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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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튿날 보금이는 어머니에게 마촌에서는 흉년도 들고 살기 어려워 집에 좀 다녀가자고 길을 떠났었다고 또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는 포대기를 쓰고 아래목에 내내 누워있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한숨을 쉬며 이 애가 쌀꾸러 떠났다고 하면서 어디 가서 좁쌀이나 피쌀말을 구해들일가 하고 끝없는 걱정을 이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찾아온데서 불길한 기미라도 눈치챈듯 어머니의 눈물과 푸념질에는 아랑곳없이 방문앞에 바위처럼 웅크리고앉아 담배만 태웠다.

마을사람들과 먼곳에 있는 친척들까지 어떻게 알고 감자알이나 쌀되박 같은것을 꿍져안고 병문안을 왔다. 보금이는 그들에게 겨우 인사를 하고는 도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손님들은 어서 몸을 추세우라고 이르기도 하고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며 혀를 차기도 하였다.

몸이 추선 보금이는 매일저녁 마을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듣게 되였다.

그 종소리가 울려올 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얼굴이 한결 밝아져 일손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보금이 어머니에게 저게 무슨 종소리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야학종소리라고 대답하였다.

《너를 구해준 전선생이 종을 치는게다. 참 별사람이지. 면장을 하는 사촌형이 읍소학교 선생자리에 붙여주겠다는것도 마다하고 여기서 야학선생을 하는구나.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애들을 다 걷어안구 공부를 시켜주느라구 별별 고생을 다하구 수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쩍하면 의심을 사서 경찰에 불리워가구 야학벽도 제손으로 바르구 난로에 땔나무도 제손으로 팬다. 훈도가 그런 궂은일에 손을 적시는 일이 어디 있니. 어떤 사람들은 부실한데가 있다고 뒤소리를 하지마는 에그, 실상은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어머니의 이야기와 자기가 마차를 타고오며 엿들은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전장원이라는 사람이 저 근거지에서 하는 일과 뜻을 같이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웬일인지 반갑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어머니, 저를 구해준 그 선생에게 무슨 인사를 차려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야학에 나무를 한발구 실어다주긴 했다만 내 아무게나 좀 꿍져줄게 너도 한번 찾아가봐라. 사람이 아무리 구차해도 인사법은 밝아야 하느니라.》

보금이는 전선생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수집고 어려워서 망설이기만 해왔는데 오늘 아침 순사들이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기겁하여 방바닥에 펄쩍 주저앉고 아버지는 뜨락에까지 따라나왔다가 순사의 독기를 품은 눈총에 그 자리에 얼어붙고말았다.…

보금이는 집에서 속을 태을 부모들이 걱정되여 걸음을 다그쳤다.

집마당에 들어선 그는 굴뚝이 터지게 연기가 피여오르는것을 보고 의아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정지문을 여니 뽀얗게 서린 뜬김속에서 어머니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에그, 살아왔구나!》

어머니는 딸을 안아옮기다싶이 구들에 끌어올려앉히고는 어깨며 잔등을 쓸어만져보았다.

《그래 저것들이 뭐라고 하더냐?》

《아무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그 지랄이냐? 친정에 다니러 온게 무슨 법에 걸리는 일이라구 저것들은 그저 사람을 못살게 굴지 못해 생지랄이라니까.》

《제가 근거지에서 나왔으니까 무슨 임무를 받고 나오지 않았는가 해서 그래요.》

《엉?… 그래 똑똑히 말해줬느냐?》

보금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저놈들이 저보구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며 근거지가 나쁘다는 연설을 하라고 하는데 시집마을을 욕하고 돌아가면 뭘로 되겠어요. 또 부르겠다 해요. 어디 숨을수도 없고…》

어머니는 피씩 웃으며 한손으로 딸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일없다. 걱정말아.…》 그러고는 그의 귀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아버지가 강형편을 보러 나갔다.》

그 말에 보금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예?…》

《그사이 쌀말이나 마련했으니 아버지는 너를 데리고 마촌 사돈집으로 들어가시겠단다. 새벽에 슬쩍 강을 건느면 된다. 저 령감이 산길에 귀신이 돼서 왜놈들 눈을 피해 얼마든지 갔다올수 있다. 걱정말아라. 시부모님앞에 어떻게 빈손으로 들어가겠니. 기장떡도 좀 만들고 간짐고등어도 댓손 구했다. 다 갖춰줄테니 훌 떠나거라. 아뿔싸, 저 가마를…》

들썩거리는 솥뚜껑밑에서 물거품이 넘쳐났다.

《불이 너무 과하구나!》

어머니는 얼른 돌아앉아 솥뚜껑을 비스듬히 열어놓고 부엌으로 내려가 아궁안에서 불이 활활 붙는 장작개비들을 꺼내여 뒤문으로 내던졌다. 뒤뜨락에서 피식피식 소리가 나며 흰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어머니는 가마목으로 다시 올라와서 떡가루함지에 물을 부으려고 바가지를 들었다.

