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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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일균이 부르는 중일촌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김중권은 뒤에서 누가 자기를 지켜보는것 같아 얼결에 머리를 돌렸다.
저쪽지름길에 서있는 가냘픈 오리나무밑에 감장치마저고리에 회색목도리를 두른 녀자가 서서 이쪽을 보고있었다.
왕청에 와서 부녀회장으로 사업하는 림성실이였다. 순간 김중권의 얼굴은 근엄하게 굳어지였다.
그는 오리나무쪽으로 다가갔다.
림성실은 이마에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정기가 흐르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둘은 말을 못했다. 림성실의 부풀어오른 저고리앞섶만 조용히 오르내렸다. 김중권의 뒤를 쫓아 20리길을 종주먹을 쥐고 달려온 그였다.
김중권도 말없이 림성실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그들은 이미 약혼한 사이였다. 흑곤색세라복에 윤나는 머리칼을 날리며 길림의 학생운동을 따르던 그 시절에 림성실은 룡정동흥중학교 학생시위대렬의 선두에서 주먹을 내휘두르던 김중권을 알게 되였다. 그후에는 은밀한 자유련애, 약혼… 간도를 휩쓴 5. 30폭동의 참화가 있은 뒤 림성실은 오래간만에 찾아온 녀동무로부터 김중권의 쪽지편지를 받았다. 나는 당신에게 행복을 안겨줄수 없다, 혁명은 시련기에 들어섰고 나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혈전의 길에 나선다, 나때문에 구속을 느끼지 말고 자유로운 몸이 되여 행복을 찾아가라, 당신이 행복하게 살고있다면 나는 어느 하늘밑에서 숨이 져도 마음이 편할것이다, 이것이 쪽지내용의 전부였다.
림성실은 자기 운명에 던져진 폭탄선언을 안고온 동무에게 그가 지금 어디에 숨어있느냐고 물었다.
그 동무는 조직의 비밀이니 더 묻지 말라고 했다.
림성실은 언제인가 읽은 애국렬전에서처럼 머리칼 한줌을 잘라 봉투에 넣어 편지와 함께 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삼키였다. 칠흑같이 검고 향긋한 처녀의 그 머리칼은 영원히 변치 않고 그를 따르리라는 맹세의 표시였다. 림성실은 그 맹세대로 지하공작을 하다가 유격근거지가 생기자 왕청에 들어와서 부녀회장이 되였다.
세해가 지난 다음 김중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여 왕청에 나타났다. 림성실이 가슴속에 고이 품고있은 얼굴빛이 맑은 청년이 아니였다. 초연에 그슬려서인지 검스레하게 탄 그의 얼굴은 언제나 근엄하게 굳어져있었다.
이전에는 그리도 시원하고 밝게 웃던 그였건만 이제는 웃으면 한쪽볼편이 어색하게 떨며 좀 작아진 왼쪽눈에 인차 물기가 어리는것이였다.
그 변모된 얼굴인상은 림성실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며 세월의 가차없는 흐름과 혁명의 준엄성을 깨우쳐주는듯 하였다.
김중권은 마촌에서 오래간만에 림성실을 만났건만 별로 기뻐하는것 같지도 않았다.
림성실은 그것이 못내 섭섭하였다. 그러나 리재명의 집으로 찾아가서 김중권과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중권은 5. 30폭동직후 간도에로 나오신
림성실이 지나가는 말로 그사이 눈병을 앓았댔는가고 묻자 그는 손등으로 왼쪽눈을 훔치고는 허거프게 웃었다.
《이거말이요? 5. 30폭동때 왜놈의 총탁에 얻어맞은 자리요.
어색하게 떠는 볼편… 물기가 어리는 눈… 림성실은 가슴이 에이는듯 아파났다.…
림성실은 오리나무를 붙잡고 애끊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속삭인다.
《가지 말아요. 돌아서자요!》
《나때문에 달려왔소?》
《리재명동지한테서 다 들었어요. 그들을 이기지 못해요. 자기 의지에 복종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살할수도 있는 쏘베트광신자들이예요. 큰 사명을 띠고 와서 소소한 문제에 끼여들었다가 공연히…》
《이건 소소한 문제가 아니요. 마동호라는 한 청년의 운명문제가 아니요. 나는 다 들었소. 로선상 문제요. 쏘베트의 시책을 바로잡지 않고는
림성실은 눈을 조용히 내리뜨고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근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도 과격한 론쟁은 피하세요.》
《성실동무!》
그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림성실이 눈시울을 올리떴다.
《네?》
김중권은 그 눈이 아니라 어딘가 좀 옆쪽을 보았다.
《앞으로는 자주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하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닌것 같소. 다르게 오해는 하지 마오.》
림성실은 마른침을 삼키였다.
김중권은 떠나갔다.
림성실은 쓰러지듯이 오리나무를 붙잡고 거기에 몸과 마음을 기대였다. 가냘픈 오리나무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듯 휘청거리며 하늘에 뻗은 가지들을 구슬프게 흔들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