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3 장

민비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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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도 시원한 흰 모시바지저고리를 입고 눈처럼 흰 버선에 옥색대님을 매고 틀지면서도 단정하게 앉은 도고 최일은 까만 감투밑의 흰 얼굴도 늘 면도를 하여 환하고 깨끗하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돌고있었다.

그와 마주앉은 엄병무가 직산금광에 대한 말을 꺼내려고 하자 최도고는 손을 내저었다.

《다 알고있네.》

《언제 벌써…》

병무는 의아쩍은 기색으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곳 관아에서 전보장계가 올라왔네. 김홍집총리대감은 물론 상감도 민중전도 얼마나 흡족해하는지 모른다네. 중전마마는 춤이라도 출듯이 좋아하더라질 않나. 장계에 백성들의 앞장에서 싸워 왜놈들을 쫓아버린 엄도령, 자네 이름도 올라있다네. 장하이, 장해… 평소엔 점잖고 의젓한 선비 같은데 그런 훌륭한 용력을 지녔거던, 허허…》

최도고는 병무를 믿음과 사랑이 함뿍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과분천만한 말씀입니다.》

병무는 최도고의 칭찬이 쑥스러운듯 고개를 숙이고 손을 주물렀다. 그러더니 문득 정색한 기색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어쨌든 이번에 왜놈들에 대한 우리 백성들의 원한이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가슴 사무치도록 느꼈습니다.》

최도고도 얼굴의 웃음기를 가시더니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뇌였다.

《왜 그러지 않겠나. 저 섬오랑캐들이 력대로 우리 배달족을 괴롭혀왔으니 말일세.》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병무는 최도고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이제는 직산에서 왜놈들도 다 쫓겨갔으니 금광일을 계속 내밀어야지요?》

최도고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간특하고 검질긴 왜놈들이라 그렇게 쉽사리 손을 떼지 않을걸세. 그래서 당분간 케를 두고 보자는걸세.》

그의 말이 긍정되여 병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병무는 최도고를 다시 쳐다보았다.

《도고님, 전 이젠 어찌랍니까?》

《며칠 말미를 줄테니 집에 가 쉬게. 그리구 꼭 한번 다녀와야 할 곳이 있네.》

어딘가 비장한 결의가 어린 최도고가 벽의 어느 한 점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머리를 숙인 병무는 자리를 일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병무는 아버지앞에 조심스럽게 앉아있었다.

엄초관이 아들을 힐끗 치떠보고나서 물었다.

《너 요즘 어데로 그렇게 나돌아다니느냐?》

병무는 고개를 숙인채 나직이 대답했다.

《금광일때문에…》

《금광?》

엄초관의 시꺼먼 눈섭이 곤두섰다.

《그러니 너 여직껏 금전군노릇을 하느라구 뛰여다녔느냐?》

병무는 그간 최도고를 도와 직산금광을 개발한 일이며 또 왜놈들이 그것을 빼앗으려 하기에 놈들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자상히 하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앞에서 구차스러운 변명을 하는것 같아 그만두고 또 머리를 숙였다.

《예.》

엄초관이 힐문하듯 따졌다.

《그리구 요즘 쓰는 돈두 그 일때문에 번 돈이냐?》

《예.》

엄초관이 성한 한쪽무릎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탄식했다.

《허허, 이런 변 봤나? 호랑이를 키우는줄 알았더니 당초에 시라소니였구나.》

그러던 엄형국이 천둥같이 화를 냈다.

《야 이놈, 누가 널더러 돈벌이를 다니라더냐! 우리 가문은 대대루 무관집안이라구 내 얼마나 말했느냐! 그래서 너두 10년세월 산속에서 무예를 닦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렇게 키운 힘을 나라를 지키는 일에 쓰지 않구 장사일에 써?! 네 눈에는 저 왕궁을 지키고 선 왜놈들이 보이지 않느냐, 이 구실 못한 놈아!》

성풀이를 하지 않고는 견딜수 없어 몸을 떨던 엄형국은 불시에 아들의 귀뺨을 후려쳤다.

공씨가 기겁하여 남편에게 매달렸다.

《아니 령감, 정신 나갔소?》

《마누라는 삐치지 말어!》

눈을 부라리며 엄형국이 공씨를 활 밀어제꼈다. 공씨가 나동그라졌으나 거기에는 개의치 않고 엄형국은 다시 아들을 윽박질렀다.

《그래, 다시 장사길에 나설테냐?》

병무는 눈물이 그렁하여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군영에 들어가겠습니다.》

《음.》

엄형국이 다시한번 아들을 노려보고나서 안해에게 일렀다.

