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2 장
금
6
(3)
무거운 자루를 바꾸어메며 보덕리산기슭에 이른 놈들은 산으로 톺아올랐다. 자루를 멘 놈은 줄땀을 흘리고 숨을 헐썩거렸다. 그래도 미야께는 사납게 독촉했다.
《빨리, 빨리 가자!》
미야께일당은 드디여 산정에 올랐다. 산정에서 대기하고있던 다른 랑인놈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이제야 오는가?》
《오까모도상이 늦어진다고 성나겠네.》
왜놈들이 자루를 풀어놓자 실신한 성녀가 모로 픽 쓰러졌다. 랑인 한놈이 눈을 흡떴다.
《죽지 않았어? 죽은건 제물이 못돼.》
성녀의 가슴에 손을 대본 미야께가 히죽이 웃었다.
《아주 생신한 제물일세.》
미야께가 성녀의 웃저고리를 벗기였다.
균형잡힌 성녀의 미끈한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왜놈들은 처녀의 이쁜 얼굴이며 불룩한 젖가슴을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아깝다.》
어느 랑인놈이 이렇게 혼자소리를 하자 미야께가 랑인놈들을 둘러보며 뇌까렸다.
《자, 시작하자구.》
이때 불현듯 눈을 번쩍 뜬 성녀가 한순간 어리둥절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벌거벗기운 자기 몸이며 자기를 음탕한 눈길로 바라보고있는 왜놈들을 둘러본 처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성녀의 분노로 타는 부르짖음이 울려퍼졌다.
《이 섬오랑캐놈들아! ―》
미야께가 고개짓을 하자 여러놈의 왜놈들이 몸부림치는 성녀를 끌어다가 이미 파놓은 구뎅이속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삽으로 구뎅이에 흙을 퍼넣었다.
성녀의 머리우에, 몸에 흙이 들씌워졌다.
성녀는 두눈을 부릅뜨고 피타게 절규하였다.
《하늘아! ―》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산발에 메아리치며 하늘중천으로 증폭되여 울려퍼졌다. 복수를 하소하는 처녀의 애통스러운 원한의 목소리를 하늘이 듣고있었다.
조선처녀를 생매장한 흙구뎅이는 번번하게 메워졌다. 몇놈의 왜놈이 흙구뎅이를 발로 꾹꾹 다지였고 다른 왜놈들은 사방에 술을 뿌리며 고수레를 했다. 그런 뒤에 놈들은 흙구뎅이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손을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르며 좋은 금맥이 나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개발식장으로 급히 달려간 미야께가 오까모도의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희생식이 늦어진다고 사나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던 오까모도가 묻는 뜻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미야께 역시 눈을 끔뻑거려 대답했다.
오까모도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다까하시에게 일렀다.
《다까하시상, 시작하지그래.》
배불뚝이 다까하시는 위엄을 차리고 나지막한 단상에 올랐다. 그는 구름처럼 모여든 인부들을 둘러보고나서 입을 벌렸다.
《조용들 하시오. 지금부터 대일본제국의 시부자와자작께서 운영하시는 직산금광개발식을 거행하겠소.》
웅성거리는 인부들을 손을 들어 제지시킨 다까하시가 발언을 계속했다.
《에, 오늘 개발에서 첫 금광석을 캐는 사람에게는 한달분의 간죠를 특별상으로 주기로 했으니 어물어물하지 말고 직심스럽게 일하도록 하라! 이상!》
남포 터지는 소리가 쾅쾅 울리는 속에 왜놈들이 개발식축하놀이를 벌리였다. 술에 취해 낯짝들이 새빨개지고 벌거벗은 몸뚱이에 사타구니에만 훈도시를 차고 들뛰는 놈들의 몰골은 여불없이 원숭이와 꼭 같았다.
한편 건청궁 옥호루에서는 궁내무대신 리재면이 민비앞에 부복하여 아뢰고있었다.
《중전마마, 왜인들이 끝내 직산금광을 개발하였소이다.》
《무어라? !》
민비가 와뜰 놀라며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그게 적실하오?》
《예, 방금 전보문이 왔소옵니다.》
《아! ―》
민비의 입에서는 불같은 탄식이 흘러나오고 눈에서는 비탄의 눈물이 끓고있었다. 그는 너무도 원통하여 몸조차 비틀거렸다.
자기가 이미 조선갑부 최일이에게 광산개발을 허락하였으니 왜인들에게 그 광산을 넘겨줄수 없다고 그토록 강경하게 반대하였건만 그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끝끝내 직산광산을 빼앗다니! 자기가 계속 이런 모욕과 멸시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끓어오르는 격분을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방구석에 세워져있는, 언젠가 일본공사가 선물로 기증한 커다란 대형사기꽃병에 눈길이 닿자 씽하니 달려가 그것을 힘껏 내동이쳤다. 푸른 바탕에 흰 사꾸라꽃으로 문양 돋힌 대형사기꽃병은 폭탄 터지는것과 같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산산쪼각으로 부서졌다. 그것으로도 성차지 않아 이번에는 벽에 세워져있는 일본정부에서 보내온 키를 넘는 커다란 쾌종을 방바닥에 밀어던졌다. 벽시계유리가 깨여져나가는 아츠러운 소리, 시계추며 태엽이 망그러지는 금속성… 그랬어도 직성이 풀리지 않은 민비는 방복판에 두손을 허리에 짚고서서 어깨숨을 쉬였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출출 흐르고있었다.
