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1 장

군국기무처

9

 

고종이 곁에 앉아있는 민비에게 박영효의 사죄문을 넘겨주었다.

《곤전이 요구하던 박영효의 사죄문이요.》

상감마마께서 먼저 보시라고 민비가 겸손하게 사양하자 고종은 대충 읽어보았노라고 시답지 않게 대척했다.

《그래 어떻소이까?》

민비의 물음에 고종은 사죄문을 쓴외보듯 한번 흘겨보고나서 결기있게 말했다.

《어쩌구 저쩌구 할게 있소. 문무백관이 모두 국법대로 처형해야 한다는데.》

일본공사 오또리는 박영효의 사죄문을 중추원에 제출함과 동시에 서기관 스기무라를 군국기무처 총재관인 김홍집에게, 오까모도 류노스께를 집정관인 대원군의 처소 운현궁에 파견하여 박영효에 대한 사면조치를 취할것을 요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 작전은 다 실패하고말았다. 대원군도 김홍집이도 박영효는 중대국사범이기때문에 절대로 용서할수 없는 인물이라고 거절리유를 말하였지만 실은 그가 일본의 선을 타고 귀국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의혹과 경계심으로부터 그런 태도를 취했던것이다.

《대원위께선 〈박영효, 그 자식 일본물을 10년씩이나 먹었으면 일본사람 다 되였겠는데 그냥 눌러살게지 무엇때문에 귀국해!〉하고 오까모도에게 쏘아붙였다지 않소, 허허…》

고종의 말을 들으며 민비는 박영효의 사죄문에 눈길을 주었다.

《…신의 이번의 귀국은 상감마마께 변하지 않는 저의 충정을 하소하고 용서를 빌고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저의 죄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가족의 유골을 매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두가지 소원이 성취되면 설사 극형을 받게 된들 원이 없겠습니다.》

민비는 사죄문을 마저 읽지 않고 눈길을 돌려버리였다. 그는 눈을 쪼프리고 입술을 옥물었다. 그의 눈앞에 갑신정변당시의 광경이 펼쳐졌던것이다. 민태호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민씨일족이 박영효를 비롯한 정변자들에게 참혹하게 처형되였던가. 민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민비의 기색을 살피던 고종이 물었다.

《어째 말이 없소, 곤전?》

《갑신년의 그날이 너무도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러하옵니다.》

고종이 울컥 화를 내듯 말했다.

《그래서 과인은 절대 용서하지 못하겠소.》

뜻밖에도 민비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머리를 흔드는것이였다.

《상감마마, 용서해줍시다.》

고종이 펄쩍 뛰였다.

《용서하다니?! … 곤전이 제정신으로 하는 말씀이요?》

《상감마마, 대의를 위해 소의를 참아야 하옵니다.》

《도대체 그 대의란 무엇이요?》

민비는 문쪽을 응시하며 침착하고도 랭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분간 우리 궁정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들여보낸 박영효만큼 리용가치가 큰 인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10년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사람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갑신정변은 이제는 옛적의 일이고 박영효는 이국을 헤매면서 고생을 했을것입니다. 그는 일본의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기때문에 용서하시면 리용가치가 클것입니다. 물론 그의 뒤에 일본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그는 여기서 고립무원하며 그의 세력은 미약합니다. 그는 결코 우리와 엇서는것과 같은 머저리노릇은 하지 않을것입니다. 만약 그가 친일파로서 우리를 반대하여 책동한다면 그때에 가서 처리해도 늦지는 않을것입니다. 그는 원래 처형될 인간이니깐요.》

깊이 생각한 민비의 론리정연한 말에 고종은 무언중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랭정한 표정으로 민비는 말을 이었다.

《신첩에게 생각되는바 있사오니 그의 죄명을 특별히 지워버려 전하의 관후한 뜻을 보여줍시다. 아무튼 박영효에 대한 뒤일은 신첩에게 맡겨주십시오.》

《정 그러하다면…》

언제나처럼 총명하고 사려깊은 민비의 말을 이번에도 고종은 결국 따르게 되였다.

박영효에 대한 민비의 태도는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은 물론 일본공사 오또리 게이스께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는 스기무라와 오까모도를 김홍집이와 대원군에게 파견하면서 그들은 혹시 응할지 몰라도 민비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것이라는 오까모도의 말에 《민비가 문제란 말이지, 민비가…》하고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단호하게 언명했다. 《민비는 무시하자구. 그 녀자는 이미 정계에서 은퇴시켰으니까. 그가 끝까지 반대하라지. 그래두 우리는 해내야 해.》

그렇게 우려했던 민비가, 그래서 무시해버리자고 했던 민비가 도리여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박영효를 두둔해나서지 않는가.

오또리는 미친놈처럼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기만 하였다.

《모를 녀자야, 정말 모를 녀자야! 아니, 녀걸이야. 참말 녀걸이야. 아니, 무서운 녀자야, 정녕 무서운 녀자야!》

 

박영효는 후지려인숙의 자기 방에 얼빠진 놈처럼 멍청하니 앉아있었다.