《부인, 내 비단저고리를 가져오.》

《그건 왜?》

공씨가 의아하여 되묻자 엄형국은 꽥 고함을 질렀다.

《가져오라면 가져와!》

공씨는 붕어자물쇠를 채운 장농을 열고 남편의 비단바지저고리를 꺼내들고와 그의 무릎앞에 가져다놓았다.

엄형국은 아들에게 엄하게 일렀다.

《나는 네가 군료로 받는 베옷을 입을테다.》

이렇게 말한 엄형국은 비단저고리를 집어들고 쫙쫙 찢었다. 공씨가 덴겁하여 남편에게 매달렸다.

《아니 령감, 실성을 했소? 아까운 비단옷은 왜?!》

엄형국은 그래도 그냥 비단옷을 찢었다.

병무는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그의 어깨가 세차게 물결쳤다.

며칠후 병무가 최도고를 찾아갔을 때 그는 여느때 달리 진중한 기색으로 따지듯 물었다.

《자네는 날 믿는가?》

병무는 진심으로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숙였다.

《믿습니다.》

《나 역시 자네를 전적으로 믿네. 믿음에는 믿음으로 대하는것이 의리가 아니겠나? 나는 엄도령을 믿고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한가지 맡기려네.》

《…》

긴장해진 병무의 표정을 건너다본 최도고가 천천히 뇌였다.

《나는 지금껏 재벌이 되려고 생각했네.》

병무는 진심을 토로하는 최도고를 경건하게 바라보았다.

《재벌이 되여 개화문명하고 부국강병한 신흥조선을 일떠세우는데 기여하려고 했지. 허지만 왜놈들이 이 땅을 가로타고앉아 전횡을 부리는 한 그것은 구름과 같은 헛생각이라는것을 깨닫게 되였네. 그래서 왜놈들을 이 땅에서 내모는데 내 재력을 바치기로 작정했네. 지금 왜놈들과 맞서싸울 힘은 저 남도에서 일어난 전봉준의 동학군밖에 없네. 그래서 나는 전봉준대장을 돕기로 결심했네. 그래, 자네도 이 일에 나설수 있겠나?》

《어른께서 하시는 일에 시생은 언제나 나설 준비가 되여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걸음이 마지막걸음이 될것 같습니다.》

《왜?》

《시생은 군정이 되렵니다.》

《군정? … 생각 잘했네. 욕심같아서는 자네를 그냥 내곁에 두고싶네만 내 욕심만 차려서야 안되지.》

최도고는 자못 서운한 기색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서간을 전봉준대장에게 전하고 그의 령을 받아오게. 전라도는 먼길이니 차빌 단단히 하고 떠나게.》

《알겠습니다.》

 

전라도에 당도한 엄병무는 최경선이란 사람을 따라 전봉준의 집이라고 하는 초가마가리의 뜨락으로 들어섰다. 마침 방에서 나온 한 청년이 토방우의 짚신에 발을 꿰고있었다. 허리를 펴고 뜨락으로 성큼 내려서는것을 보니 퍽 낯이 익었다. 그렇지, 전라도광대! …

병무는 흠칫 놀랐다. 마주오던 전라도광대 천태봉이도 병무를 알아보고 무척 놀라는 기색이였다. 다시 걸음을 옮긴 그들은 서로 어기여 지나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들은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병무가 방안에 들어서니 용모 준수한 40대의 사나이가 앉아있었다. 최경선이가 병무에게 전봉준대장이라고 소개했다.

병무는 얼른 무릎을 꿇고 그에게 절을 했다.

《대장에게 문안 드리오.》

전봉준은 사람좋은 웃음을 띠우고 병무에게 어서 편히 앉으라고 일렀다.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보인 병무는 품속에서 최도고의 서간을 꺼내 전봉준에게 두손으로 바쳤다. 서간을 받은 전봉준은 봉투에서 속지를 뽑아 펼쳐들었다. 참지에 진한 먹으로 잘게 쓴 편지의 글자들이 찌를듯이 그의 눈에 마쳐왔다.

《…소인은 전선생의 선성을 듣고 흠모하는바 오래되였으나 이제야 비로소 붓을 들어 인사의 말씀을 드리게 됨을 심히 부끄럽게 여기는바외다. 하오나 요즘은 용전분투하는 선생의 명성이 들려오지 아니하니 어찌된 일이외까?