(어디 두고보자, 짐승같은 너희 왜놈들이 얼마나 더 승기를 부리는가! …)
이때 합문밖에서는 상궁들과 궁녀들이 방안에서 분노에 치를 떨며 폭약터지듯 발광하는 민비의 거동에 목을 움츠리고 겁기에 질려 서있었다.
얼마동안 방안이 잠잠하더니 갑자기 합문이 벌컥 열리고 어서 들어와 이것들을 치우라는 민비의 성칼진 소리가 울렸다. 궁녀들이 급급히 편전으로 들어갔다.
홍아정은 조상궁과 함께 곤녕합쪽 복도로 표일하게 걸어가는 민비의 뒤를 따랐다.
곤녕합에 이른 민비는 방에 들어가 보료우에 앉아서도 말없이 앞만 쏘아보았다. 그사이 아정은 공작선으로 민비에게 부채질해주었다.
조상궁은 얼음을 띄운 꿀물놋대접을 들고와 민비앞의 탁자에 놓아주었다. 놋대접을 들어 차디찬 꿀물을 꿀꺽꿀꺽 들이킨 민비는 그제야 가슴이 좀 진정되는 모양 조상궁과 아정이에게 어서 나가보라고 일렀다. 그러나 아정은 자리를 일지 않았다. 아정은 낯색이 붉게 상기된 민비를 의아히 여겨보았다.
민비는 벽의 한점을 응시하며 혼자소리하듯 뇌였다.
《난 아무래도 모를 일이 한가지 있구나. 일본에도 땅이 있고 바다가 있으니 곡식을 심어먹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겠는데 왜서 저 섬오랑캐들이 우리 나라를 침노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로략질하는가 말이다.》
아정은 격분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왜놈들은 강도가 아니옵니까?》
《강도? …》
《그렇소옵니다. 강도는 잘 살아야겠는데 일을 하기 싫으니 남의 집에 뛰여들어 주인을 죽이고 가산을 빼앗지 않소옵니까?》
《네 말이 옳다. 그러니 왜나라는 전수히 강도의 나라로구나.》
고개를 크게 끄덕거린 민비가 문득 의혹에 찬 눈길로 아정이를 건너다보았다. 아정이의 눈귀에서 불쑥 솟아오른 굵다란 눈물방울이 빨갛게 물든 볼을 타고 굴러내렸던것이다.
《너 왜 그러느냐?》
아정은 얼른 저고리고름을 들어 눈굽을 닦고나서 입을 열었다.
《마마, 분해서 그럽니다.》
《말을 해서 뭘 하겠느냐.》
민비는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는 민비에게 아정은 고개를 오연히 쳐들고 결연히 말하였다.
《마마, 직산금광을 다시 빼앗아야 하옵니다.》
《빼앗다니, 어떻게?》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은 호기심을 품고 민비는 아직도 물기가 어려있는 눈매, 입매 다 고운 아정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을 불러일으켜야 하옵니다. 직산의 보덕리와 린근에는 원래부터 금전군들이 많을것이오며 지금 왜놈들에게 속아 새로 금전군이 된 사람들도 많을것이옵니다. 그들에게 왜놈들이 우리 금광을 강탈했다는걸 알려주면 가만 있지 않을것이옵니다. 백성들의 힘은 크고 무섭습니다. 저 남도에서 일어났던 동학란을 보십시오.》
내심의 불길이 내비친듯 별처럼 빛나는 아정이의 눈을 보며 민비는 입을 열었다.
《네가 백성들을 어찌 그리 잘 아느냐?》
《마마, 소녀도 백성이 아니옵니까?》
《호.》
가볍게 웃음발을 날리는 민비의 뇌리에는 동학란이 아니라 십여년전의 임오군란때 일이 불현듯 되새겨졌다. 격노한 군정들과 서울백성들이 들고일어나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가. 한패는 대궐을 범하고 또 한패는 달아나는 일본공사관의 왜놈들을 인천까지 따라가 끝내 나라의 지경밖으로 내쫓지 않았던가. 백성들을 자기의 통치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민비이기에 그는 언제 한번 백성들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으며 생각해볼수도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백성들의 힘이 크고 무섭다는 아정이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자 불시에 백성들의 힘을 리용하여 직산금광의 왜놈들을 다 쫓아버리는것도 역시 일종의 이이제이정략이 아니겠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네 생각을 마저 말하거라.》
민비의 표정과 그 어조를 통해 그가 자기의 말을 긍정하고있다는것을 깨달은 아정은 주저없이 아뢰였다.
《그저 최도고아저씨에게 중전마마의 뜻을 알려주면 되오이다.》
《최도고? 최일이 말이냐?》
《그렇소옵니다.》
《네, 지금 승지더러 김홍집대감을 들게 하라고 일러라.》
《알아모셨소옵니다.》
아정이가 자리를 뜨자 얼마 아니되여 진령군이 나타났다. 얼굴의 분독을 가리우느라 분을 회박같이 뒤집어쓴 그는 민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마, 홍상궁이 어데로 저렇게 정신없이 뛰여가옵나이까?》
민비가 울분과 격분으로 낯색이 발갛게 상기되더니 날카롭게 내쏘았다.
《이제 직산금광에서 무슨 변이 부르터지나 두고보게.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 피물 낸다는걸 왜놈들도 알아야 해.》
《예. …》
고개를 끄덕이는 진령군은 이 사실을 빨리 오까모도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미처 그럴 사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직산금광에서 금전군들의 쟁의가 이미 일어났던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비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들스스로가 일으켰다는것을 그는 알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