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2 장

3

 

이 시각 경복궁의 고종편전에서는 탁지아문대신 어윤중이 장계를 올리고 부복하고있었다. 고종의 곁보료우에는 민비가 동석하고있었다.

장계를 본 고종이 고개를 쳐들고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음… 우리 〈상평전〉이 일본으로 반출되여 바닥이 날 지경이라? …》

고종은 분노한 표정으로 어윤중이를 쏘아보았다.

《탁지대신!》

《예이.》

《어찌 이 지경이 되도록 속수무책이였소?》

어윤중은 일본상인들이 제 나라 상품을 팔아 우리 《상평통보》를 거두어들이기에 별수가 없다는 뜻으로 변명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왜인들이 《상평통보》를 극성스럽게 거두어들이는 까닭이 뭔가고 물었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있던 민비가 어윤중이대신 대답했다.

《아마도 왜인들이 우리 엽전을 없애고 저희 지화를 통용시키자고 그러할것이옵니다.》

이어 민비는 어윤중이에게 탁지에서 어떤 대책을 세우려 하는가고 물었다. 이에 대해 어윤중은 군국기무처에서 《신식화페발행장정》을 채택하려고 한다고 정중하게 답변했다. 좀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는 민비의 말에 어윤중이 다시 머리를 숙이고나서 입을 열었다.

은본위제를 기본으로 하는 신식화페는 최저단위를 푼으로 하고 10푼을 1전, 10전을 1냥으로, 1푼은 황동, 5푼은 적동, 2전 5푼은 백동, 1냥과 5냥은 은으로 각각 만들려고 하며 5냥은을 본위화페로 하고 그이하를 보조화페로 정하였다고 말하였다.

어윤중의 말에 고종과 민비는 긍정을 표시했다.

《그러니 금을 쓰지 않고 은을 쓴다? …》

이렇게 중얼거린것은 고종이였고 민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통화의 혼잡성을 없애고 근대적화페제도가 설듯 하오.》

어윤중이 떠나간 후 민비도 자기의 처소인 건청궁 옥호루로 돌아왔다. 때마침 민비를 기다리고있던 다까하시 부인 나쯔미가 기쁨에 겨워 절을 하였다.

민비도 반가운 기색으로 나쯔미를 자기의 편전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쯔미는 하녀들을 시켜 자기가 가져온 남방과일이 가득 담긴 커다란 대나무광주리를 민비앞에 가져다놓게 하였다.

나쯔미가 광주리에 담긴 남방과일들을 가리켜보이며 설명했다.

《이 파이내플 그리고 멜론과 망고는 일본에서도 제일 남쪽 열대지대인 류꾸렬도에서 생산되는것이옵니다.》

민비가 기쁨으로 눈빛이 빛났다.

《작년에도 가져다주어 맛을 봤어요. 참 달고 향기롭고 시원하더군요. 고마와요.》

《그저 성의뿐입니다. 전하께서 반갑게 받아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나쯔미의 얼굴에는 민비에 대한 숭모심과 존대의 표정이 가득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수심을 띄운 민비가 나쯔미에게 일본이 우리 나라의 엽전을 다 가져가기에 큰 야단이 났다고 괴롭게 말했다.

나쯔미의 낯색이 문득 긴장해졌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고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민비에게 여쭈었다.

《저, 왕비전하, 이런 말을 하는 저도 괴롭습니다만 우리 일본이 귀국의 모든 금을 다 긁어가려고 하고있습니다.》

민비의 표정도 긴장해지고 눈빛도 날카로와졌다.

《어떻게 말입니까?》

《글쎄, 자세한건 모르겠으나 오늘 우리 집에 온 오까모도상이랑 하는 말을 들으니 일본에 금이 딸리기때문에 조선의 금을 전부 가져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부?!》

민비의 낯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입술을 옥물고 문쪽을 이윽토록 응시했다.

참말 일본의 욕심은 너무하지 않은가, 우리 나라의 금을 전부 강탈해가면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국고가 텅텅 빌것이 아닌가, 일본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처럼 모질게 구는가, 어떻게 해야 일본의 이 가증스러운 침탈행위를 막을수 있단 말인가. 정녕 안타깝고 원망스럽고 분통이 터져 견딜수 없는 민비는 쓰리고 아린 가슴을 한참이나 문질렀다.

너무도 괴로와하는 민비를 쳐다볼수가 없어 나쯔미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윽고 얼굴을 쳐들고 민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굽에는 눈물이 그렁했다.

