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군국기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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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의 부름을 받은 조상궁이 내전에 조용히 들어섰다. 환갑나이가 불원한 그는 눈가며 입가는 물론 이마에도 주름살이 많았으나 16살에 궁녀로 뽑혀들어와 한생을 처녀로 늙다보니 젊었을적의 애잔하고 정숙한 모색이 아직도 엿보였다.

민비는 책을 읽고있었다. 조상궁은 민비의 눈길이 비록 글줄에 가있지만 그가 책을 보는것이 아니라 머리속의 생각을 굴리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경복궁 궁성밖은 물론 궁안에도 일본군대가 총을 잡고 서있어 민비는 한 발자국도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었다.

《중전마마, 부르셨나이까?》

민비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규장각에 가서 빅토리아에 대한 책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어리둥절해진 조상궁이 빅토리아란 무엇인가고 얼떠름하게 물었다.

민비가 얼굴을 들고 조상궁을 노려보았다.

그 눈길에 예기가 질린 조상궁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민비가 별안간 화를 발칵 냈다.

《아니, 영국의 빅토리아녀왕도 모른단 말이냐! 내 곁엔 저런 불학무식한 늙은 등신들밖에 없으니…》

조상궁은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하옵니다, 마마.》

시어미 역증에 개옆구리 찬다는 격으로 왜놈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슴속이 부글부글 괴여오르고있던 민비는 애꿎은 조상궁에게 화를 내고나서 불같은 한숨을 내쉬였다. 명색이 일국의 국모라는것이 타국군대, 일본놈들의 감시속에 방안에 갇혀있으려니 속에서 불이 일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무슨 죄인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원통스럽고 분통스러웠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믿고 의뢰하던 렬강들이 모두 아닌보살하고있지 않는가. 그는 이 사실이 무엇보다 의문스럽고 분심이 치밀었다. 일본이라는 보잘것없는 나라(민비는 그렇게 생각했다.)의 날불한당같은 놈들이 주권국가의 궁성을 비법적으로, 강도적으로 습격점령하고 궁성 무기고의 많은 무기와 함께 수백, 수천년간 전해내려오던 궁성안의 재보, 국보를 강탈해갔는데도 어느 렬강도 이에 대해 항의 한마디 하지 않고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다 강도의 나라들이여서 그런가.

어쨌든 세상엔 진리라는것이, 정의라는것이 존재하는 법이니 때를 기다리자. 이럴 때일수록 인내성이, 시간이 모든것을 결정한다는것을 지난 시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있는 민비는 애통이 터지는 마음을 강잉히 참았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소리로 조상궁에게 일렀다.

《어디서든 젊고 학식있는 애들이 있으면 궁녀로 뽑아오너라. 지금처럼 방구석에 처박혀있으려니 말동무가 그립구나.》

《네, 중전마마.》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민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 조상궁은 저도 몰래 몸을 흠칫 떨었다. 평소에 민비가 참으로 아름다운 녀인이라고 치부하고있던 조상궁은 민비의 얼굴표정을 본 이 순간에는 그 무슨 마녀를 대한듯이 소름이 끼치고 지어 전률에 가까운 공포까지 느꼈다.

벽의 어느 한점을 응시하고있는 민비의 표표한 낯색은 사무럽다못해 표독스러웠고 눈에서 싸늘한 바람이 일었다. 녀인의 아름다움이란 물론 그 모색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의 성격과 기분에 많이 관계되는 법이다. 마음씨가 착하고 늘 즐거움과 기쁨에 넘쳐 방실방실 웃는 처녀는 언제 봐도 귀엽고 예쁘지만 가슴속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차서 얼굴기색이 침울한 녀인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일수는 없는것이다. 하물며 왜놈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 민비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민비의 표정을 통해 자기가 제때에 맞춤한 랑자를 천거하지 못하면 그가 또 천둥같이 화를 낼것 같아 조상궁은 속이 여간만 오마조마하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애들을 찾는단 말인가?)

