같습니까?》

그이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들리자 뒤에 섰던 전광식이 급히 다가서며 대답하였다.

《아직 30리를 가야 가둑령어구에 들어서게 됩니다.》

《아직 30리나 남았다?… 그럼 서둘러야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고개를 드시여 해짐작을 해보시고는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한흥권동무한테 리혁동무도 이번에 같이 오라고 련락을 했습니까?》

《네! 련락을 했습니다.》

《그러면 한동무가 좀 늦어질수도 있겠구만?》

《떠나면서 기일전에 꼭 도착하겠다고 했습니다.》

《하긴 한동문 한번도 기일을 어긴적이 없었으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이제 걸어갈 길 아래켠을 내려다보시였다. 전광식은 그이께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령을 내리시였다.

저만치 앞에서는 전령병이 걸어갔다. 호위를 담당한 전광식은 그이께서 계시는 위치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걸어야 할것이였지만 그이께서 자주 지방실정을 물으시기때문에 바투 따라서지 않을수 없었다. 전광식의 키는 중키이고 몸은 다부지고 아래우 그쯘하였다. 이마는 넓은 편이지만 허름한 모자를 올려놓아 그것이 다 드러나지 않고 덩실한 코마루가 눈에 띄였다. 대체로 보아 농민형으로 생겼는데 얼굴은 꺼멓게 타고 번들거렸다. 그는 벌써 달포가량 두만강중부지구를 순찰하시는 사령관동지를 호위하였다.

지난달 25일, 그러니까 한 스무날전에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유격대를 창건하자 곧 지방으로 공작원들을 보내시고 자신께서도 친히 두만강중류의 연화지구로 떠나신 후 물줄기를 따라 화룡, 연길을 거쳐 일부 왕청지구를 돌아 다시 안도의 소사하를 향해 가시는 길이였다.

혁명정세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고있었다. 일제의 전대미문의 야수적인 《토벌》이 두만강일대를 휩쓸고있었다.

불구름이 피여오르는 벌판과 골짜기와 산을 넘어다니시는 동안 하루밤도 잠들지 못하고 사색에 잠겨 새우시군 한 김일성동지께서는 사흘전에 문득 각 지구에 통신원들을 보내여 공작원들과 순시원들을 소사하에 부르도록 하라고 지시하시였다.

길림시절부터 김일성동지를 모시게 된 전광식은 오직 자기만이 느낄수 있는 륙감으로 드디여 그이의 심중에 난국을 헤쳐나갈 구상이 무르익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랴부랴 통신원들을 조직하여 각 지구에 띄워보냈었다.

귀로에 오르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늘도 신새벽에 길을 떠나 70여리를 걸어오는 동안 내내 지방실정을 물으시였으며 도중에 두군데나 들리여 몸소 형편을 알아보시였다.

《큰골 리광동무한테 통신이 가닿았을가요?》

묵묵히 령을 내리시던 김일성동지께서 문득 몸을 뒤로 돌리며 물으시였다.

《닿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순조롭게만 갔다면 어제쯤…》

《돌아보던중 거기가 제일 걱정됩니다. 놈들의 소위 간도림시파견대 주력이 왕청, 연길방면으로 밀릴것이 예견됩니다.》

전광식은 그이의 무거운 음성을 들으며 어떻게 말씀드릴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하였다.

《그 동무는 어떻게 하나 타개하여나갈겁니다.》

그이께서는 더 말씀이 없이 령길을 내리시였다.

골짜기를 빠지자 개활지대가 나타났다. 산굽이를 하나 돌아서니 꽤 넓은 강이 가로놓여있었다.

《저게 무슨 사람들입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손을 이마로 가져가시였다.

강가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널려있었다. 산굽이를 돌아설 때부터 전광식이도 그것을 보기는 하였으나 나루를 건느려는 사람들이겠거니 짐작하고 심상하게 보아넘겼던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금시 안색이 어두워지시였다. 걸음을 걸으시느라고 붉게 상기되였던 존안에 그늘이 비끼였다. 전광식이와 전령병이 강변으로 먼저 달려갔다.

강가에 내려오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대체로 사태를 짐작하고 물버들이 한벌 덮인 개뚝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시였다. 수양버들이 한그루 서있는 언덕에 이르렀을 때 전광식이 사령관동지앞으로 달려갔다. 전광식은 강변에 널린 사람들이 며칠전에 《토벌》을 당한 사람들이라는것을 보고하였다.

《<토벌>을 당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토벌>을 당했다?… 음, 불바다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구만.》

이미 그러루한 일들이 생기리라는 짐작은 하셨던것이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로 안겨오자 그이께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였다.

강변에는 수십명의 피난민들이 널려있었다. 대부분 로인들, 아낙네들, 어린이들이였다. 때마침 해가 자글자글 내리쬐여 길가던 사람들이 쉬기에 알맞춤하였다. 부상당한 환자들은 양지쪽에 앉아 상처를 풀어보고있었으며 아낙네들과 아이들은 바가지로 강물을 퍼다가 먹을것을 끓이고있었다. 여기저기 걸어놓은 돌가마들에서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여올랐다. 점심때치고는 너무 늦고 저녁이라면 너무 이르다. 전광식이 나타나서 이것저것 물으며 돌아갈 때에는 웬 사람이냐는듯 한 표정으로 몇사람이 심상치 않게 눈치를 살피였지만 그것이 일단 지나가자 곧 그들은 무관심해지고말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급히 강가로 걸어내려가시였다.

