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군국기무처

7

 

도꾜 우에노공원에는 소동물사가 있는데 서너마리의 원숭이가 우리안에서 재롱을 부리고있었다.

원숭이의 재롱에 얼이 빠진 아이들이 과자며 락화생따위를 던져주고 한 젊은이는 피우던 가치담배를 던져주었는데 원숭이 한마리가 그 담배를 받아 제법 사람처럼 입에 물더니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후 내뿜는것이였다. 그것이 재미나 아이들이 와 웃어댔다.

하지만 이들속에 끼여있는 갑신망명객 박영효와 서광범은 원숭이에게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듯 그저 우두커니 바라보고있을뿐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를 뒤에 두고 가까이에 있는 돌의자에 앉았다. 얼굴이 넓둥그런 박영효는 일본하오리에 우가 납작한 중절모를 썼고 방금 미국에서 돌아온 서광범은 얼굴이 길숨한데 흰 양복에 푸른색넥타이를 맸고 몸에서는 서양향수냄새까지 풍겼다.

서광범이 박영효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본사람들을 잰내비족속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원숭이를 좋아하는구만. 그건 그렇고 박공, 박공을 위로할가 해서 우정 동물원에 왔는데 왜 그리 침울하오?》

박영효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신풍스럽게 대꾸했다.

《원숭이가 부러워서 그러오.》

서광범은 그를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저것 보오. 원숭이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즐기지 않소. 한데 나는…》

《허허, 지나친 신경과민이요. 박공도 원숭이처럼 생각하면 되지 않나 말이요. 저 원숭이의 산지는 아마도 동남아일테지만 지금은 여기 일본을 제고장처럼 여기고있거던. 사람도 마찬가지요. 키케로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오. 〈조국이란 어데든 자기가 잘 지낼수 있는 곳이다.〉라고 했소.》

서광범의 말에 박영효는 웃었다.

《서공은 10년간 미국에서 류학을 하더니 꽤 유식해졌군그래.》

《내 유식을 말하자는게 아니요. 박공의 기분을 전환시키자고 그러는거지. 울적해하지 마오. 세네카는 말하기를 〈나는 이 우주의 어느한 고장을 위하여 태여난것이 아니다. 전세계가 나의 조국이다.〉 그러니 내가 살던 미국도 여기 일본도 다 우리의 조국이지 조국이 별게요. 내가 살던 미국에는 각 대륙, 각 나라에서 모여온 백인, 황인, 홍인, 흑인 등 십인십색으로 각 인종이 다 모여살지만 그들은 모두 미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있단 말이요.》

《서공의 말은 지내 역설적이구만. 그래도 조국이야 조국이지 어떻게 전세계가 조국이 될수 있겠소?》

박영효가 이렇게 말하자 서광범이도 한숨을 내쉬였다.

《하긴 나도 고국이 그립소. 그래서 혹시 고국에 갈수 없을가 해서 고국이 가까운 여기 일본으로 다시 오지 않았소.》

《하지만 대역부도죄인인 우리에게 고국이란 그림속의 떡이지.》

서광범이 긴장한 태도로 물었다.

《김옥균이 암살당한것이 몇달전이라지요?》

《그렇소. 내 몸에도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있소.》

박영효는 얼마전 밤에 있은 일을 이야기했다. 칠칠야밤에 박영효가 몸을 움츠리고 걸어가고있는데 그의 뒤로 2명의 자객이 뒤따르고있었다.

무엇인가 인기척을 느끼고 박영효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되알진 총성이 울렸다. 박영효는 급히 허리를 숙이고 내뛰였다. 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영효는 황급히 옆골목으로 꺾어들어 들고 뛰였다.

박영효의 말을 들은 서광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갑신정변객에 대한 민중전의 증오심은 여전하군.》

《왜 그러지 않겠소. 우리가 그의 측근들을 다 죽여버렸으니까.》

서광범이 기분이 나쁜 모양 머리를 털고나서 돌의자에서 일어났다.

《박공, 우리 가마보꼬술집으로나 갑시다.》

《그게 좋겠소.》

박영효도 따라 일어섰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어스크레한 구석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식탁우에는 가마보꼬(고기떡안주) 한접시와 사기술병 그리고 알잔이 놓여있었다.

《오늘을 옛말할 날이 있겠지.》

박영효가 서글픈 기색으로 말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하지 않소.》

《자, 그 볕들 날을 위해 들기요.》

서광범의 말을 받으며 박영효는 그의 알잔에 마사무네(일본술)를 부었다.

서광범은 잔을 비우고나서 입맛을 다시였다.