《전하! …》

가슴속의 괴로움을 묵새긴 민비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나쯔미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나쯔미가 진심을, 진정을 말한다는것을 느꼈다. 참으로 사람의 피는 맹물이 아니라고 하더니 한피줄을 타고난 겨레의 정애란 어쩔수 없는것이란 생각이 사무쳤다.

불현듯 나쯔미가 수심어린 기색으로 민비를 바라보며 무엇인가 말할듯말듯 바재이는것이였다.

《왜, 더 할 말이 있어요?》

민비도 나쯔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저…》

나쯔미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입벌리기를 주저했다.

원래 신경질이 심한 민비는 다른 사람이 이 정도로 애를 태우면 발칵 성을 냈을것이지만 나쯔미는 외국인이라 그럴수도 없었다.

《됐어요. 나쯔미부인, 후에 만나 또 이야기를 나눕시다.》

민비가 칼로 자르듯 시원스럽게 말하니 지금껏 입열기를 주저하며 바재이던 나쯔미가 도리여 더 달라붙는것이였다.

《전하, 제 말을 꼭 들으셔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자고 그래요?》

《전하, 제발 부탁입니다. 제 말을 듣고 정말 놀라지 마십시오.》

젠장, 무슨 녀자가 이래, 이렇게도 애를 태우고 간을 말리다니? 그런데…

《전하, 부디 신변을 조심하십시오.》

나쯔미가 불현듯 이런 말을 하며 미안하고 딱한듯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

《일본사람들이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있습니다.》

나쯔미의 얼굴에는 어느덧 주저하던 기색 같은것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할말을 하고야말겠다는 인간의 참모습이 얼굴을 빛내고있었다.

《…》

나쯔미의 너무도 뜻밖의 말을 들은 민비는 불시에 긴장되고 격동되였다.

민비가 제 말을 믿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던지 나쯔미는 그것을 인식, 납득시키느라 다급하게 열을 내며 말했다.

《전하, 제 말은 사실입니다. 일본거류민들이 〈사설공사〉라고 하는 오까모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말이 아니라 일본내각 이또총리가 이미전에 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왜놈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 무엇때문에? … 너무도 갑자기, 너무도 엄청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매양 그렇듯이 민비는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호호… 호호…》

몸을 흔들어대며 정녕 즐거운듯이 큰소리로 웃어대는 민비를 나쯔미는 겁기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하…》

웃음을 가무린 민비가 평소의 그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인들이 무슨 까닭으로 날 죽이겠다는겁니까?》

《일본에 계속 엇선다는것입니다.》

《엇선다?》 이렇게 되뇌인 민비의 눈에서는 다시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날강도같은 왜놈들이 우리 나라의것을 다 빼앗아가려고 날치는데 주인인 내가, 더우기 국모로 불리우는 내가 팔짱을 끼고있어야겠습니까?》

민비는 마치도 나쯔미가 이또총리이기나 한듯이 정색하여 정식으로 상대하였다.

《왜놈들이 이 땅에 기여든 후로 가뜩이나 궁핍한 우리 나라의 재정이 얼마나 더 궁핍해지고 가뜩이나 령락된 우리 백성들의 살림이 얼마나 더 피페해졌는지 나쯔미부인도 잘 알고있겠지요?》

나쯔미는 민비의 말이 진실이란것을 인정했다. 사실 자기 남편 다까하시도 백수건달로 조선에 건너와서 조선사람들의 피를 빨아 몇해사이에 큰 부자가 되지 않았는가.

격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민비가 연방 총을 쏘듯 입을 다물지 않았다.

《일본이 얼마나 파렴치한 날강도의 나라고 얼마나 쬐쬐하고 너절한 난쟁이나라인가를 어디 한번 들어보세요. 임오군란때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공사관을 제손으로 불질러놓고도 〈제물포조약〉에서 그 배상금으로 우리 나라에서 수만원을 빼앗았고 갑신정변때 다께소에공사도 제손으로 공사관을 불태우고 재건비로 만원을 받아냈을뿐만아니라 청국군대와의 싸움에서 죽은 저희 병사들의 배상금 11만원까지 우리 나라에서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몇해전에 함경도와 황해도에서 흉년이 들어 도백(도관찰사)들이 방곡령을 내렸는데 일본은 그 손해배상금으로 작년에 13만원을 우리 나라에서 빼앗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네 일본은 어떤가. 〈조일어로장정〉을 위반하고 제주도근해에서 계속 고기잡이를 했을뿐만아니라 심지어 조약을 란폭하게 위반하고 섬에 기여올라 무고한 우리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잡아놓은 어물을 모조리 략탈해갔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배상금을 요구하자 당신네 일본은 이에 응하고서도 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 배상금을 끝끝내 물지 않고있습니다. 아마 영원히 물지 않을것입니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는데 당신네 왜놈들은 천하에 뻔뻔스러운 불한당들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민비의 불같은 질책을 듣고있던 나쯔미는 갸웃이 고개를 들고 사정하듯, 부탁하듯 조심스럽게 나직이 뇌였다.