처음에 눈에 뛴것은 서너살난 어린애 셋이 풀밭을 기여다니면서 꽃을 뜯고있는것이였다. 얼굴이 포동포동한 사내애가 민들레꽃을 향해 손을 뻗치는데 그의 팔소매는 불에 타서 구멍이 두개나 뚫어져있었다. 그와 반대쪽으로 앙금앙금 앉은걸음을 하고있는 단발머리계집애는 왼쪽팔을 싸맸고 고무신은 한짝만 신고있었다. 그옆에 엉뎅이를 땅에 붙이고 앉은 사내애는 머리가 온통 불에 그슬렸다.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계시던 김일성동지의 안색은 또다시 흐려지시였다. 낯선분이 나타났다는것을 안 애들은 무릎에 놓았던 민들레꽃을 집어들고 혀를 내밀며 방글방글 웃고있었다. 아이들 있는데서 한 대여섯걸음 강가로 떨어진 언덕진 곳에 연기에 까맣게 그슬린 법랑쟁개비가 하나 걸려있었는데 재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중년녀인이 그옆에 쪼그리고앉아 불을 불고있었다. 얼굴을 들자 벌겋게 된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굴러떨어졌다. 바람가림을 해서 웅뎅이에 몇씩 들어앉은 패들도 있다. 팔에 붕대를 감은 열대여섯살난 처녀가 손을 부자연스럽게 놀리면서 동생인듯 한 계집애의 따진 팔소매를 꿰메고있었다. 입은채로 바느질을 하자니 잘되지 않는데다가 낯선분이 바라보시여 점직해서 얼굴이 한껏 붉어졌다. 그옆에는 키가 껑충하고 눈이 커다란 사내애가 쭈그리고앉아 손칼로 무엇을 깎고있는데 그의 코등에는 땀이 송글송글 내돋았다.

《넌 뭘 깎고있느냐?》

김일성동지께서는 허리를 굽히여 사내애의 머리를 쓸어주며 나직이 물으시였다.

《고무총 만듭니다.》

사내애는 삐여져나온 이마를 들고 야무지게 대답하였다.

《고무총을 만든다? 거참 좋은걸 만드는구나. 그래 그걸룬 뭘하지?》

그이께서는 사내애옆 풀밭에 앉으시였다.

《왜놈 쏘겠습니다.》

《왜놈을 쏜다? 어디 좀 볼가?》

그이께서도 어린시절에 고무총을 만들어보신 일이 있었다. 순화강변 버들숲에는 고무총을 만들기 좋은 짝지발감이 많았다. 그것으로 고무총을 만들어 가택수색을 온 왜놈순사를 쏘신적도 있었다.

《이걸루 왜놈을 잡는단 말이지?》

《네, 그놈들은 우리 아버지, 엄마를…》

말을 채 맺지 못한 사내애의 도두룩한 입술이 갑자기 가늘게 떨리였다.

《네 말이 옳다. 잘 만들어서 원쑤놈을 쏴라. 그런데 이 앤 누구지?》

《얜 금숙입니다. 얘도 아버지, 엄마 다 죽었습니다.》

《이 앤?》

예닐곱살난 사내애가 우두커니 옆에 와 섰다.

《그 애도 없습니다.》

《네 이름은 뭐지?》

《내 이름은 첫쨉니다. 누나야, 나 첫째란 이름 말구 또 있다구 했지?》

처녀는 고개를 들고 바느질하던 손을 잠간 멈추더니 첫째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를 천천히 떨구었다. 터진 혼솔을 다 꿰메고 실을 물어끊자 금숙이는 냉큼 일어나 첫째가 앉은쪽으로 달려내려갔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네댓명의 아이들만이 한데 모여있는것에 주의를 돌리시였다.

《첫째의 누나가 이 애들을 다 돌보고있습니까?》

그이께서는 대뜸 이렇게 물으시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동단원입니까?》

《우리 누난 아동단 소대장입니다.》

첫째가 살눈섭이 긴 눈을 크게 뜨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누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렇댔구만. 그래 동무네 마을은 어딘데 언제 <토벌>을 당하였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옥이라는 첫째의 누나에게 물으시였다. 정옥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빨간 입술을 씹으며 망설이다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네, 왕청 큰골입니다.…》

《큰골이란 말이지?!》

김일성동지께서는 놀라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예, 그저께 <토벌> 맞고…》

눈물이 가랑가랑해진 정옥은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또 고개를 숙여버렸다.

《음, 그렇댔군.…》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침중하게 한마디 하시고는 고개를 들어 묵묵히 먼 하늘을 바라보시였다. 이윽하여 그이께서는 다시 정옥이에게 고개를 돌리시였다.

그리고 그이께서는 정옥이에게 자초지종을 자세히 물으시였다.

금년 열여섯 잡힌 얼굴이 동그랗고 살눈섭이 긴 정옥은 소녀티를 겨우 벗으나마나한 처녀였다. 정옥은 말을 하다가는 이따금씩 울음이 북받쳐서 입술을 깨물고 한참씩 어깨를 들먹거리군 하였다.

청년들이 마당에서 총살당하던 이야기며 어린것들이 불에 타던 처절한 광경을 그가 목격한대로 짤막짤막한 몇마디 말로 표현하였다. 정옥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계시던 그이께서는 가슴이 몇갈래로 찢기는것 같으시였다. 옆에 앉은 금숙이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는 그이의 손길이 걷잡을수 없이 떨리기까지 하시였다.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정옥이가 한참 이야기를 계속하고있는데 저만치 잔디밭에 앉아서 대통으로 담배를 태우고있던 중년사나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큰골에서 농사를 하던 서국보였다.

정옥이가 마을의 참상을 다 이야기하지 못하고 끝낸 얼굴을 싸쥐고 흐느끼게 되였을 때 서국보는 가슴을 움켜쥐고 정옥이를 대신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피여오르는 울분을 어디에 터뜨리지 못하여 모대기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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