《미국에선 위스키나 진술, 브란디, 꼬냐크만 마셨지만 일본술맛도 괜찮군요.》

이때 출입문이 열리며 낯선 사나이 두명이 나타나더니 곧추 박영효네의 식탁으로 다가왔다. 한자는 중절모를 쓰고 다른 한자는 캡을 썼는데 외형으로 보아선 외교관같기도 하고 탐정같기도 했다.

박영효는 벌써 속이 떨려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는 손에서 술잔을 떨구었다.

식탁으로 다가온 캡을 쓴자가 은근스럽게 말했다.

《보꾸(박)상이 여기 있는걸 공연히…》

중절모를 쓴자는 명령조로 말했다.

《보꾸상, 일어나시오.》

겁에 질린 박영효가 떠뜸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중절모를 쓴 사나이가 랭소를 띄웠다.

《왕년의 금릉위대감이 가마보꼬 한접시를 두고 앉아서야 되겠소? 자, 따라오시오.》

그러자 서광범이가 자기에겐 미국시민권이 있다는 자부를 느끼며 그들에게 엇섰다.

《여보시오, 우리 박공을 어데로 데려가자는거요?》

캡을 쓴 사나이가 그러는 서광범의 어깨를 눌러 의자에 도로 주저앉히였다.

《당신은 상관말어!》

두 일본사나이에게 끌려가는 박영효를 서광범은 불안스럽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박영효가 끌려간 곳은 뜻밖에도 외무대신 무쯔 무네미쯔의 저택이였다.

검은 하오리차림으로 현관에서 박영효를 반갑게 맞이한 무쯔는 그를 곧장 술상이 차려져있는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박영효는 지옥에서 별안간 극락세계로 천도된듯 한 환각에 사로잡혀 어리둥절해서 무쯔의 말이나 그의 안내에 그저 머리만 굽석거렸다.

박영효가 푸짐하게 차린 술상앞에 앉자 무쯔가 너그럽게 권하였다.

《제집처럼 생각하고 마음껏 들게. 변변치는 못해도 가마보꼬집보다야 낫겠지, 허허…》

박영효는 감격하여 대뜸 눈굽이 뜨끔했다.

술잔을 비운 박영효에게 무쯔는 도미회를 권하였다. 박영효는 굽신거리며 도미회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어떤가?》

《하, 천하일미입니다.》

《천하일미라, 하하하. 그게 바로 당신네 제주도의 도미요.》

《예, 제주도요?》

《이제는 조선 제주도의 도미도 여기 도꾜의 식탁에 오르게 되였단 말이요. 앞으로는 조선의 모든 특산물이 다 이 식탁에 오르게 될거요.》

박영효는 말없이 먹기만 했다. 무쯔와 같은 일본정계의 거물이 도미맛이나 보라고 자기를 저택에까지 초청하진 않았을텐데 하는 송구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한 생각이 심중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후 무쯔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박군, 내 말을 명심해 들으라구.》

《…》

긴장된 박영효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무쯔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당신은 곧 귀국해야겠소.》

무쯔의 말은 망치로 못을 박는듯 했다. 박영효는 갑자기 가슴속으로 엄습하는 실망과 절망감으로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는 한가닥 구원의 손길을 바라며 공연한 소리를 했다.

《저, 서울로 말입니까?》

《이역살이 10년에 고국이 얼마나 그립겠나?》

그러나 고국은 박영효에게 있어서 그리운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였다. 갑자기 사무러운 민비의 표정이 눈앞에 떠오른 영효는 전률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하, 가는 길로 저는 사쯔마에 가는 파발군이 되고만다는거야 각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박영효를 우묵한 눈확속의 날카로운 눈길로 쏘아보며 무쯔는 불쾌한듯이 그러나 목소리를 눅잦혀 혼자소리처럼 말하였다.

《조선에 가면 사쯔마에 가는 파발군처럼 죽고만다는 말이지.》

무쯔는 음식상너머로 팔을 뻗쳐 박영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걱정은 말게. 이 무쯔가 담보해. 아니, 오또리공사가 당신 머리칼 한오리 다치지 못하게 해줘!》

오늘 아침 침상에 누워있는 무쯔를 찾아온 외무차관 하야시는 오또리공사한테서 조선의 친일세력이 약하기에 박영효와 같은 거물을 보내달라는 전신이 왔다고 전하였다.

10년씩이나 일본물을 먹인 박영효를 이젠 써먹을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 무쯔는 침상에서 털고일어나 이렇게 그와 마주앉을 결심을 하였던것이다.

얼마전 밤길에 자기를 저격하던 자객들의 모습이 떠오른 박영효는 불안스러운 긴장으로 굳어졌다.

