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2 장
금
6
(1)
보덕리앞산에서 금맥이 터졌다는 소문이 나돌던 몇해전부터 각곳에서 모여온 금전군들이 산을 야금야금 파먹기 시작하더니 조선인광주 최일이가 본격적으로 금광을 개발한 얼마전부터는 일군들이 구름처럼 쓸어들었고 그에 따라 보덕리에는 려인숙이며 주막, 음식점 같은것이 가득 들어앉아 마치도 읍장거리를 방불케 하였다.
보덕리주막집의 이영너머로 저녁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였다.
막걸리를 걸치고 나오는 사람들, 새로 들어서는 손님들로 주막집은 제법 흥성거렸다. 성녀의 아버지 리봉칠은 자기 마을에서 함께 온 두사람과 함께 주막집안으로 들어섰다. 아래쪽 목로상에 네댓명의 금전군들이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있었다. 새 손님들은 그들의 웃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맨 상투에 텁석부리가 부엌문가에 앉아있는 주인인듯 한 중년녀인에게 제꺽 한상 차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깨끗한 베바지저고리를 입은 소년이 들어와 상우를 걸레질하고 안주 두접시와 사발들을 놓더니 바가지를 띄운 뿌연 막걸리를 양푼채로 들여다가 목로상우에 놓았다.
텁석부리가 바가지로 뜬 막걸리를 봉칠의 사발에 부으며 권했다.
《자, 좌상이 먼저 드셔야지요.》
봉칠은 어색하게 웃었다.
《술은 로소동락이라는데 좌상이고 뭐고 있나. 자, 함께들 드세.》
머리에 쓴 베수건밑으로 희끗희끗한 귀밑머리가 보이는 봉칠은 첫눈에도 병색이 짙고 수척해보였다.
세사람은 사발들이를 하고 산나물을 무친 안주를 집어들었다.
텁석부리가 성녀의 아버지 봉칠을 건너다보며 걱정스럽게 뇌였다.
《그런데 앓던 몸으로 성녀 아버지가 금전판일을 꽤 견디여내겠소?》
봉칠은 고개를 숙이고 무겁게 뇌였다.
《어찌겠나, 내가 오륙을 놀릴수 있을 때 한푼이라두 벌어야 우리 성녀의 례장감, 하다못해 이불 한채라두 마련할게 아닌가. 몇푼 안되는 배삯전으론 어림두 없는거구.》
《걱정두 팔자외다. 아무렴 성녀를 데려갈 총각이 없을가봐 걱정이시우. 인물맵시 곱구 마음씨 착하구 일 잘하는 성녀같은 색시감이 어데 있다구.》
텁석부리가 이러며 또 사발의 막걸리를 들이켰다.
하지만 봉칠은 알리지도 않고 떠나온 딸, 성녀에 대한 걱정으로 목이 메는지 사발을 들지 못했다.
이때 아래목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금전군들중에서 베돌찌를 입은 힘꼴이나 쓰게 생긴 중로배가 봉칠이네쪽에 눈을 부라리며 데퉁스럽게 물었다.
《야, 뉘들은 어데서 온 놈들이냐?》
아래목 금전군들의 말을 통해 베돌찌를 입은 중로배가 덕대(금전판의 감독)로 불리우는 금전군들의 두목이라는것을 웃목의 사람들은 알고있었다.
그러자 웃목의 텁석부리도 눈살을 세우고 아래목의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거슬거슬하게 맞섰다.
《생면부지의 처지에 말투가 고약하다, 어데서 왔으면 어쩔테요?》
《우리가, 조선사람이 개발하는 금광을 왜놈들이 강짜로 빼앗았는데 왜놈들한테서 돈 몇푼 받아먹겠다고 예까지 와서 그래, 탁배기가 목으로 넘어가는가 말이다.》
아래목사람의 말에 예기가 질린 텁석부리가 봉칠이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왜놈들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개발허가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소?》
《글쎄다?!》
봉칠이도 고개를 기웃거렸다. 좀전에 총관리라고 하는 키 작달막한 뚱뚱보왜놈이 직산의 시부자와구미는 조선군국기무처의 개발허가를 받았다고 하면서 한달분의 간죠를 선불금으로 내주었던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주막집을 찾아온것이 아닌가.
《개발허가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개발허가야. 우리야말로 상감마마와 중전마마의 윤허를 당당히 받았단 말이야!》
금전군들의 덕대가 이러며 거쿨진 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데 왜 이 금광을 왜놈들한테 떼웠소?》
덕대의 말에 텁석부리가 의아쩍게 물었다.
《왜놈들이 어디 법을 아는 놈들인가. 남의 나라 궁성까지 총칼로 타고앉아 무기며 보물을 훔쳐가는 날강도같은 놈들이 금광 하나쯤 빼앗기야 예사내기지.》
덕대의 말에 봉칠이는 물론 텁석부리도 입을 벌리지 못했다. 왜놈들이 십분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어쩐지 더러운 판에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들면서 오강뚜껑으로 물을 떠마신것처럼 속이 께름했다. 그들은 탁배기를 마실 흥도 없어 훌 자리를 차고 일어나고말았다.
