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 1 장
군국기무처
5
물녘에서 여러명의 길손들이 다가오는 나루배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속에 끼여있던 병무는 나루배가 기슭에 닿자 저윽 놀라와했다. 직산의 보덕리로 갈 때 만났던 그 처녀가 오늘도 여전히 배를 부리고있었던것이다.
사공처녀도 놀라더니 뭍에 내려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무사했군요.》
병무는 의아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왜 아직도 배를 부리시오?》
《…》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있을뿐 입을 벌리지 못했다.
《저 성녀의 아버지가 앓아서 저 애가 처녀의 몸으로 이 고생이 아니요.》
한마을에서 사는듯 한 중년의 아낙네가 한마디 했다.
노대가 푸른 물을 휘젓고있었다.
병무는 연약한 처녀가 힘겹게 노를 젓는것이 무척 가긍했다.
《아버지의 병은 차도가 없으시오?》
인정미있는 병무의 말에 성녀가 나직이 대꾸했다.
《예.》
《음, 그래서…》
드디여 나루배가 뭍에 닿았다. 성녀가 먼저 뭍에 내려 배줄을 잡고 섰다.
뭍에 훌쩍 뛰여내린 병무가 처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품속에서 돈을 꺼내 처녀의 장알이 박힌 손에 쥐여주었다.
《자, 삯전을 받소.》
자기 손에 놓인 돈을 본 성녀가 깜짝 놀라 얼굴을 쳐들었다.
웬 돈을 이렇게 많이 주는가고 의아해하는 처녀에게 병무는
성녀의 고운 눈에 대뜸 눈물이 핑 고였다.
《도련님, 고맙…》
성녀는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병무는 불쌍한 처녀에 대한 동정과 련민의 정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서울종각에 이른 병무는 그앞에 모여서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저도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서울이라 어서 빨리 집에도 그리고 아정이한테도 가고싶었지만 웬일인지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발걸음이 인차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소리쳤다.
《우리 까막눈들을 위해 어느 식자있는분네가 좀 읽어주소그려.》
그러자 옷갓을 한 점잖은 중로배가 말했다.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이외다.》
까막눈이 또 소리쳤다.
《읽소그려.》
《예.》 하고 대꾸한 중로배가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을 읽어주었다.
《〈첫째, 지금부터 국내외의 모든 문서에는 개국기원을 사용한다.〉》
《개국기원?》
《태조대왕이 우리 조선을 세운 해부터 력서를 셈한다는 소리외다.》
《그러니 금년은?》
《503년이외다.》
《계속 읽으소.》
《〈둘째, 문벌과 량반, 평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며 귀천을 불구하고 인재를 뽑아쓴다.〉》
《히야, 량반없는 세상이 된다? 이거 천지개벽이외다.》
군중속에서 찬탄과 탄성의 웨침이 울려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 그런 세상이 되겠소, 지상공문이지.》
《아, 나라님께서 의결하신 법인데두.》
《자자, 떠들지 말구 마저 들읍세다.》
《〈셋째, 문존무비의 구별을 철페하고…〉》
중로배가 개혁안을 채 읽기도 전에 또 탄성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제야 세상이 바로 서는것 같다느니, 지금껏 무반을 천시했기에 궁성까지 왜놈군대에게 빼앗기지 않았는가고 떠들었다.
《〈넷째, 죄인
《한숨이 나가는구먼.》
누군가 한숨쉬듯 개탄했다. 그는 처벌이야 죄인 한사람에게 국한되여야지 련좌법에 걸어 삼대를 멸족시킨다, 사돈의 팔촌까지 벌하였으니 세상천지에 그런 고약한 법이 어디 있는가고 격분을 터뜨렸다.
《그래야 백성들이 꿈쩍 못하지.》
《그만 떠들구 개혁안을 마저 듣자구요.》
《둬두시우. 꿈보다 해몽이 그럴듯하다구 개혁안에 대한 해석이 더 듣을만 하외다.》
군중들이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고 중로배가 개혁안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남녀의 조혼을 엄금하며 남자는 20살, 녀자는 16살이라야 비로소 결혼을 허락한다는것이며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그 자유의사에 맡긴다는것이며 공사노비의 법을 파하고 인신의 매매를 금한다는것이며 비록 평민이라도 국가민족에 리로운 의견이 있다면 군국기무처에 건의하여 의논하도록 한다는 등 아홉가지 개혁안을 다 읽은 중로배가 소매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전을 닦자 군중들속에서 또 가타부타하는 의논들이 분분했다.
《그럴듯해. 이제야 우리 조선두 개화문명국이 되는가부다.》
《군국기무처에서 제정한 이 법들은 이전 갑신정변때 김옥균의 개화당정강이나 지금 남도에서 일어난 전봉준의 동학군이 내세운 개혁안을 본따서 만든거라 합디다.》
《아무튼 조령모개라구 아침에 내린 령이 저녁에 바뀌지 말아야 할텐데…》
정치에서 소외되였던 사람들, 오직 정치의 대상으로만 되였던 백성들이 드디여 정치의 참여자가 된듯 한 흥분의 파도속에 휘말려들어갔다.
군중들이 떠드는 소리에 병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세상이 어쩐지 바로 잡혀간다는 생각에 그는 심신이 쇄락했다.
병무는 도고 최일의 집부터 들렸다. 그를 반갑게 맞이한 최일은 덕대 온종일의 편지를 읽고있었다.