《대신각하, 저를 죽음의 길로 보내자고 이 자리를? …》

무쯔는 박영효를 밉살스럽게 쏘아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 10년전 갑신정변을 일으키던 때의 그 의기는 다 어데로 갔는가! 아직도 야마도다마시이를 다 배우지 못했는가. 칼끝이 목에 닿아도 의기는 버리지 말아야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영효는 그 어떤 기대와 결의로 낯색이 굳어졌다. 무쯔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 조선왕궁은 우리 일본군대에게 점령되여있고 국왕과 민비는 감금상태에 있단 말이요. 대원군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긴 했지만 사실상 조선정부는 존재하지 않는것이나 다름없단 말이요. 그래서 당신이, 철종왕의 사위인 금릉위가 서울에 돌아가 주인노릇을 하라는것인데 우리의 뜻은 모르고 계속 우는소리만 하겠는가!》

그제야 무쯔가 자기를 초청한 까닭을 알아차린 박영효는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감격과 감동으로 눈굽에 눈물이 핑 돌더니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러는 박영효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무쯔는 힘주어 말하였다.

《지금 조선에서 친일세력이 몰리고있소. 게다가 배일적인 민비는 청나라나 로씨야와 손을 잡으려고 암약하고있단 말이요. 이런 때 우리 일본에 충직한 보꾸상이 가마보꼬집이나 다녀야 하겠는가.》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미 대역부도죄명이…》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요.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것이 법이거던. 어제날의 죄인이 오늘은 영웅이 될수도 있단 말이요.》

《예. …》

《귀국하시오. 귀국하여 동아의 번영을 위해 일선에 선 용사가 되시오. 나는 당신이 장차 조선정부의 수반이 되리라고 믿소.》

감읍하는 박영효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글썽거렸다.

《각하, 고맙습니다. 저의 목숨을 구원해주고 지금토록 보살펴준 대일본제국을 위해 제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박영효는 이미 몸도 마음도 완전히 썩은 친일파, 매국노였다.

무쯔는 흡족했다.

《이제야 박영효다웁군.》

 

인천바다가의 모래불에 앉아있던 박영효는 문득 담배생각이 나서 주머니에서 일본담배를 한가치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한숨처럼 길게 토해버린 그는 해기우는 수평선에 서글픈 눈길을 주었다. 동해의 일출, 서해의 일몰이 장관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지는해란 그의 마음처럼 처량하고 애달프기마련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천천히 모래불을 거닐었다. 스러져가는 락조, 단조로운 파도소리, 바다가모래불에는 그의 무거운 마음처럼 발자욱이 깊숙이 새겨지군 한다.

(고국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맞아주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구나. 고독함은 일본이나 고국이나 다를바가 없지 않는가. 어떻게 할것인가. 오또리공사를 찾아 서울로 가기는 시기상조다. 아무튼 당분간은 여기 일본인거류지에 은신해있는것이 상책이다. 차차 앞길이 열리겠지.)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숙이고 걷고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자기를 찾는 소리가 울렸다.

《보꾸상!》

박영효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하, 놀라지 마시오. 나 오까모도요.》

여느때 달리 양복차림을 한 오까모도 류노스께가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니, 오까모도상이?)

박영효의 인상에 의하면 오까모도란 인물은 반갑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아리숭한 존재여서 이때도 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오까모도는 부두에서 마중할가 하다가 사람들의 눈길도 있고 해서 여기에서 마중한다고 말하였다.

《그럼 당신은 내가 오는걸 알고있었단 말이요?》

박영효의 말에 오까모도는 가소로와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지워버렸다. 그는 이미 무쯔로부터 귀국한 박영효의 안전을 담보하며 그를 조선정부의 요직에 박아넣으라는 전보를 받았던것이다.

오까모도는 박영효의 안전을 담보할테니 일본인거류지로 가자고 이끌었다.

박영효는 오까모도의 뒤를 따라걸었다. 그가 오까모도를 알게 된것은 일본의 도꾜에서였다. 금년초에 도꾜에서 그를 만난 오까모도는 갑신정변에 대하여 그리고 김옥균에 대해 여러가지로 물었는데 그때는 어딘가 기자같기도 하고 또 학자같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 조선의 인천에서 그를 또다시 만나니 도대체 그의 정체를 알수 없었다.

하지만 절간에 간 아낙네 중이 하란대로 한다고 일본사람들의 강요로 귀국하게 되고 또 자기의 안전을 지켜주고 숙박소로 안내해주겠다고 나선 일본사람인 오까모도의 말을 듣지 않을수 없는 박영효였다.

