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군국기무처
6
대문을 열어준 아리잠직하게 생긴 이월네는 병무를 보자 울음부터 앞세웠다. 까맣고 긴 살눈섭에 눈물방울이 가득 매달렸다.
《도련님, 흑…》
병무는 의아쩍어 가냘픈 그 애의 량어깨를 꽉 잡았다.
《왜 그러느냐, 이월네야?》
그 말에는 대답없이 이월네는 병무를 안으로 인도했다.
《흑, 들어오시와요. 도련님.》
안방에 들어간 병무는 아정이 어머니 정씨앞에 단정히 앉았다. 어쩐지 집안분위기가 상가집같이 을스산했다.
한켠에 치우쳐앉은 이월네는 어깨를 들먹이는데 정씨가 손바닥으로 장판을 두드리며 넉두리를 하였다.
《어데 갔다 이제 오나, 이 사람아. 우리 아정이는 죽었네.》
《예, 죽다니요?!》
너무 놀라 병무는 움쭉 웃몸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이월네는 울음섞인 소리로 토설했다.
《저, 그런게 아니라 아정아씨는 궁녀로 뽑혀 대궐로 들어가셨사와요, 흑…》
《엉, 그게 무슨 소리냐?》
병무의 얼굴이 놀람과 락심으로 대번에 굳어져버렸다. 아정의 어머니 정씨가 또다시 손바닥으로 장판을 두드렸다.
《그러니 죽었다는 소리가 아니고 뭔가? 대궐속에 갇힌 귀신이 되고말았지. 아이구, 내 팔자야! …》
엄병무는 어떻게 아정의 집을 나섰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달렸다. 길가던 사람들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의 발길은 저도 모르는 사이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앞에 이르렀다. 얼굴에는 줄땀이 흐르고 어깨숨을 쉬였다.
크고 화려한 광화문은 굳게 닫겨있을뿐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었다.
저안에 갇혀있는 애중한 아정이가 영원히 자기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병무는 미칠것 같고 죽고싶었다. 섰다가 앉고 앉았다가 일어서며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몸부림치는 병무를 날창이 긴 무라다보총을 멘 왜놈군대보초들이 의혹에 싸여 지켜보았다.
병무는 무거운 광화문처마를 쳐다보며 마음속 괴로움을 터뜨렸다.
《아정이, 내가 왔소. 병무가 왔단 말이요. 이런 궁궐속에 들어가있으면 나는 어쩌란 말이요. 어쩌란 말이요, 아정이! …》
병무는 참지 못하고 광화문으로 달려가 아정이를 부르며 궁성문을 마구 두드렸다. 왜놈보초들이 달려와 그를 끌어냈으나 놈들을 물리친 병무는 다시 궁성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왜놈보초 한놈이 《칙쇼!》하며 병무의 머리를 총탁으로 내리쳤다. 정신이 아찔하여 머리를 감싸쥔 병무의 손가락짬으로 피가 즐벅하게 흘렀다. 그는 의식을 잃고 땅우에 픽 쓰러지고말았다. 얼마후 깨도를 하고 가까스로 땅을 짚고 일어선 그는 왜놈들을 증오에 찬 눈길로 쏘아보고나서 한발한발 걸음을 옮겼다.
고뇌에 싸인 병무는 허탈감에 잠겨 궁성밖을 맴돌건만 이끼돋은 고색창연한 성벽은 인간세상과는 무관하다는듯 무겁고 침울하기만 하였다.
아무리 군국기무처에서 남녀의 조혼을 엄금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개화한 시책들을 내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직도 한번 궁궐속에 들어가면 처녀로 늙어 죽을 때까지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어야 하고 또 저렇게 왜놈들의 군대가 우리 나라 궁성앞에 버티고 서있는 형편에서야…
한강가로 달려나온 병무는 타드는 가슴을 적시려고 모래불에 엎드려 강물을 꿀꺽꿀꺽 걸탐스럽게 들이키고 얼굴의 피를 씻었다. 허리를 편 그는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비창한 심경으로 목청껏 부르짖었다.
《아정이! ―》
어슬녘에 집으로 돌아오던 엄병무는 장대끝에 술등이 매달려 흔들거리는 술막안으로 들어갔다. 목로상앞에 앉은 그는 《한양쇠주》를 사발들이했다. 그의 앞에 앉아있던 늙수그레한 술군들이 걱정스러워 충고했다.
《젊은이, 너무 취하겠네.》
병무는 팔을 휘저으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상관하지 마오.》
캄캄한 밤중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갈 지(之)자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던 병무는 갑자기 퍼붓는 밤소나기를 맞았다. 장대같은 비발이 한대중으로 퍼붓고 번개가 번쩍거리고 천둥소리가 꽈르릉거렸다. 술기로 달아오른 몸을 차고 센 비발이 식혀주어 우뚝 버티고선 병무는 두손을 벌리고 얼굴로 흐르는 비물을 혀바닥을 내밀어 핥아먹었다. 삽시에 길바닥은 진창길이 되였고 도랑으로는 골개강같은 벌물이 콸콸 소리치며 흘렀다. 번쩍 하고 장검으로 어둠을 찢어발기는듯 한 번개불빛에 시퍼렇게 드러나는 태를 치는 버드나무며 초가마가리며 기와지붕들, 《꽈르릉.》하는 천둥소리가 천지간을 들부시는듯싶었다. 병무는 자기가 아비지옥에 서있는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래, 모든것을 들부시고 까버려라. 아정이가 없는 세상을 나 혼자 살아 무엇하랴. 비청거리며 다시 발길을 옮긴 병무는 진창에 미끄러지고 무엇에 걸채며 몇번씩이나 엎어지고 넘어졌다. 옷은 물론 손이며 어데선가 신발을 잃어버려 맨발이 된 발이며 얼굴은 온통 진흙이 게발려졌다. 집에 가까스로 당도한 그는 제 방에 들어서자 푹 꼬꾸라져버렸다.
어머니 공씨가 들어와보더니 놀란 소리를 했다.
《아이구, 억병으로 취했구나.》
공씨는 병무를 바로 눕히고 머리에 베개를 고여주었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흙투성이가 된 얼굴이며 손발을 씻어주고 진창에 덞은 바지저고리를 벗겨주었다.
사이문까지 닫아준 공씨가 아래방으로 내려오니 곰방대를 문 엄초관이 언짢게 중얼거렸다.
《저 애가 왜 점점 저 모양이요?》
《…》
공씨는 남편의 곁에 대답없이 앉았다.
《오래동안 밖으로 나돌아다니지 않나, 오늘은 먹지 않던 술까지 취해?!》
공씨는 그저 한숨만 내쉬였다.
《왜 저러오?》
남편의 거듭되는 추궁에 드디여 공씨가 입을 열었다.
《홍역관댁 따님이 궁녀로 뽑혀 대궐로 들어갔답니다!》
《그런데는?》
《원, 령감은 눈치두 없수다. 우리 병무가 그댁 따님과 좋아지내는줄 모루?》
《엉? !》
엄초관은 놀란 나머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공씨의 말은 그에게 금시초문이였던것이다.
《그러니 병무가 오죽 속이 상하겠소?》
《그런 일이 있었나.》
《아무튼 우리 병무같은 효자는 없수다. 늘그막에 비단옷을 다 입구…》
《…》
엄초관은 아무런 대척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