보덕리가 바라보이는 야산의 솔밭사이길로 성녀가 기진한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먼길을 걸어오느라 짚신이며 치마, 머리단장도 말이 아니였다. 소나무줄기에 잠시 기대였던 그는 그늘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제 나루배를 부리던 성녀는 한마을사람으로부터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는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성녀의 례장감이나 구할가 해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직산에서 왜놈들이 개발하는 금광에 금전군으로 일하기 위해 떠났다는것이였다. 딸에게 이런 소리를 토설하면 그가 극력 말리겠기에 말도 없이 떠났다지 않는가.
(아버지가 앓는 몸으로 그 힘든 금전판 일을 하려고 떠나다니? 더구나 이 딸의 례장감을 마련할 몇푼의 돈을 벌기 위해 그 사지판으로 가시다니!)
성녀는 강변을 따라 정신없이 달렸다. 베저고리고름이 어깨너머로 날렸다. 집에 당도한 성녀가 사립을 열어젖히고 뜨락으로 뛰여드니 참말로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를 꼭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사립밖으로 뛰여나가려던 그는 다시 생각하고 토방에 주저앉고말았다. 모셔오더라도 맨손으로 갈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는 그간 모은 배삯전을 들고 쌀과 팥 몇줌을 사서 밤새 절구에 찧은 가루로 송편을 빚었다. 아버지에게 대접할 송편을 베보자기에 싸들고 새벽참으로 집을 떠난 성녀는 아침, 점심 다 굶으며 먼길을 오다보니 이제는 더 걸을 힘도 없었다.
(내 이런 꼴을 아버지가 보시면? 그렇다고 되돌아갈수도 없고 아니, 어떻게 하나 끝까지 아버지를 찾아 집으로 모셔가야 한다. 이 딸 하나를 바라고 고생하신 우리 아버지를…)
강잉히 일어선 성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허기진 그는 눈앞이 아물거려 몇걸음 못 가 다시 주저앉고말았다. 본래 강녘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물속에서 자맥질하며 자라난 성녀는 균형잡힌 몸매가 미끈하고 피부도 윤택스러웠다. 더우기 등뒤로 길게 드리운 검고 굵은 태머리는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가끔 사공노릇도 하기에 사내들 못지 않게 팔힘, 다리힘도 셌다. 그런 성녀도 오늘은 어쩐셈인지 지쳐버리고말았다. 보따리를 풀고 송편 한개를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그는 다시 생각하고 보따리속에 넣었다. 솔잎 한줌을 뜯어 입에 넣은 성녀는 그것을 질근질근 씹으며 다시 걸었다.
성녀의 뒤로 머리에 임을 인 녀인이 따라오고있었다. 주막집녀인이였다. 허기져보이는 성녀를 측은스럽게 바라보며 녀인이 동정어린 말을 했다.
《이보라구, 아기!》
성녀가 주춤하며 뒤돌아보았다.
《어디 아픈가?》
《아니요, 그저…》
《아니, 내 눈은 못 속여. 주막집 20년에 다른건 몰라두 사람들은 가려볼줄 아네, 자.》
보짐을 내려놓고 길섶의 풀밭에 앉은 녀인은 성녀의 손을 잡아 자기곁에 앉히였다.
《먼길을 온것 같은데 보덕리에 누가 있나?》
《저 아버지를…》
《그래…》
녀인은 보짐에서 삶은 감자를 몇알 꺼내 성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라두 요기하라구, 얼마나 허기졌으면…》
《고마와요.》
성녀는 인사하기 바쁘게 감자를 껍질채로 걸탐스럽게 먹었다.
성녀를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녀인이 물었다.
《아버지의 성씨를 어떻게 부르나?》
《리봉칠이라구…》
생각나지 않은 모양 녀인이 다시 물었다.
《여기 보덕리에 언제 왔나?》
《아마 어제 저녁켠에…》
고개를 기웃하고 생각을 굴리던 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구레나룻이 시꺼먼 마을사람과 함께 여기로 오지 않았나, 그리구 아버진 앓는분이지.》
《맞아요. 글쎄 앓는 몸으로 이 험한 금전판에 오셨어요. 그래 다시 모셔갈려구.》
《그랬댔구만, 어제 저녁에 우리 주막에 오셨댔어.》
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녀가 불쌍한듯 어깨를 쓸어주었다.
성녀는 먹던 감자를 떨구며 실신한듯 녀인앞에 쓰러졌다. 주막집녀인은 성녀를 잡아흔들었다.
《아니, 왜 이러나?! 정신차리라구!》
이때 길을 가던 오까모도와 미야께가 이들을 띠여보았다. 오까모도가 미야께에게 눈짓으로 성녀를 가리켜보이자 그의 뜻을 알아차린 미야께가 성녀를 찬찬히 여겨보고나서 오까모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들의 수상쩍은 거동에 의혹을 느낀 주막집녀인은 걸어가는 그들의 뒤를 불안과 의문이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