앞에 놓인 재털이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려고 담배곽을 쥐였다가 빈 곽임을 알고는 구석으로 쥐여던졌다.

고종왕앞으로 사죄문을 써올려보낸지도 벌써 여러날이 되건만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어 그는 여간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았다. 일본사람들이 시킨대로 귀국도 하고 또 그들이 시킨대로 사죄문도 썼지만 그건 일본사람들의 생각이고 조정은 결코 자기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더우기 민비가 눈이 시퍼래서 앉아있는데 용서를 바란다는것이 어림이나 있는 일인가. 그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불같은 장탄식을 하며 두손으로 골을 싸쥐였다.

이때 기척도 없이 미닫이문이 덜컥 열렸다.

오까모도가 얼굴이 환해서 입을 벌렸다.

《보꾸상!》

《?! …》

오까모도가 기뻐하는 까닭을 알수 없는 박영효는 그저 그 자리에서 일어서기만 하였다.

《드디여 기다리고기다리던 보람이 있게 됐소.》

오까모도는 여전히 히죽이 웃더니 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에 들어서자 옷갓을 하고 허리에 실띠를 띤 조선사람이 정히 싼 꾸레미를 들고 뒤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박영효는 영문을 알수가 없어 오까모도와 낯선 사람을 번갈아보기만 하였다.

《서울에서, 조선 궁성에서 밀사가 왔소.》

《밀사라니요?》

아직도 무슨 일인지 까닭을 몰라 박영효는 의혹에 싸여있었다.

오까모도가 먼저 자리에 앉자 밀사도 박영효도 뒤따라 자리에 앉았다.

점잖게 생긴 밀사가 박영효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중전마마께서 박영효선생에게 이걸 전달하고 오라는 분부를 받잡고 왔습니다.》

《예, 중전께서요?!》

박영효는 너무 놀라 웃몸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그렇습니다.》

밀사가 박영효앞에 꾸레미를 놓아주었다.

《분명 중전께서 보내셨단 말씀이지요?》

박영효의 목소리는 걸그렁했다.

밀사는 웃음을 띠운 낯으로 박영효를 바라보며 롱조로 시까슬렀다.

《오래동안 일본에 가계시더니 우리 말이 귀에 선 모양이외다.》

《아, 실은 너무도 뜻밖이여서…》

《자, 어서 풀어보십시오. 중전께서 보내신 관복입니다.》

《관복?!》

박영효는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꾸레미를 풀었다. 화려한 관복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관복을 펼쳐보던 박영효는 그만 관복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중전마마! …》

관복, 그것은 자기를 용서할뿐아니라 장차 조정의 요직에 등용시키겠다는 무언의 암시임을 박영효는 알아차렸던것이다.

밀사도 흐뭇해서 말했다.

《입으신 모양을 보고오라는 중전마마의 분부십니다.》

《예예, 입어야지요, 입겠습니다.》

박영효는 팔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고나서 관복을 안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관모에 쌍학흉배를 수놓은 관복을 입은 당당한 정1품당상관차림의 박영효가 나타났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변한 자기의 처지가 저로서도 거북스러운지 그는 얼친 놈처럼 열적은 웃음을 띠우고있었다.

아래입술을 쑥 내민 오까모도가 기뻐하는것인지 비웃는것인지 아리숭한 표정으로 박영효의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비양스러운 소리를 했다.

《보꾸상, 조선관복에야 버선을 신어야지 양말을 신으면 되오?》

그제야 자기 발을 굽어본 박영효가 얼른 주저앉더니 양말을 벗고 흰버선을 신기 시작했다.

밀사가 관복차림에 신는 목이 긴 검은 목화를 그의 앞에 밀어주었다.

이날로 박영효는 관복차림 그대로 서울에 있는 일본공사관에 나타났다.

오또리공사이하 공사관 관원들이 그를 보고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좋소, 아주 좋소. 박영효내무대신의 모습이 아주 훌륭하오.》

스기무라서기관이 오또리의 말을 얼른 받았다.

《내무대신만 되겠습니까, 각하?》

《하기야 때가 되면 총리도 될수 있지, 하하.》

그들의 말에 박영효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짓수굿하고있었다.

오또리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박영효상의 귀국작전은 완전히 성공적이요. 아주 훌륭하오. 자, 그럼 모두 연회장으로 갑시다.》

 

박영효가 관복차림새로 일본공사관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온 서울장안에 쫙 퍼졌다.

자기앞에 부복하고있는 궁내무대신 리재면에게 민비가 랭소를 띠우고 물었다.

《그러니 박영효가 내가 보낸 관복을 입고 일본공사관에 갔다는거요?》

리재면이 황송스럽게 대답했다.

《중전마마께서 하사하신 관복인데 의당 여기로 먼저 와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소옵니까?》

민비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요. 박영효는 제 갈바를 알고 바로 간것이요, 바로!》

《예, 무슨 말씀이온지?》

《그는 일본의 그림자란 말이요.》

이렇게 말하는 민비의 낯에 랭철한 빛이 흘렀다. 이 중전이 살아있는 한 그 그림자는 물론 일본족속들이 이 땅을 롱간하지 못할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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