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3 장

민비의 고민

5

 

이영이 거멓게 고삭은 초라한 농가들사이로 병무와 함께 말없이 걷던 태봉이가 병무더러 여기서 잠간 기다리라고 무뚝뚝하게 이르고나서 제 혼자 어디론가 씨엉씨엉 걸어갔다.

옥절이의 집을 찾은 태봉은 사립문을 열고 뜨락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뜨락에서 쭈그리고앉아 빨래를 하고있던 옥절이가 반색하며 일어섰다.

《태봉아!》

사글사글한 눈으로 반기는 옥절이에게 태봉은 푸접없이 내뱉았다.

《나 한양가니 그리 알어.》

옥절은 걱정이 자오록해서 물었다.

《한양엔 왜?》

《가시나가 알 일이 아니야.》

앵돌아진 옥절은 뾰로통하여 내쏘았다.

《흥, 어데를 나돌아다니는지 알게 뭐야.》

《이 가시나가…》

《오래 있지 않지?》

《응.》

《좀 있어.》

부엌으로 들어가려는 옥절이의 손목을 태봉이가 잡았다.

《로자를 가지고 가니까 그만둬.》

《그래두.》

《난 간다.》

돌아서서 힝하니 사립문밖으로 나가버리는 덜퉁스러운 태봉이를 옥절은 저고리고름을 입에 물고 눈물이 글썽하여 점도록 바래웠다.

태봉은 병무와 함께 산속길을 헌걸차게 걸어갔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솔밭에서는 쏴―하고 솔바람이 불어쳤다. 대낮인데도 솔밭속은 어둑시그레했다.

태봉이 앞에 섰고 조금 뒤떨어져 병무가 걷고있었다. 병무가 태봉이를 슬쩍 건너다보며 말을 걸었다.

《여, 친구.》

태봉이가 마뜩잖은 기색으로 뒤돌아보았다.

《뭐, 친구?》

《길가는덴 이야기가 날개라는데 말없이 걷는게 무슨 재민가?》

웃음 띠우고 하는 병무의 말에 태봉은 비꼬는 어조로 대척하였다.

《량반댁도련님이 불상놈 보고 친구라고 하면 되오이까?》

《그러지 말게. 량반, 상놈, 귀천의 차별을 없앤다는 군국기무처의 법령까지 나왔는데.》

《한가지 물읍세다. 붕우유신(친우사이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란 글귀는 글공부하는 도련님이 더잘 아실텐데 정월대보름날 밤에 왜 나오지 않으셨소?》

병무는 눈에 사죄의 웃음을 띠우면서 말했다.

《그걸 사과하자는게 아닌가. 자네에게 용서를 빌건 그뿐이 아니지. 나때문에 애꿎은 자네가 옥살이를 하고 게다가 500원씩이나 벌금을 물고…》

《그러니 신의는 지키려고 했다는거요?》

《자네를 찾느라구 온 서울바닥을 돌아다녔네. 내 이제 서울에 올라가면 꼭 500원을 주겠네.》

태봉은 결기있게 한팔을 홱 내저었다.

《소용없소. 목숨 내놓고 싸움판에 나섰는데 그깟 500원이 다 뭐요? 그러지 말고 그날 밤 약속을 여기서 지키지 않겠소?》

《뭐? …》

《그날 밤에 겨루자고 하지 않았소?》

그제야 비로소 영문을 알아차린 병무는 씩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요. 사내들이 한번 약속을 했으면 그만이지.》

정색한 태봉이를 보고 병무는 저도 웃음을 가무렸다.

《진담인가?》

《난 롱담할줄 모루.》

《좋네, 저쪽 공지루 나가세.》

병무는 앞서걷더니 공지의 풀밭에 이르러 저고리를 벗어던졌다. 구리빛살결, 울근불근한 근육, 힘장사다운 기백이 그의 몸에서 훅 풍기였다.

하지만 태봉이는 저고리를 벗지 않았다. 그랬어도 강골다운 기상이 엿보였다.

두주먹을 부르쥐고 격술자세를 취한 태봉이와 병무는 잠시 서로 마주 노려보았다. 드디여 맞붙은 그들은 생사를 건 싸움판에 나선 사람들마냥 기가 살아 날뛰였다. 치고 차고 받고… 택견, 수박 등으로 여러합 겨루었으나 승부가 날것 같지 않았다.

병무가 별안간 훌 몸을 날리더니 높은 소나무가지에 매달렸다. 태봉은 홀지에 사라진 병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태봉의 몸우에 떨어져내린 병무는 두다리사이에 그의 목을 끼우고 태넘이를 하였다.

가까스로 풀려난 태봉이가 씩씩거리며 허리춤에서 짧은 비수를 뽑아들었다. 량손에 비수를 하나씩 갈마진 태봉이를 보고 병무는 흠칠 놀랐다. 그는 뒤걸음치다가 굵은 소나무줄기에 등이 걸려 더 어쩌지 못했다.

매눈같이 날카로운 태봉이의 눈초리가 번뜩였다. 태봉은 오른손의 비수를 뿌려던졌다. 병무는 눈을 딱 감았다. 그런데 저쯤 뒤에서 찍 하는 소리와 함께 비수를 맞은 메토끼 한마리가 바르르 떠는것이 아닌가.

《허허, 자네 솜씨도 어지간하구만.》

병무는 죽어너부러진 메토끼한테로 다가가 그것을 가져다 태봉의 발치에 떨구고 손을 내밀었다.

《우리 통성하자구. 난 엄병무라고 하네.》

태봉은 마지못해 병무의 손을 잡았다.

《난 천태봉이요.》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그런데 불현듯 걸음을 멈춘 엄병무가 의혹이 가득 실린 눈길로 천태봉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것이였다.

《가만, 자네한테 누이동생이 있지 않나? 13살쯤 되는…》

《있소.》

이번에는 태봉이가 발길을 멈추더니 의아한 시선으로 병무를 지켜보았다.

《그 애 이름이 천태순이가 아닌가?》

《엉?!》 태봉이의 매눈이 부엉이눈처럼 둥그래졌다. 《그 애를 어떻게 아오?》

병무는 대답대신 허거픈 웃음부터 웃었다.

《허허,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병무는 태순이가 지금 자기 집에서 곱게 자라고있다는 그간 사정을 두루 말하였다.

《그러니 그 애를 왜놈의 마수에서 구원해주었다는 사람이 바로 자네였구만!》

태봉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였고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병무!》

별안간 태봉이가 갈범의 울부짖음같은 소리로 부르짖으며 병무를 꽉 그러안았다. 병무도 물기에 젖은 걸그렁한 목소리로 웨치며 태봉이를 부둥켜안았다.

《태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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