불법무도하게 남의 나라 궁성까지 타고앉은 왜놈들이 이제는 제 마음대로 이 땅의 부원까지 마구 빼앗으려는 형편이외다. 아, 지금형세로 가다간 몇해 안 가서 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쪽박을 들고 나서게 될것이외다.

전선생, 왜놈들이 청나라와의 전쟁에 국력을 쏟고있는 이때 하루빨리 재기하여 서울로 입성하는것이 상책이 아니외까.

군사에 전혀 소견이 없는 이 야인도 그렇게 생각되거늘 하물며 수만군사를 이끄는 전대장께서야 어련하겠소이까.

전선생, 이 야인이 큰 힘은 없으나 얼마간의 재력은 있어 그걸 전선생의 의거에 보탬으로 할 작정이오니 믿을만 한 사람을 보내주시면 의논하도록 하겠소이다.》

편지를 읽은 전봉준은 감동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사군들이란 대개 도생과 영리에만 눈이 빨개 돌아치는데 이 최일이란분은 참 훌륭한분이시오.》

그 말에 병무도 찬동했다.

《그렇습니다, 부자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세상의 평판이 좋지 않기마련인데 최도고어른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란 벌줄도 알아야 하지만 쓸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요. 이분은 참으로 돈 쓸바를 아는 사람이군.》

감심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 전봉준은 혼자소리로 뇌였다.

《깨닫는데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실행하는데는 용기가 필요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전봉준은 흰 버선발로 사색에 잠겨 무겁게 방안을 거닐었다.

빨리 재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농민군은 말그대로 농사군들이니 추수철을 눈앞에 두고 어찌 집을 떠나려 하겠는가. 빨리 추석이 지나야 할텐데…

그는 이러한 초조한 생각으로 가슴을 바재이고있었다.

이윽고 다시 엄병무앞에 마주앉은 전봉준은 다정하게 일렀다.

《먼길을 오느라 고단할텐데 오늘 밤은 여기 주막에서 쉬고 래일 우리 사람과 함께 상경하도록 하시오.》

이렇게 말한 전봉준은 문을 열고 소리쳤다.

《태봉이.》

그는 문앞으로 달려온 태봉이에게 분부했다.

《이 한양젊은이를 주막으로 모시게.》

전봉준은 병무에게 친근하게 일렀다.

《그럼 오늘은 편히 쉬시오.》

뜨락에 내려선 병무를 마뜩잖은 눈으로 힐끔 치떠본 태봉은 말없이 앞서걸었다. 병무는 그에게 사과할 일도 있고 해서 말을 걸고싶었으나 태봉이의 태도가 하도 랭랭하여 입을 벌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막집에 이른 태봉은 병무를 세워둔채 혼자 부엌으로 다가가 안에 대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양서 손님 하나 왔으니 잘 모시도록 하오.》

부엌안에서 반색하는 아낙네의 소리가 울렸다.

《아이구머니나, 한양서? 어서 사랑방에…》

말없이 사랑방으로 다가간 태봉이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병무에게 들어가라고 고개짓을 했다.

병무가 씩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태봉은 방문을 쾅 닫아준 후 떠나가버리고말았다.

시골의 정취를 자아내는 까치의 울음소리가 울리는 속에 잠에서 깨여난 병무는 주막에서 차려주는 푸짐한 조반을 끝내고 전봉준의 처소로 찾아갔다. 그가 방안에 들어서니 전봉준의 곁에 태봉이가 앉아있었다.

병무는 전봉준에게 깍듯이 선절을 하였다.

《밤새 편안하셨습니까?》

전봉준이도 호인다운 웃음으로 병무를 맞아주었다.

《젊은이도 푹 쉬였소?》

《예, 덕분에.》

병무는 자리에 앉으며 태봉이를 건너다보았다. 태봉이는 외면하였다.

이윽고 전봉준이가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우리 태봉이와 함께 가시오.》

《예에?》

병무는 미덥지 않은 눈길을 얼핏 태봉이에게 던졌다. 그도 그럴것이 수만금의 큰 돈을 다루는 엄청난 일을 광대출신의 애숭이 태봉이가 꽤 해낼가 하는 의혹과 불신이 자연 가슴속에 자리잡기때문이였다.

《흥.》

태봉이도 코웃음을 치며 병무를 찔 흘겨보고나서 고개를 홱 돌리는것이였다.

전봉준이가 침착한 어조로 병무에게 태봉이를 소개했다.

《이 젊은인 내 시위대장(호위대장)인데 젊은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데다 서울사정도 잘 아니 랑패없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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