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금
6
(2)
보덕리산기슭의 천막앞에는 《직산금광개발식》이란 현수막이 드리우고 그앞에는 다갈색양복차림에 가슴에 꽃을 단 오까모도와 다까하시가 서있고 그 둘레에 일본의 광산기술자들, 순사들과 랑인들이 정렬해있었다.
뒤짐을 진 오까모도가 선자리걸음을 하며 다까하시에게 말했다.
《총관리, 첫 광석을 캐면 제꺽 서울공사관으로 보내야 하오.》
《그야 물론!》 고개를 끄떡거린 다까하시는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헌데 개발때 신령께 바칠 처녀를 못 구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오까모도는 다까하시의 잔등을 두드렸다.
《총관리는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되오.》
《그러니 오까모도상이 이미? …》
《음.》
오까모도는 의미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까하시는 기뻐서 어쩔바를 몰라하며 오까모도에게 아첨기어린 소리를 했다.
《역시 오까모도상은 빈틈이 없습니다그려. 사람들이 조선의 진짜 공사는 오까모도상이다, 오까모도상은 사설공사다 하는 소리가 빈소리가 아닙니다.》
오까모도는 히물히물 웃었다.
《다까하시상도 제물희생식을 구경하겠으면 안내해주지.》
다까하시는 한손을 내저었다.
《에에, 싫소.》
《하하, 다까하시상은 불살생을 계률로 삼는 불도같구려.》
《그런데 희생식은 어데서 합니까?》
《산정에서… 실은 첫 버럭더미속에 파묻어야 하겠는데 조선놈들의 눈이 있기에 무인지경을 고르다보니 그렇게 됐소.》
《음.》
다까하시는 례식이라 검은 양복에 흰 와이샤쯔를 받쳐입고 조끼주머니에는 금시계사슬을 드리웠는데 번대머리를 가리우느라 꾹 눌러쓴 헬머트모자밑의 작을사 한 두눈이 노상 웃고있었다. 그는 금광의 총관리가 되였다는 자긍심으로 가슴이 부풀어 요새는 잠도 오지 않았다. 구름처럼 모여온 인부들을 둘러보는 그의 심경은 만족에 겨워 만세라도 부르고싶었다. 참으로 도처청산에 도처춘풍을 맞은듯싶었다.
하지만 인부들의 안색에는 지루하고 따분해하는 기색이 력력히 나타나있었다.
그제야 다까하시는 어째 희생식이 오래 걸린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시계를 꺼내본 그는 오까모도에게 묻는듯 한 눈길을 보냈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오까모도가 태연스럽게 말했다.
《희생식인데 어떻게 빨리 끝나겠소. 인부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준비해둔 모찌랑 던져주지그래.》
《거야 식이 끝난 다음에…》
《아아 상관없소. 물건이란 필요할 때 쓰는거니까.》
오까모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다까하시는 굴러가듯이 천막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는 커다란 궤짝 두개를 맞든 랑인들을 데리고나왔다.
인부들이 목을 빼들고 호기심어린 눈길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인부들앞으로 온 랑인들이 지레대로 궤짝뚜껑을 떼였다. 한 궤짝에는 흰 모찌가 가득, 다른 궤짝에는 붉은 모찌가 가득 들어있었다.
랑인들이 모찌를 들어 인부들의 머리우로 쥐여뿌리며 소래기를 질렀다.
《호라!》
《호라!》
조선인부들이 더러 어쩔가 하여 서로 눈치를 보았다.
오까모도와 다까하시는 긴장한 눈길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때 성미가 고정하고 강직한 봉칠로인이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타일렀다.
《임자네들, 더러운 왜놈의 떡을 받아먹어선 절대로 안되네.》
봉칠로인은 인부들을 타일렀을뿐만아니라 돌아다니며 땅에 떨어진 모찌를 짚신발로 짓뭉개버리군 하였다.
눈살을 찌프리고 지켜보고있던 오까모도가 곁에 서있는 랑인의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더니 인부들을 헤치며 봉칠로인에게로 다가왔다. 봉칠로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오까모도는 두손으로 칼을 쳐들었다.
《칙쇼!》
오까모도는 칼등으로 봉칠로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어이쿠! ―》
외마디 비명을 지른 봉칠로인은 피가 쭈르륵 흘러내리는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며 그 자리에 푹 쓰러지고말았다.
한편 이때 주막집에서 얼마간 휴식한 성녀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머니,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다…》
성녀가 머리를 숙여 인사하니 따라 일어선 주막집녀인은 성녀의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은혜라니? 그런 말 말고 좀더 안정하게나.》
《이제 우리 아버지를 찾게 되면 꼭 은혜를 갚겠어요.》
성녀의 결심을 알아차린 주막집녀인은 더 만류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말고 아버지를 꼭 만나라구.》
《오늘 금광개발식을 한다지요.》
《그런다더군.》
《그럼 제…》
다시금 머리를 숙이는 성녀의 팔을 주막집녀인이 꾹 잡았다.
