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3 장

민비의 고민

9

 

 

《전하, 마마, 방금 개성류수한테서 장계가 올라왔소옵니다.》

고종과 민비앞에 부복한 허연 수염을 드리운 외무대신 김윤식이가 이렇게 아뢰였다.

늘 그러하듯이 고종은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내용인고?》

《개성해평삼포에 도적이 들었사온데…》

김윤식의 말을 중둥무이시키며 민비가 날카롭게 힐문했다.

《무어라? 언제?》

《어제 하오때인데 왜인들이 인삼밭을 지키던 우리 사람을 죽이고 인삼을 훔쳤소옵니다.》

《또 왜인? ! 백주에 날도적놈들! 사람까지 죽여?!》

민비가 희고 작은 손에 힘을 주어 종주먹을 쥐더니 이발을 오도독 갈았다.

그게 어떤 인삼이라고, 얼마나 큰 기대를 건 인삼밭인데 왜놈들이 그것을 도적질해?!

민비의 눈앞에는 며칠전에 있은 일이 떠올랐다.

…여느때와 달리 활기있는 걸음으로 민비의 편전에 들어선 고종은 안해의 옆보료우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았다.

《곤전, 좋은 일이 생겼소.》

민비는 송구스러운 미소를 띠운 얼굴을 쳐들었다.

《무슨 일이옵니까?》

《방금 탁지대신 어윤중이가 왔댔는데 지금 국제시장에서 인삼값이 금값이라는구려. 한데 금년 우리 인삼들이 잘되였다지 않소. 더우기 궁실소유지인 개성해평리의 삼포는 아주 작황이 좋다오.》

《그래요?》

민비도 기쁨으로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 그걸 어떻게 처분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어왔소그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민비가 이윽고 고종한테 눈길을 돌렸다.

《상감마마, 이제 얼마후이면 청나라의 섭정 서태후의 환갑날이 됩니다. 인삼을 팔아 서태후에게 회갑뢰물로 바칩시다. 참, 요긴하게 쓸 돈이 마침 생겼습니다.…》

《얼마나?》

《10만량어치야 되여야지요. 그리고〈서태후생일축하사절〉도 보냅시다.》

민비는 민족의 운명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이때에조차 청국에 의존하여 수구파의 실권을 회복해보려고 망상하였다. 청국에 대한 사대주의적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던 민비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청국이 수세에 빠진 때에 이르러서까지 그에 의존하려는 비렬한 아부행위를 감행하였던것이다. 그의 이런 망동이 도리여 조선정부에 대한 완전한 예속을 실현하려는 일본침략자들에게 좋은 구실로 될줄은 그도 미처 생각을 못했다.

《음…》

고종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쳐들었다.

《한데 일본것들이 이를 알면 가만 있을가?》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청나라가 왜국과 힘겨운 전쟁을 하고있는데 우리가 성의라도 표시해야지요.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 야단이 아니옵니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오.》

고종은 짐짓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민비가 문쪽에 시선을 박은채 침착하면서도 야무진 소리로 찍어 말했다.

《올가을의 삼들은 한뿌리도 일본이 다치지 못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탁지와 농상에 어지를 내리겠소.》

민비가 이런 회억에 잠겨있는데 김윤식이가 또 입을 열었다.

《하온데 길가던 두 조선젊은이가 도적놈 왜인 셋을 죽였는데 그 시체를 달구지에 실어 올려보냈소옵니다.》

그의 말에 고종과 민비는 흠칫 놀랐다.

《뭣이?》

《무어라?!》

서로 마주쳐다보는 고종의 얼굴엔 겁기가 어렸으나 민비는 어딘가 통쾌해하는 기색이다.

김윤식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하의 윤허(허가)를 받잡고…》

《윤허?…》

민비가 의아쩍어하는듯 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자 외무대신 김윤식이가 머리를 조아리고나서 입을 열었다.