보금이는 더 참을수 없어 와락 덮쳐들어 어머니의 두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 그만둬요!》

조씨는 딸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에그, 별 걱정두.… 쌀이 모자랄가봐 그러니?… 일없다!》

보금이는 흐느낌소리를 삼키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전… 전 못가요! 집으로 못가요, 아주 나왔어요.》

어머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듯 눈이 어리둥절해졌다. 그저 손에 들었던 바가지가 떡가루함지에 맥없이 떨어졌다. 떡가루가 함지밖으로 날리였다. 그닥지 않는 일에도 호들갑스럽게 굴고 푸념질이 잦아 령감에게 노상 꾸중을 듣는 조씨였건만 그 말을 듣자 앉음새를 방정하게 하고는 딸의 얼굴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쌀쌀하게 물었다.

보금이는 갑자기 가슴이 허물어지면서 스스로도 전후사연이 악몽속의 일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저때문에 축에 빠지게 됐어요.… 장가든 사람은 거기 군대에 안 받아서 앞길을 열어주자구 떠난게 이렇게 됐어요. 어머니!》

보금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머니의 무릎우에 엎어져서 흐느껴 울었다.

조씨는 손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에이구, 이 집에 이게 무슨 벼락이냐? 내 어쩐지 수상하다 했다! 남편이 잘되라구 생리별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동네에 뒤숭숭한 소문이 도는 판에 어느 귀신이문 그 소리를 믿겠니. 저쪽에서 정이 없었겠지.… 정이 없었겠지.… 이 못난것아!》

보금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몸부림쳤다.

《엄마, 그런게 아니야요! 그런게…》

《싹 그만둬라, 왜 죽지 않구 살아왔냐?… 에이구, 저 령감이 알면 어찌겠니?》

이때 밖에서 발자욱소리가 들이닥치고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울렸다.

조씨는 딸을 구석쪽으로 끌고가서 눕혀놓고 머리우에까지 포대기를 덮었다. 그리고는 화들화들 떨리는 손으로 어깨며 팔을 쓸어만졌다.

《가만 누워있거라, 에그… 가슴이야!》

어머니는 밖으로 뛰여나가 아버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이문으로 어머니가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아버지의 노성이 터져올랐다.

《무엇이 어째?》

사이문이 왈칵 열려졌다.

《여보!》

《저리 비켜!》

윤치석은 팔에 매달리는 로친을 뿌려던지고 정지간으로 내려와서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쪽의 보금이에게로 달려들어 포대기를 와락 열어제꼈다.

보금이는 기겁을 하여 일어나앉아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이년!》

그 소리에 룡마루가 즈르릉 울렸다.

《보자! 어디 상판이나 보자! 맘을 어떻게 쓰구 시부모를 어떻게 공대했으면 쫓겨나게 됐느냐? 내 오래 지내봐서 사돈님성품은 잘 안다. 에익, 고약한 년! 남편이 잘되라구 나왔다구? 친부모 속이구 기여들어 밥이나 축내자는 수작이냐? 이년!》

윤치석은 발을 탕 구르고 몸부림쳤다.

《어허, 세상이 부끄러워 어떻게 살라느냐? 동네사람들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라느냐?》

보금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웬일인지 세상일이 모두 꿈만해져 도무지 두려운것이란 없게 되였다.

그는 포대기를 차곡차곡 접어서 옆으로 밀어놓고 머리칼을 쓸어만져 바로잡은 다음 움쭉 일어나 정지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침착한 행동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연실색해졌다.

보금이는 정지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서는 은회색의 설핀 구름짬으로 여러갈래의 달빛이 희푸르스름하게 쏟아져내리고있었다.

그가 집모퉁이를 허둥지둥 돌아가는데 웬 남자의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다.

전장원이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보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놈들이 뭐라고… 뭐라고 했소? 나는 읍에 갔다오느라고… 방금전에야 들었소.》

《…》

《문초를 당했소?》

《선생님!…》

보금이는 설음이 북받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푹 숙이며 달려지나갔다.

그는 길아닌 길을 따라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면서 두만강가로 달려나가 쑥대들이 설피게 자란 강기슭에 오도카니 앉았다.

어디에선가 얼음판이 갈라터지는 소리가 쿵쿵… 쩡… 하고 하늘에 메아리쳐올랐다.

그는 강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강건너의 우중충한 산발들을 바라보았다. 눈에 덮여 희끗희끗한 그 산발들 저쪽에는 그가 두고온 생활이 숨쉬고있을것이다.

(아, 왜 죽지 못했던가? 왜 왔던가?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이 세상엔 내 맘을 알아줄이는 하나도 없어!)

아버지가 밥이나 축내자고 기여들었느냐고 하던 소리가 서러워 보금이는 그 자리에 엎어져 쑥대를 그러쥐며 가슴을 찢는듯 한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죽은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쑥대들이 바람에 휘-휘-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설렁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지 보금이는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욱소리를 듣고 머리를 쳐들었다.

목도리를 두른 중키의 녀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 녀자는 보금이를 안아일으켰다.

《가자요. 우리 집으로 들어가자요.》

전장원의 안해였다. 아마 남편의 말을 듣고 뒤쫓아 달려나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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