병무는 편지의 내용을 휑하니 꿰뚫고있었다. 온종일은 그간 직산보덕리에 광구를 선정하고 최도고가 보내준 레루며 광차들을 설치하여 버럭이며 광석을 실어나를수 있게 되였다고 일일이 썼을것이다. 참으로 금광개발의 전망은 휘황하다고 할만 하였다. 이제 직산광산에서 누런 금맥이 꽝꽝 쏟아져나올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높뛰여 잠이 다 오지 않는다고 온종일은 썼을것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자기, 병무가 모든 일을 주관하면서 덕대를 잘 도와주었기에 짧은 기간에 다대한 성과를 거둘수 있었다고도 했을것이다.
편지를 읽고있는 최도고의 앞에 병무는 단정히 앉아있었다. 최도고는 가끔 고개를 들고 믿음어린 눈길로 병무를 바라보군 하였다.
이윽고 최도고는 편지를 놓고 입을 열었다.
《엄도령, 이번길에 참으로 수고많았네. 내가 사람을 빗보지 않았지.》
병무는 과도한 칭찬이 거북스러워 눈길을 떨구며 변명하였다.
《과분천만한 말씀입니다. 우리 광산이 중전마마께옵서 윤허하시고 관심이 크다는것을 알고있는 그곳 관가사람들의 도움이 컸소이다.》
《물론 그랬을테지.》 도고 최일이도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쨌든 중전마마의 관심도 지대하시니 실망하시지 않도록 일을 다그치세!》
《알겠소이다.》
《참, 집엔 들렸댔나?》
《아니, 곧바로 오는 길입니다.》
《음.》
최도고가 기대고있던 안석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그속에서 돈을 꺼내여 병무에게 밀어주었다.
《부모님들께 무얼 좀 사들고 들어가게나.》
병무는 송구스러워 얼른 뒤전으로 물러앉았다.
《전번에도 많이 주셨는데 또 이렇게…》
《받게. 이제 일이 성사되면 엄도령도 한밑천잡게 내 돌봐주지.》
《고맙습니다.》
머리를 깊이 숙이는 병무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최도고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구 엄도령도 이제는 장가를 들지. 내 공경귀족들 부럽잖게 엄도령의 잔치를 차려줄테야.》
병무는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그저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한무릎우에 다른 무릎을 올려놓은 최일은 문밖을 바라보며 웃몸을 흔들면서 희열에 넘쳐 중얼거렸다.
《청일이 서로 다투는 이 기회에 우리의 독립권을 굳건히 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다그치려고 정부도 힘쓰고있다네. 군국기무처 말일세.》
《저도 오던 길에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을 보았습니다.》
병무가 최도고의 말을 받았다.
《그래 어떻던가?》
《무언가 새것이 싹트고 자라나고있다는, 정말 눈물겨운 기쁨이라 할가, 가슴이 후련함을 느꼈습니다.》
《그랬을테지. 허지만 상기도 대감이요, 령감이요 하는 웃두리 량반들이 김홍집과 같은 혁신관료들의 의도를 리해하지 못하고있으니 탈일세. 썩어빠진 량반놈들…》
중인도 못되는 상놈으로 불리우는 평민출신으로 더우기 장사군이라고 량반들과 벼슬아치들의 전횡과 구박, 천시를 많이 받은 최일은 도고로 불리우는 이마즘에 와서는 일종의 복수심리로 그들을 눈아래로 굽어보군 하였다.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예적과는 달리 개화되여가는 요즘세월에는 량반이나 벼슬보다 재물이나 부자들이 더 존대받는다는것을 최일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최일이도 읽어본 개화파의 선구자인 박규수의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이 쓴 소설 《량반전》에도 상놈인 권부자가 돈을 주고 량반신분을 사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지로 매관매직이 상품매매처럼 되여있는판이여서 군수급은 1천~2천량, 부사급은 2천~5천, 감사는 2만~5만량이면 얼마든지 살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니 부자인 최도고는 도감사쯤은 이미전에 할수 있었다. 그러나 연암이 소설 《량반전》에서 량반은 도적이라고 했듯이 개화문명한 최일은 애잔한 백성들을 학대하고 착취하여 제 배를 불릴줄밖에 모르는 량반벼슬아치들을 질시, 멸시하였다. 하기에 그는 그 어떤 고관대작이나 명문거족도 왼눈으로 보았다. 그가 스승처럼 존대하는것은 오직 역관 홍학규뿐이였다.
무반의 집안에서 태여나긴 했어도 가난하여 량반부자들의 천시를 받는 병무도 최도고의 이런 대범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집으로 오던 길에 늘 들리군 하던 점방에 들린 병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옷감으로 비단천을 한감씩 샀다.
비싼 물건이 팔리는것이 기쁜 모양, 낯익은 점방주인은 너스레를 떨었다.
《도련님은 부자에 효자십니다그려.》
그는 옷감을 자로 재고 자르면서 연송 주절거렸다.
《바깥늙은이 옷감으론 이 흰색일광단이 좋고 안늙은인 이 호박색월광단이 좋지요.》
점방주인은 옷감을 참지에 싸서 병무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두 량주가 입이 함박만 해질거외다.》
아닌게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온데다 귀한 비단옷감까지 척 사들고 나타나니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아정이를 찾아가려고 집을 나서는 병무를 어머니 공씨가 대문밖까지 바래주며 당부했다.
《일찍 들어오너라. 참, 홍역관댁부터 찾아뵙거라. 그 집 문안하님이 몇번이나 널 찾아왔댔는지 모른다.》
《알겠어요.》
엄병무는 정녕 즐거운 기분으로 문밖을 나섰다.
그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름철의 날씨는 참으로 기분이 쾌청하도록 좋았다. 가없는 창공, 두둥실 뜬 흰구름, 해빛은 찬란하고 대기는 청명하다.
그는 저도 몰래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박자에 맞추어 반달음치는 병무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