난중하고 난감한 기색으로 생각을 굴리던 조상궁의 뇌리에 문득 언젠가 계원사에서 보았던 랑자(아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음버캐가 앉은 돌층계에 소금을 뿌리던 처녀, 그러자 놀랍게도 얼음이 녹아버리던 일… 그게 아마 금년 정월대보름날이였지.

고개를 쳐든 조상궁의 눈빛이 빛났다.

《중전마마, 맞춤한 랑자가 하나 있소옵니다.》

조상궁은 정월대보름날에 계원사에서 목격한 일을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흥미있게 듣고있던 민비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정녕 그렇게 영특한 애가 있으면 좋으련만 벌써 출가하지 않았을가?》

《아무튼 쇤네가 알아보겠소옵니다.》

민비는 별로 미덥지 않아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궁은 민비앞에서 물러난 그길로 아정이의 집을 찾아갔다.

아정의 집 대문밖에 조상궁의 가마가 멈춰섰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이월네가 큰 경사가 난듯이 소리소리 질렀다.

《대궐에서 조상궁께서 행차하셨나이다.》

《뭐라구?!…》

대문이 열리며 아정이네 집식구들이 쓸어나왔다.

엄정한 낯색으로 가마에서 내린 조상궁이 누구에게라없이 이 댁이 홍역관댁인가고 물었다.

키가 큰 홍역관이 허리를 숙이며 대꾸했다.

《그렇소이다. 소인이 역관 홍학규올시다. 어서 들어갑시다, 집은 루추하오나.》

시원한 노방주저고리를 입은 조상궁은 긴 남스란치마자락을 슬슬 끌며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반백의 쪽진 머리에는 은봉채가 꽂혀있었다.

아정이네 집 안방에 자리잡고앉은 조상궁앞에 홍역관이 송구스럽게 앉아있었다. 그는 대궐에서 나온 조상궁이 자기 집을 찾은것이 못내 궁금하고 의아스러웠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던 조상궁이 드디여 홍역관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댁 랑자가 리화학당을 다녔다지요?》

홍역관이 얼른 대척했다.

《그렇소이다.》

《출가했는가요?》

《아직…》

《마침이요.》

만족스러워하는 조상궁을 보고 홍역관은 더욱 의혹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댁 랑자를 한번 볼수 없겠소?》

《그리하십시오. 잠간…》

자리를 일어 밖으로 나간 홍역관은 잠시후 아정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섰다.

인사를 드리라는 아버지의 말에 아정은 한 무릎을 세우고 두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조상궁에게 나부시 절하였다.

《소녀 문안드리오이다.》

아미를 숙이고 얌전히 절하고있는 아정이를 조상궁은 두눈을 조프릴사하고 지켜보았다. 가리마를 타서 등뒤로 칠칠히 드리운 굵고 검은 태머리, 분결마냥 뽀얗고 하얀 살결, 나슨하게 떨군 동그란 두어깨, 더우기 앙증스럽게 자그마한 귀가 여간 귀엽고 탐스럽지 않았다.

조상궁의 입은 저도 몰래 벌어지고 좁아진 눈귀에 웃음이 실렸다.

자기를 뜯어보는 조상궁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낀 아정이가 낯색을 붉히며 아미를 더욱 깊이 숙였다. 못내 수집어 볼웃음을 짓는것이 또한 예뻤다.

이제는 나가보라는 조상궁의 말에 아정이가 뒤걸음질로 밖으로 나가자 조상궁은 홍역관에게 자못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제 중전마마의 의결을 받아야 하겠지만 십중팔구는 이 댁 랑자를 입궐시켜 마마의 시중을 들게 해야 할겁니다. 하오니 귀댁에서도 그리 알고있으시오.》

너무도 청천벽력같은 조상궁의 말에 홍역관은 얼혼이 나간듯 자리를 일념도 못했고 문밖으로 사라지는 조상궁에게 인사할 생각도 못했다.

안방에서는 아정의 어머니 정씨가 방바닥을 손으로 때리며 넉두리를 했다.

《아니 여보,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 외동딸을 궁녀로 뽑아가다니?!…》

가뜩이나 속이 언짢던 홍역관은 안해의 넉두리에 버럭 역증을 냈다.

