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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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해빛에 뾰족산 정수리가 은백색으로 번쩍이기 시작하자 눈에 묻힌 깊은 골안은 환하게 밝아졌다.
여러가지 모양새의 굴뚝들에서 피여오르는 김같이 하얀 연기들은 해돋이와 함께 점점 눈부시여지는 눈천지와 한데 어울려서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산등성이의 우중충한 상록수림만이 겨울추위를 이겨내며 싱싱하게 빛갈이 살아올라 눈속에서 시커먼 빛을 자랑하고있다.
마촌은 아이들의 칭얼대는 소리, 솥뚜껑소리, 웃음소리, 그릇들을 부시는 소리로 흥성거렸다. 이른아침부터 참새들은 야단스럽게 우짖으며 고삭은 초가지붕의 처마밑과 조낟가리와 산옆의 나무숲사이로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마다에서 정갈하게 흰 눈가루들이 소리없이 흩날려내렸다.
두마리의 까치가 높이 떠서 동림촌쪽으로 날아가며 떠들썩하게 우짖었다.
갸- 갸- 갸-
물동이를 이고 집을 나선 녀인들은 마을길에서 눈이 말끔하게 쓸어진데 어리둥절해서 두리번거리다가 우물터를 향하여 종종걸음을 쳤다. 멀리에서 보면 녀인들의 웃도리나 물동이만 눈우로 미끄러져가는것 같았다.
이 아침 우물터에 모여든 녀인들은 제일먼저 나온 무산집어머니를 둘러싸고 물길을념도 않고 수군수군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그때가 그러니까 초저녁이였소다? 깊은 밤중이였소다?》 하고 얼굴이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색시가 눈이 동그래서 무산집어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산집어머니는 그 색시에게 눈을 흘기며 나무람부터 하였다.
《젊은것들이 잠귀가 그렇게 어두워서야 어디다 쓰겠나, 쯧쯧… 나는 까막눈이 돼서 세상물정은 모르지만 선참으로 달려나갔네. 눈발이 펄펄 날리는
속으로
남정들의 덧저고리를 입고 허리에 중동매끼를 질끈 동인 중년녀인이 한탄조의 말을 하였다.
《이 미물은 짚신을 거꾸로 신구 달려나갔어두 눈물이 자꾸 나와 찬찬히 보지두 못했다우.》
《저런! 눈물이야 씻구 보문 되지비?》
《어째 손두 말을 안듣습데.》
《에구, 그러니까 등신이지.… 나는 찬찬히 봤소.》
무산집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
《꽃나이요?》
얼굴이 이쁘장한 녀인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런 나이들이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는 소리가 뜬소문은 아니겠소.…》
《
무산집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자 녀인들은 모두 자기들의 실책에 펄쩍 놀라며 한마디씩 했다.
《이걸 어찌오. 우린 그 생각두 못하구있었지비!》
《정말 앉아뭉개면서 어쩌지 못한다니까!》
《그 집에서두 소금이 없어 김치를 못담갔겠는데…》
이때 리재명의 처 현씨가 동이를 안고 다가왔다.
무산집어머니가 현씨에게 물었다.
《새벽에 임자네 내외가
《그 집 할아버지 말이 따뜻한 아래방에 모시려고 했는데
《원, 그랬구만!》
《웃방이야 차겠지비?》
《그 집 로인들이 너무 송구해서 밤새 엇바꾸어 부엌에 내려가 장작불을 지피였대요.》
《그래야지, 장작은 아껴서 어디다 쓰겠소!》 무산집어머니가 로인들의 처사를 칭찬했다.
《그래 아침에
《아이구 성님두, 난 찬거리가 될만한걸 들구 남편을 따라나서긴 했지만 이게 꿈이 아닌가싶으면서 가슴이 활랑거려 정지문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했다오.》
《저런 머저리! 쯧쯧…》
이때 여기에로 개털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말을 성급히 몰아왔다.
홍병일이였다.
말의 배허벅과 다리는 눈투성이가 되였고 주둥이에는 성에가 허옇게 불리였다.
홍병일은 말안장우에서 리재명의 처를 내려다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아주머니, 쏘베트회장이 어데 있소? 얼른 나 좀 보자고 하시오!》
《아유, 어쩌면 좋을가요? 지금
현씨는 기여들어가는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녀인들은 얼굴들이 굳어졌다.
홍병일은 눈을 내리뜨고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어성을 높였다.
《겸상이요? 아주머니! 아침 새벽부터 그분을 찾아댕기오?》
《그런게 아니야요.…
홍병일은 갈개는 말을 돌려세우더니 유격대병실쪽으로 뛰여갔다. 말꼬리뒤에서 눈가루가 뽀얗게 날리였다.
녀인들은 묵묵히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산집이 한숨을 내쉬였다.
《에그,
얼굴이 해사한 녀인이 그의 모진 말에 겁을 먹고 나직이 타일렀다.
《성님두… 다 혁명군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말을 탕탕 하다가 욕을 보겠어요.》
《나는 혁명군편이 아니요? 그저 얕보구 꿱꿱댄다니까.》
뒤따라 다른 녀인들도 입을 열었다.
《어째 오늘은 저렇게 꼭두새벽부터 뛰여다닌다우?》
《정말 천하에 무서운게 없는것 같더니.》
《어휴- 이거 이런 말들을 싹 거두오.》
《어이구 성님, 마촌에
현씨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드레박을 쥐였다. 그 말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쏘베트회장인 자기 남편에 대한 비난이였다.
현씨는 지난밤에 남편이 한 일에 대하여 녀인들앞에 속시원히 터놓고싶었으나 입을 고집스럽게 다물고 우물속에 드레박을 던져넣었다.
남편은 간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는 부엌아궁에 마른 장작을 지피고는 그앞에 앉아 장부책들을 뒤지고 목책에다 글들을 적어넣었다. 현씨가 여러번 눈을 붙이라고 권했으나 듣는둥마는둥 자기 일에만 골몰하였다.
새벽녘에 리재명은 기쁨에 번쩍이는 눈으로 안해를 쳐다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여보, 자다니 정신이 있소?
《당신두… 천가지를 물으실지 만가지를 물으실지 모르면서 그 대답을 어떻게 미리 마련해둔다구 그래요. 차라리 정신이나 맑아지게 좀 눈을 붙여요.》
《쳇, 리재명이가 숙맥인줄 아우? 여기서 벌어졌던 일이랑 그리구 내가 총구멍앞에 섰던 일이랑 다 말씀올리겠소. 결판을 내고야말겠소!》
《여보!…》
현씨부인은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를것만 같아 가슴이 화들화들 떨렸다.
현씨는 그래서 이 아침에도 말없이 물만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