조선글, 한문, 일본문자로 씌여진 잡다한 점포, 식당, 려관간판들이 나붙어있는 인천의 일본인거류지를 말없이 걸어가던 오까모도가 문득 《후지려인숙》이란 간판이 걸려있는 일본식의 단층목조가옥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박영효에게 따라 들어오라고 고개짓을 한 오까모도는 먼저 현관안으로 들어갔다. 박영효는 그가 시킨대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꾜에서 오까모도를 만났을 때는 아주 상냥하고 례절스러운 신사다운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는데 오늘 여기 인천에서 그의 행동은 말이 없고 거만스럽고 지어 위협기조차 느껴지는 엄한 인물이였다.

주인 후지가 얼른 현관으로 달려나와 오까모도와 박영효를 맞이했다.

박영효는 몸집이 가량가량한 후지가 연송 허리를 굽석이며 오까모도를 공경스럽게 대하는것을 보고 이 오까모도란 인간이 조선의 일본거류민들속에서 꽤 지체높은 인물이란것을 알수 있었다.

오까모도는 박영효를 데리고 려인숙의 귀빈실에 들어갔다. 누비돗자리 여섯개 넓이의 크지 않은 방이였지만 아담하게 꾸려지고 비품들도 고급이였다.

《보꾸상, 이 방을 제집처럼 써도 됩니다.》

박영효는 얼른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고맙습니다, 오까모도상.》

《인사는 오또리공사에게 하시오.》 이렇게 무뚝뚝하게 말한 오까모도는 양복속주머니에서 편지봉투를 꺼내 박영효에게 주었다. 《오또리공사가 보내는 봉서입니다.》

《봉서?》

박영효가 의아한 눈길을 쳐들자 오까모도는 또 랭랭하게 말하였다.

《이 봉서의 지시대로 하시오. 나는 서울에 갔다가 며칠후에 다시 오겠소. 3일이내에 사죄문을 끝내도록 하시오. 그럼…》

오까모도는 약간 목례를 하고나서 문밖으로 나갔다. 박영효는 그의 등뒤에 대고 허리를 숙이는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아버린 박영효는 급히 봉투를 뜯고 속지를 꺼내들었다. 소학생들의 글씨처럼 한쪽으로 기울사 하고 개발 그리듯 한 편지를 그는 눈을 찌프리고 뜯어보았다.

《무사히 도착한것을 축하하오. 우리 공사관에서는 당신에 대한 기대가 크오. 당면하게는 국왕앞으로 사죄문을 절절하게 써서 서울로 올려보내고 장차로는 오까모도 류노스께의 방안에 따르도록 하시오. 본 즉시로 소각할것.》

박영효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종이에 불을 붙여 재털이에 던졌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사죄하는 글을 써올린다 한들 과연 상감께서 용서하실가. 설사 상감은 용납하신다 해도 중전은 결코 나를 가만두지 않을것이다. 몇달전에도 나에게 자객을 파견한 민비가 아닌가. 이거 정말 호박 쓰고 돼지굴에 들어온것만 같다. 이제라도 일본으로 되돌아가는것이 옳지 않을가. 그러면 무쯔가 또 용서하지 않겠지. 아, 이도저도 할수 없는 가긍한 처지로구나.

하지만 어쨌든 오또리가 시킨대로 사죄문을 쓰지 않을수 없는 처지여서 박영효는 책상앞에 앉았다. 더우기 오까모도는 3일이내에 써야 한다고 오금을 박았던것이다.

이마를 머리띠로 동이고 글을 쓰는 박영효는 그야말로 필사적이였다. 앉은책상옆에는 찢어버린 종이가 수북했다. 머리띠를 풀어던지고 두팔을 뒤로 뻗쳐 몸을 고인 박영효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나갔다. 자기가 지금 쓰고있는 사죄문이 그대로 자신에 대한 판결문으로 되지 않을가 하는 걱정이 붓을 집어던지게 했던것이다.

그는 써놓은 사죄문을 소리내여 읽어보았다.

《…죽을 죄를 지은 신 박영효는 원통하고 절박한 사유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신은 대대로 록을 타먹는 가문의 후손으로서 신의 부자형제대에 이르러서는 특별한 총애를 받아 모두 영광을 누리게 되였는데 신의 부자는 특별한 은덕에 감격하였으나 보답할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손으로 이마를 고이고 생각에 잠기던 박영효는 다시 머리띠로 이마를 질끈 동여매였다. 에라, 모르겠다, 사죄문을 잘 쓰고 못 쓰고에 내 운명이 달린것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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