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1 장

군국기무처

8

 

건청궁의 궁녀방에 앉아있는 아정은 수심에 잠겨있었다. 어느 하루 병무를 잊은적 없는 그는 지금도 그를 생각하고있었다. 그인 지금 어데서 무얼 하고계실가. 내 생각을 하고있을가. 참으로 애간장이 타는듯 한 애달픔으로 그는 속이 쓰리고 아렸다. 그리움이란 언제나 추억을 동반하는 법이다. 문득 언젠가 병무와 함께 점방에 들려 인형아기를 사던 생각이 난 그는 장농문을 열고 태머리를 길게 땋아드리고 색동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은 인형을 끄집어냈다. 인형을 보는 순간 새삼스럽게 병무의 사내다운 의젓하고도 정겨운 모습이 눈앞에 확 안겨와 아정은 눈굽이 젖어들었다.

아정의 눈길은 창문밖의 무궁화나무에 쏠렸다. 얼마전 왜놈군대들과 왜놈부랑배들이 왕궁을 습격할 때 꺾이우고 짓밟힌 무궁화가지들과 꽃잎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천하에 날강도 왜놈들!

그의 입에서는 며칠전부터 머리속에 무르익혀온 비장한 노래가락이 낮으나 힘있는 선률로 울려나왔다.

 

    고궁엔 짓밟힌 무궁화꽃잎

    밤하늘 기러기 길잃고 나네

    치욕의 피눈물 땅을 적시고

    원한의 곡성은 하늘에 닿네

 

    통분타 비애의 이 눈물로야

    수난의 상처를 씻을수 없네

    겨레여 원한을 기어이 풀자

    동서해 푸른 물 격랑을 친다

    …

 

이때 복도로 걸어오던 민비가 문이 열린 궁녀방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민비는 인형을 가지고 장난에 여념이 없는 아정을 웃음을 물고 바라보았다.

문득 아정이 머리우에서 지엄한 민비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얼 하고있느냐?》

고개를 쳐든 아정은 덴겁하여 부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민비가 웃음어린 어조로 다시 물었다.

《어린아처럼 인형을 가지고 장난하느냐?》

《…》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아정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민비가 여전히 웃음기어린 어조로 말했다.

《아정이는 아직 어린아로구나.》

아정은 고개를 숙인채 나지막한 소리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였다.

《중전마마, 지금 많은 세도대가집들에서 기모노를 입은 왜나라인형으로 방안을 장식하고있소옵니다. 왜인들은 그런것을 자꾸 우리 나라에 들여보내여 우리 사람들이 일본것과 친숙해지고 일본것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하고있소옵니다. 하오나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형보다 색동옷을 입은 우리의 인형이 얼마나 더 곱습니까? 배달의 얼은 이렇게 자그마한 인형에서도 제 존재를 뚜렷이 나타내고있소옵니다.》

민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아정의 얼굴을 이윽히 쳐다보며 나직이 뇌였다.

《네 뜻을 알겠구나.》

이렇게 말한 민비는 좀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복도로 걸어오며 듣자니 네가 무슨 노래를 부르던데 그게 무슨 창가냐?》

아정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별것이 아니옵니다. 쇤네가 심심풀이로 지어부른것이옵니다.》

민비가 아정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넌 참말 슬기가 구슬굴듯 하는구나. 네가 남아로 태여나지 못한것이 한이로구나. 어디 그 창가 다시한번 불러봐라.》

《저…》

《어서!》

아정은 부끄러움을 강잉히 누르고 용기를 내여 노래를 다시 불렀다.

노래를 듣는 민비의 얼굴은 비분강개로 붉게 타오르고 숨결도 거칠었다. 노래가 끝났으나 한동안 그린듯이 서있던 민비는 혼자소리로 그러나 사무치는 어조로 말했다.

《이 원한을 기어이 풀어야지.》

민비는 아정의 방 한쪽벽에 걸려있는 세계지도를 한동안 흥미있게 쳐다보았다.

《네 방의 지도가 크고 시원해서 보기가 좋구나.》

이렇게 말한 민비는 좀 사이를 두었다가 문득 착하고 연약한 토끼가 주변의 맹수들에게 잡혀먹히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아정은 사뭇 당황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볼샘이 귀엽게 패웠다.

《쇤네가 무얼 압니까?》

《그래도 넌 공부한 녀자가 아니냐? 어디 네 생각을 좀 말해보아라.》

아정이 조심스럽게 아뢰였다.