《전하, 아시지만 전 본시 조선사람입니다. 전 왜놈이 아닙니다.》

《미안해요. 제가 흥분하다보니 그만 잊었군요.》 나쯔미에게 이처럼 사과한 민비는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이런 날강도 왜놈들이 집주인이 자기 물건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막아나선다고 죽이겠단 말이지요? 죽이라지요. 난 두렵지 않습니다. 강도한테 집주인이 죽는것이야 례반사니깐요.》

《전하, 진정하십시오. 말이 그렇지 아무렴 한 나라의 왕비전하를 감히…》

《아무튼 고마와요, 나쯔미부인.》

이제는 떠나갈 심산으로 나쯔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하, 아시겠지만 제가 한 말을 부디 비밀로 지켜주십시오. 이제는 일본사람이 됐지만 저도 잔인한 일본인들이 두렵습니다. 그럼 옥체만강하십시오.》

나쯔미는 두손을 앞에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여 절하였다.

그의 곁으로 다가간 민비가 그의 두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정겹게 말했다.

《나쯔미부인을 영원히 잊지 않겠어요. 꼭 다시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나쯔미가 떠나간 후에도 민비는 괴로운 심경에서 벗어날길 없어 보료우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왜놈들이 우리 나라의 금까지 다 빼앗고 나까지 죽이려 한단 말이지?! … 리해되지도 않았고 리해할수도 없었다. 우리 나라가 저희들과 전쟁을 했는가, 도대체 무슨 죄로 한 독립국가의 국모인 왕비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아마 포악한 오까모도 그놈이 결김에 내뱉은 말이겠지. 잊자, 필요없는 일은 잊는것이 상수라고 했다. 모든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렇게 결심하니 속이 어지간히 진정되였다. 하지만 가슴속 한구석에는 나쯔미의 말이 납덩이처럼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이런 심경에 잠겨 심란한 기색으로 앉아있는데 불시에 나타난 진령군이 지금 한양에 함경도에서 령험있는 박수무당이 와있는데 그를 대궐에 불러들여 세자마마의 만년장수를 축수함이 어떠한가고 야살스럽게 물었다.

민비는 대척없이 한숨만 내쉬였다.

그제야 민비의 여느때 다른 기색에 눈치를 챈 진령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중전마마,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진령군은 남방과일이 담긴 광주리를 흘끔흘끔 건너다보며 물었다.

《왜인들이 우리 나라의 금까지 깡그리 빼앗아가려고 날뛴다누만.》

민비가 문쪽을 응시하며 수심에 싸여 중얼거렸다.

눈초리가 가늘어진 진령군이 다시금 광주리속의 남방과일을 바라보았다. 궁성에 자주 드나드는 일본녀인이 민비의 내간(내부의 간첩)노릇을 하고있는것이 아닐가. 그는 남방과일을 가리키며 은근스럽게 물어보았다.

《이 류꾸과일을 작년처럼 다까하시 부인이 진상했는가요?》

자기 생각에 옴해있던 민비는 그제야 정신이 든듯 진령군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참, 그 과일을 맛보게, 다까하시 부인이 가져왔다네, 참 좋은 녀인이야. 하긴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사람의 후손이라더군. 어서, 어서 들게. 좀 있으면 다 없어지고말텐데.》

《마마, 고맙소옵니다. 하오나 여기서야 어떻게.》

남방과일을 먹고싶어 군침을 삼키던 진령군은 기쁨에 겨워 눈이 반짝거렸는데 그 기쁨은 남방과일을 먹게 된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오까모도에게 고해바칠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데 더 큰 원인이 있었다.

그는 그럼 몇개 싸가지고 가라는 민비의 말에 소매속에서 넓다란 수건을 꺼내 멜론이며 망고며 파이내풀 여러개를 싸들고 편전에서 나와 한들거리며 복도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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