《나가지 못하네. 무슨 소린지 개발식때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고 하던데 그러다…》
《그래도 가야 해요. 거기 가면 꼭 아버지를 찾을것 같아요.》
성녀의 행색을 살펴본 주막집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 그러면 내 옷을 입고 머리수건을 쓰고 나가게.》
잠시후 늙은이차림을 한 성녀가 주막집을 나섰다. 그는 금광개발식이 진행된다는 보덕리산기슭을 향해 걸음을 다그쳤다. 저쯤 앞에서 마주오는 세명의 왜인들을 본 성녀는 길섶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미야께와 다른 두명의 일본불량배들은 늙은이차림새인 성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주막집에 들이닥친 미야께일당이 뜨락에 버티고서서 주인을 찾았다.
《오이, 주인!》
부엌문을 열고 나온 주막집녀인은 왜인들을 보더니 대뜸 겁기에 질렸다.
미야께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에, 이 집 처녀 만나러 왔소.》
《처녀라니요?!》
주막집녀인은 아닌보살을 했다. 그러자 노기를 띠운 미야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방금전까지 있던 처녀말이야.》
《무슨 소린지, 우리 집엔 처녀가 없수다.》
《뭐야?》
미야께가 랑인들에게 눈짓하자 놈들은 주막집문을 열어젖히며 집안팎을 뒤졌다. 하지만 어데서도 처녀는 물론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놈들은 낯을 찌프리고 골살을 찌프렸다.
《미야께상, 없소.》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소.》
《칙쇼, 놓쳤구나.》 미야께가 입을 악물더니 잠시후 낯에 살기를 띠우고 씨벌거렸다. 《일없다. 방금전까지 있었으니 멀리 못 갔을게다. 가자!》
급급히 뜨락을 빠져나가는 미야께일당을 주막집녀인이 불안한 기색으로 지켜보았다.
허술한 옷에 수건을 푹 뒤집어쓴 성녀는 좀전에 지나친 왜놈들이 뒤쫓아올것 같아 반달음치다싶이 걸었다.
(아버지를 꼭 만나게 될거야. 아버지를 만나면 송편을 드려야지. 한데 너무 굳어져서 자시다가 목이 메면? … 물을 떠가지고 나올걸…)
성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뇌이며 걸음을 더욱 다그쳤다.
그런데 저쯤 앞에서 누군가를 업은 사람이 뛰여오고있었다. 그 사람과의 사이가 장바 한기장쯤 사이로 가까와졌을 때 어쩐지 그가 낯이 익어 성녀는 걸음을 주춤거렸다. 《텁석부리》로 불리우는 한마을에서 사는 아저씨가 분명했다.
그가 자기 가까이로 왔을 때 성녀는 그의 등에 업힌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아버지가?!》
얼굴은 피투성이고 정신을 잃었는지 죽었는지 아버지는 텁석부리의 어깨너머로 두팔을 축 드리우고있었다.
《아버지! ―》
성녀는 아버지에게 와락 달려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엉?!》
아버지를 업은 텁석부리도 놀라서 멈춰서더니 업고오던 봉칠로인을 길가 풀밭에 내려놓았다.
피투성이 된 아버지를 잡아흔들며 성녀가 부르짖었다.
《아버지! 어찌다가 이렇게 됐어요?!》
텁석부리가 불같은 한숨을 내쉬더니 탄식했다.
《왜놈의 칼에 맞아 이렇게 됐다. 그래서 지금 주막집으로 달려가던 길이다.》
성녀는 아버지에게 와락 안기며 몸부림쳤다.
《아버지! 아버지! 성녀가 왔어요!》
텁석부리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슴뻑거렸다.
봉칠로인이 간신히 눈을 뜨고 입을 벌렸는데 가는 소리가 슴새여나왔다.
《성… 녀야…》
《아버지!》
성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몸부림쳤다. 그바람에 머리수건이 벗겨지고 보꾸레미가 터져 송편이 쏟아졌다.
《…성… 녀… 야! … 왜놈들은… 철… 천… 지…》
가까스로 여기까지 말한 봉칠은 다시 의식을 잃었다.
성녀는 아버지의 가슴에 매달려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아버지! ―》
이때 급한 걸음으로 지나가던 미야께일당이 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미야께의 눈길은 죽은 사람보다 오열을 터뜨리는 성녀의 긴 태머리에 가 박히였다. 그의 눈이 커졌다. 애타게 찾던 조선처녀가 여기에 있지 않는가? 왜놈들이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미야께가 눈짓으로 성녀를 가리켰다.
《오이!》
《하!》
두 왜놈랑인이 성녀에게 달려들어 그를 무작정 아버지에게서 떼여냈다.
성녀가 몸부림치며 항거했고 텁석부리도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놈들아! 이게 무슨짓이냐?!》
미야께가 손칼치기로 그를 쓰러뜨렸다.
왜놈들이 기절한 성녀의 입에 자갈을 물리고 그를 자루속에 쓸어넣었다.
미야께가 놈들을 독촉했다.
《빨리!》
한 왜놈이 자루를 둘러메고 또 한놈이 뒤에서 그것을 받들어주었다.
《가자!》
세 왜놈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