《힘이 약하니 꾀를 써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호호, 네 생각이 그럴듯하다. 하다면 어떤 꾀를 써야 할가?》

《맹수들끼리 서로 싸움을 붙여야 하옵니다.》

민비가 유쾌하게 웃었다.

《호호…》

문득 웃음을 가무린 민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바로 그것이다. 이이제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막는 외교장정, 이것만이 우리 나라를 어느 한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할수 있는 길이다. 나는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500년의 아니,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우리 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할수 있을가 하는 오직 그 생각뿐이다.》

아정은 차츰 경의의 눈으로 민비를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시름에 겨운, 안타까움에 젖은 민비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지금 나라의 형편은 참으로 풍전등화요 루란지세다. 저 악어같은 왜인들이 이제는 우리 나라의 궁성까지 총칼로 가로타고앉아 주인행세를 하니 나라가 이게 무슨 꼴이니, 아! ―》

장탄식을 하는 민비의 고운 눈매에 비분의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아정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민비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중전마마! ―》

민비가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으며 아정이를 달랬다.

《왜 우느냐?》

《마마, 쇤네를 죽여주옵소서. 흑…》

《그쳐라, 방정스럽다.》

그러나 흥분한 아정은 자기의 속심을 다 토설했다.

《쇤네는 지금껏 마마를 너무도 몰랐소옵니다. 쇤네는 마마가 왜놈들에게 문을 열어주어 나라가 이 꼴이 되였다고 생각하였삽고 나라의 문명개화를 위해 그토록 애를 쓴 김옥균선생을 죽인것에 대해서도 원망하였소옵니다.》

《무어라?!》 별안간 민비의 눈살이 꼿꼿해졌다.

《너도 개화당이냐?》

《쇤네는 개화당이 아니오나 나라의 문명개화는 바라옵니다.》

《음.》

민비가 애써 격분을 눅잦히는것이 알렸다.

흥분하고 격동된 아정이가 말을 계속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여있었다.

《그런데 대궐에 들어와 중전마마를 몸가까이 모시면서야 마마께서 어떤분이신지 알게 되였소옵니다. 마마, 이제는 할말도 다 하였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처분대로 하여주옵시오.》

《너무도 당돌하고 무엄하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민비의 얼굴에는 착잡한 표정이 어리고 한숨을 내쉬였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아정이에게 부드럽게 일렀다.

《그게 어찌 너 혼자의 생각뿐이겠니. 항간에서 다 너처럼 생각하는줄 나도 안다. 하지만 옥석은 갈라지기마련이다.》

아정은 더 크게 흐느껴울었다. 그의 어깨가 세차게 물결쳤다.

《그쳐라.》

아정이를 타이르는 민비의 목소리도 젖어있었다.

《마마, 소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마를 충정으로 모시겠나이다.》

민비가 소매속에서 눈처럼 흰 손수건을 꺼내 눈물 흐르는 아정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이윽고 아정이가 진정되자 민비는 다정하게 요즘 무슨 새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다. 방안에 갇혀있다싶이 되고보니 세상사가 궁금스럽기만 하다는것이였다.

아정이가 자세를 바로가지더니 긴장한 어조로 일본에서 박영효가 귀국했다는 소문이 돈다고 아뢰였다.

《무어라?! …》

민비의 낯색이 돌연 표독스러워졌다.

《그런 말을 왜 이제야 하느냐?》

《소녀도 방금 귀동냥해들었소옵니다.》

민비가 엄한 기색으로 아정이에게 명하였다.

《당장 나가 궁내무대신더러 들라 해라.》

《알아뫼셨소옵니다.》

아정이가 조심스럽게 물러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새로 궁내무대신으로 발탁된 대원군의 맏아들 리재면이가 헐레벌떡 들어와 민비앞에 부복하여 아뢰였다.

《중전마마께옵서 궁녀방에 계실줄은 모르고 소인 이제껏 마마를 찾아 헤맸소이다. 마마께옵서…》

민비가 리재면의 말을 중둥무이시키며 날카롭게 물었다.

《박영효가 귀국했다는데 적실하오?》

《그렇소이다, 마마. 지금 인천 일본인거류지에 있다 하옵니다.》

《박영효, 그 역적놈이 제발로 죽을 길을 찾아오다니. 아무래도 모를 일이요.》

《일본사람들의 작간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그런 용단을…》

《일본사람들의 작간이라… 십분 그럴수 있지.》

민비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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