《이거 그만두지 못하겠소!》

하지만 정씨는 더욱 기광을 부렸다.

《그래 당신은 속이 편안하오! 한번 대궐에 들어가면 종신토록 시집도 못 가고 부모와도 생리별인데 세상에 이런 법이 어데 있어요, 예? 아이고, 내 팔자야.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을 이렇게 홀지에 떼우다니?!…》

《나라법이 그런걸 어찌겠소, 허어!》

홍역관도 장탄식을 했다.

조상궁이 자기 집을 찾아온 사연을 알고있는 아정은 제 방의 원앙새수틀앞에 수심에 잠겨 앉아있었다.

이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이월네가 뛰여들었다. 그는 희색이 만면해서 떠들었다.

《아씨, 대궐에 들어가신다는게 참말이와요?》

아정이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월네는 손벽을 치며 제 혼자 기뻐서 새망을 떨었다.

《아이 좋아라, 우리 아씨 상궁이 되겠군요.》

격분한 아정은 불이 이는듯 한 눈으로 발쌍스러운 이월네를 쏘아보았다. 아정이의 여느때와 다른 태도에 이월네는 영문을 몰라 눈이 둥그래졌다.

《아씨…》

그러는 이월네에게 아정은 청높이 소리쳤다.

《나가! 당장 나가!》

새없이 까불던 이월네가 주춤거리며 나가버리자 아정은 방바닥에 쓰러져 통곡을 터뜨렸다. 그는 후회가 막급했다. 자기 신상에 이런 불행이 닥칠줄이야 꿈에나 생각하였던가. 이런줄 알았으면 최도고아저씨에게 졸라 훌 류학의 길을 떠나버렸을걸. 류학까지는 못한다 해도 견문을 넓히기 위해 외국려행이라도 다녀올수 있지 않았는가. 아니면 꿈결에도 잊을수 없는 병무씨와 일찍 결혼식을 하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시작할수도 있지 않았는가. 얼마나 무지개같이 아름답고 신기루와 같은 황홀한 생활인가. 눈앞의 물건을 손에 쥐듯이 너무도 손쉽게 이룰수 있는것이기에 그닥 덤비지도 않고 우유부단하게 처신하다보니 마른 하늘의 생벼락과 같은 불행을 당하게 되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고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운명에 체념하고 순종하는 외에 다른 길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속에 맺혀 내려가지 않는 께름하고 야속하고 분한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가 그토록 미워하던 민비의 시중을 들게 된다는 사실이였다. 어려서부터 개화파인 아버지의 영향과 본래 총명한 머리로 세상리치를 일찌기 터득한 아정은 민비를 나라를 망치게 하는 아주 못된 녀인으로 치부하고있었다. 제 권세를 지키기 위해선 외국군대도 서슴없이 불러들여 백성들을 죽이게 하고 자기 세자의 무병을 빌어 밤새껏 치성놀이를 벌리는 권세욕에 환장한 야심찬 녀인이 바로 민중전으로 불리우는 민비인데 하필 그런 녀인의 시중을 들게 되다니?! 이런 원통스러운 일이 어데 있단 말인가. 한참후에 마음을 진정한 그는 원앙새수틀을 바라보며 속으로 뇌였다.

《병무씨, 우리들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장인가 봐요. 나라의 법은 인력으로는 어쩔수 없으니 애달픈 소녀의 심정 그 누가 알아주겠나요. 바라건대 좋은 배필을 만나 부디 길이 복락을 누리세요.》

또다시 아정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려 흰 명주천에 수없는 얼룩을 지어놓았다.

그 얼룩, 그 눈물자욱을 시름겹게 바라보던 아정은 문득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범의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구중궁궐이 아무리 깊다한들 범의 굴에 비기겠는가.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살아보자. 인생백년에 고락이 상반이라는데 파랗게 젊디젊은 내 한생이 눈물속에 흐를수만은 없다. 때를 기다리자. 기다리면 때는 오기마련이다.

본시 령리하고 이악한 아정은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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