《이건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대사건이라 우리 외무아문의 결심만으로는 처리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민비가 김윤식이를 아니꼽살스럽게 쏘아보았다.

《도적이 주인한테 맞아죽었는데 이런 문제 하나 처리 못해서야 그게 무슨 정부요. 당장은 왜인들의 시체가 더 썩기 전에 일본공사관에 넘겨 주세요. 시체인도는 친일당인 법무협판 김학우를 보내세요. 후처리는 일본공사관에서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것을 보고 결심합시다.》

민비의 말을 듣고있던 고종은 안심치 않아하였다.

《곤전, 좀더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소? 이제 일본사람들의 압력이…》

민비는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어디 왜인들의 압박을 한두번 받았습니까? 〈강화도조약〉이후로 매일과 같이 받는 압박이 아니옵니까? 상감마마, 우리도 이제는 좀 꿋꿋합시다.》

이튿날 외무대신 김윤식으로부터 일본공사관의 요구조건을 전해들은 민비는 격분하여 바락 고함을 질렀다.

《무어라?!》

민비의 고함소리에 흠칫 놀란 김윤식은 채머리떨듯 흰수염을 떨었다.

민비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데 있나?! 뭐 범인을 잡아바치고 배상금을 물라? …》

김윤식이가 송구스럽게 여쭈었다.

《진령군을 무죄석방하고 박영효를 정부요료에 등용시키라는 요구조건도 있소옵니다.》

민비가 코웃음치며 쓰겁게 내뱉았다.

《흥, 인삼포사건을 잘 써먹으려는 왜인들이로다. 일본속담에 벼룩이가죽 벗긴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벼룩이가죽 벗길 족속들이요.》

김윤식이도 머리를 끄덕였다.

《지당합신 말씀이옵니다.》

《그래, 상감께서는 뭐라고 하시오?》

《중전마마의 의향을 따르라 하였소옵니다.》

《대원위대감께선?》

《그저 펄펄 뛰기만 하시니…》

《후유―》

민비는 휘파람소리같은 한숨을 내쉬였다.

《날더러 암닭이 운다고 하지만 조정엔 울지 못하는 수닭들뿐이니 암닭이라도 울어야 할게 아니요?》

민비의 기지있는 말을 늙은 김윤식이가 빙그레 웃으며 긍정했다.

《지당합신 하교옵니다.》

민비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김윤식에게 의논조로 물었다.

《일본공사관이 이렇게 나오리라는건 이미 예견한바니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고… 대감, 이렇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중전마마.》

김윤식이도 긴장한 기색으로 민비한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왜인들이 이 사건을 잘 써먹으려 하는데 우리도 그리합시다.》

《저 어떻게?…》

김윤식은 여전히 민비를 주시하였다.

민비는 생각에 잠겨 또박또박 말하였다.

《범인문제는 일본이 치외법권을 휘두르면서 범인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지 않는 형편에서 주재국의 〈범인〉을 넘겨달라는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쳐갈기고…》

김윤식이가 머리를 수그렸다.

《예.》

《다음 배상금문제는 도적질을 하다가 주인한테 매맞아죽은 놈에게 배상금을 낸다는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쳐내치고, 하지만 위자료 몇푼은 줍시다.》

《예.》

《다음 진령군문제는 우리는 죽이겠다는것이고 왜인들은 무죄석방 시키라는것이니 절충안으로 궁성에서 내쫓는것으로 락착짓고…》

《예.》

《다음 박영효문제는 우리가 이미 관복까지 하사했으니 장차 정계에 내세우려는것이 아니냐고 합시다. 어쨌든 왜인들은 야만인들이라 횡포무도하니 지내 엇서지는 맙시다. 외유내강합시다. 버드나무가지가 비록 가늘고 회친거려도 굵은 장작단을 묶지 않습니까?》

《예.》

민비를 바라보는 김윤식의 눈에는 경탄과 경의의 빛이 어려있었다.

그는 민비가 치마입은 녀인으로 태여난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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