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2 장

왕관없는 녀왕

3

(1)


찬바람에 문풍지가 드르릉 귀따갑게 울었다. 장작이 떨어져 불을 때지 못한 구들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포대기를 깔고앉은 민자영은 시린 두손을 호호 입김으로 녹이고나서 다시 책에 눈길을 주었다.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거칠것이 없다는 말그대로 넓고 휑뎅그렁한 방안에 소녀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는 모양은 보기에도 민망하고 궁색스러웠다.
이 소녀가 바로 리조 26대임금인 고종의 왕비로, 세상에 희세의 녀걸로 이름을 남긴 민비였다. 아직은 목도 가늣하고 어깨도 가냘픈 천애고아에 지나지 않았지만 처녀꼴이 잡히기 시작한 자영은 몸매도 날씬하고 얼굴도 희고 어여뻤다. 흠이라면 이마우에 얽음솜솜한 몇개의 마마자욱이 알릴듯말듯 나있는것이라 할가.
기록에 의하면 철종2년(1851년) 9월 25일에 경기도 려주군 조동면에서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여난 민비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지금 살고있는 서울 안국동의 감고당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의 어릴적 이름은 자영이라고도 하고 소저라고도 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래서 력사에서는 민비 혹은 시호인 명성황후로 전해지고있을뿐이다.
8살에 량친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자영은 지금 자기보다 12살이나 우인 양오라비 민승호의 슬하에서 살고있다.
원래 영특한 자영은 16살잡히는 지금에 와서 못하는 일이 없었고 학식도 또한 한다하는 세도집 도련님들 못지 않게 소유하고있었다. 《론어》, 《맹자》는 물론 《대학》이며 《중용》까지도 뜬금으로 외우는 형편이였다.
그는 민승호가 어데서 구해다주는 서양그림책도 즐겨보았다. 증기를 뿜어올리며 달리는 기차며 대형함선들, 참말로 세상은 넓고도 희한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것은 책을 통해 배운다는것이 또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아마도 이런 탐구열이 그가 후에 왕비로 간택되여 삼천리강토를 통치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자영은 등잔불아래서 주자의 《론어집주》를 왕왕 소리내여 읽고있었다. 그러면 글귀가 머리속에 들어올뿐아니라 우선은 추위를 잊을수 있기때문이다.
《군자지언언야 부득이후출지라, 비언지난이행지난야라, 인성기불행야 시이경연지라. 언지여기소행하고 행지여기소언즉 출세기구필불이의라. (군자가 말할 때에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입을 연다. 말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실행하기 어렵기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실행하지 않기때문에 경솔하게 말한다. 말한것처럼 실행하고 행동을 말처럼 하려면 말을 입에 담기가 결코 쉽지 않을것이다.)》
그가 한참 소리내여 글을 읽고있는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토방에 신발벗는 소리가 났다.
자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색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자영의 양오라비 민승호였다.
눈꼬리가 량쪽으로 쳐들려 록록찮은 인상을 주는 승호는 오늘따라 거동이 이상쩍었다. 갓은 찌글사하게 얹혀있고 도포고름도 거의나 풀려있었다.
자영은 얼른 그에게 방석을 가져다주었다.
《구들이 찬데 방석우에 앉으세요.》
《응.》
대꾸하고서도 승호는 움직일념을 안했다.
《참, 시장하시겠어요. 한데 국이 다 식어서 어쩌나…》
자영이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민승호가 급급히 만류했다.
《얘얘, 언제 그럴 새가 없다.》
자영은 여느때와 다른 오빠의 행동거지가 이상하여 우두커니 서있었다.
《야, 빨리 차빌 해라.》
《이 밤중에 어데 가자고?…》
《운현궁에.》
《예?!》
자영은 기절초풍이라도 하듯 놀랐다. 운현궁이란 지엄한 대원군대감께서 계시는 곳이다.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지체높은분의 집으로 간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대원위대감께서 널 보시겠단다.》
《저를요? 왜요?》
《글쎄다.》
민승호도 어쩐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빨리 가자. 부대부인께서 이르시더라.》
대원군의 부인이고 임금 고종의 생모인 민부대부인은 민승호의 친누이이고 자영에게는 12촌 언니벌이 된다. 그러니 자영이를 부른다 해서 별로 이상할것도 없다.
자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의 이 급작스러운 부름이 보통 친척간에 흔히 있는 례사로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였다. 그도 지금 온 나라에 왕비 간택령이 내려져 15살부터 19살까지의 처녀들은 약혼도 결혼도 할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여기까지 생각한 자영은 느닷없이 가슴이 후두두 뛰고 손에 땀이 쥐여졌다. 어쩌면 오늘 밤에 자기의 명운이 결정될수도 있지 않는가. 임금은 15살, 자기는 16살, 안성맞춤이라면 이보다 더 안성맞춤한 나이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자영이 자기는 가까운 혈붙이 하나 없는 무우밑둥처럼 외롭고 가련한 존재이다. 이런 비천한 나를 하필이면…
《야, 뭘 그러구 멍청히 서있느냐? 빨리 차빌 해라.》
민승호의 다그어대는 소리에 자영은 상념에서 깨여났다. 그는 당황해하지도 않았고 덤비지도 않았다. 령리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로 양오라비를 말끄러미 쳐다보았을뿐이다.
자영이를 마주 빤히 쳐다보던 승호가 한동안 바재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자기 속마음을 헤쳐보였다.
《자영아, 너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아느냐?》
《알아요.》
자영이의 태도는 너무도 태연하고 당돌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승호가 도리여 눈이 떼꾼해졌다.
《알다니? 뭘 안다는 말이냐?》
《선을 본다는거지요 뭐. 어쩌면 왕비로 간택될지도 모르는…》
《엉?!》
너무도 놀란 민승호는 그만 뒤로 벌렁 나자빠질번 하였다. 평소에 자영이가 똑똑하고 야무지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승호로서도 그가 이처럼 총명하고 눈치가 빠를줄은 미처 몰랐다.
승호는 다시한번 자영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약간 도도록한 이마며 깔끔한 눈길, 곧은 코날이며 작고 야무지게 다물린 입술은 그가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임을 말해주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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