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3 장

민비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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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봉준을 만나고 서울로 되돌아온 엄병무는 며칠동안 두문불출하고 집에 꾹 박혀있었다. 한것은 그가 도고 최일이를 찾아갔을 때 개성인삼포사건으로 왜놈들이 범인을 잡아바치라고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있으므로 앞으로 일이 어떻게 번져질지 모르기에 절대로 밖에 나서지 말라고 최도고가 침을 단단히 놓았기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그한테서 기별이 오기를 개성인삼포사건은 민중전의 개입으로 원만히 타결되였으며 이제는 마음놓고 아무데나 다녀도 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작 마음놓고 나돌아다니자고 하니 병무는 더욱 난처했다. 어데 갈데도 없었고 오란데도 없었던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계원사의 백단도사에게 무술을 배우러 산으로 들어갈수도 없었고 다 망한 직산금광일때문에 최도고를 찾아갈수도 없었다.그렇다고 태봉이처럼 동학군이 될수도 없고…

이래저래 마음썩이며 방바닥에서 딩굴고있는데 마침 오늘 아버지 엄형국이 강화도에서 초관으로 군적에 몸을 두고있을 때 그밑에서 기총을 하던 김만수가 집에 찾아왔다. 그는 지금 궁성의 수문장일을 보고있다고 한다.

웃방에서 팔베개를 베고 무료하게 누워있는 병무는 자연 아래방에서 울리는 말소리에 귀를 강구지 않을수 없었다.

《수문장, 자네 마침 잘 왔네.》

반색하는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대척하는 김만수의 목소리에서는 인정미가 느껴졌다.

《우리 병무를 군영에 좀 넣어주게나.》

《군영에?… 군영이란게 명색뿐이지 총두 없는게 무슨 군사나요?》

《총이 없다니?…》

《왜놈들이 먼저번 왕궁침범시에 궁성무기고에 있던 신식총 2천자루와 크루프포, 련발총을 깡그리 빼앗아갔고 또 각 군영의 병정들도 전부 무장해제시켰습니다.》

《아니, 저런 변 봤나?!》

덴겁한듯 한 아버지의 음성이 울렸다.

《첨 듣나요?》

수문장 김만수가 도리여 의아쩍어하며 되물었다.

《풍문에 듣긴 했어두 왜놈들이 그렇게 엄청난짓을 저지른줄은 몰랐네.》 하고 중얼거리던 엄초관은 별안간 벌컥 화를 냈다. 《아니, 명색이 궁성시위대란게 눈을 펀히 뜨고 그런 봉변을 당한단말인가!》

김만수는 한숨을 내쉬였다.

《평양진위대에서 올라온 군정들을 비롯해서 시위대군사들이야 죽기로 싸웠지요.》

《그런데는?》

《왜놈공사 오또리란놈이 칼을 뽑아들고 편전에 뛰여들어 발포중지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당장 대포로 경복궁을 짓뭉개버리겠다고 협박공갈하니 상감마마께서도 어쩔수없이… 후-》

김만수는 말끝에 또 탄식을 하였다.

《워낙 군사가 허술하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 아니겠나. 군사는 국사중의 국사이거늘…》

이렇게 뇌이는 아버지 엄형국의 음성은 눈물겹게 들렸다.

《정말 말이 아닙니다. 개항후로 렬강의 침략세력이 물밀듯이 쓸어들어오는 형세에서 조정이 응당 나라의 방비력을 튼튼히 다져야 하겠는데…》

문득 엄초관이 김만수의 말을 꺾으며 소리쳤다.

《조정은 무슨 조정, 나라의 권세를 가로챈 민가일당이지.》

김만수도 엄초관의 말을 긍정했다.

《옳습니다. 민씨들은 그간 한강하류의 인천과 부평에 포대를 쌓는 일을 하였을뿐 나라의 방비시설이나 군사를 강화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우선 군액(군인수)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어요. 경군(중앙군)인 금위영의 경우만 보더라도 정원이 약 1만 6000명이 등록되여있으나 실지 번을 드는 군인수는 극히 적고 그나마 대부분 허위문건인데 죽은 사람들이거나 군사훈련대상자도 거지반 어린이들입니다. 군사통수체계도 제대로 서있지 않아 군사훈련도 제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다른 영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잘 헌다.》

엄초관은 너무도 억이 막혀 빈정거렸다.

《군역도 엉망진창입니다. 법전에야 궁성의 수직을 서는 숙직, 순시를 하는 행순, 상감을 호위하는 시위, 수자리번을 드는 부방, 부역 등 군정들의 소임이 밝혀져있으나 지금은 다 헝클어져 경군의 군역은 궁성과 한양의 성문파수를 서거나 궁전을 다시 짓는 부역뿐입니다. 군사관청들의 재정은 또 어떤지 아십니까.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군포액은 상당하지만 세도량반들이 다 가로채고 실지 군영에 돌리는 몫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그마저 이러저러한 일에 망탕 써버려 정작 군사에 쓰는 돈이 없어요. 언젠가 상감께서 궁성에서 잔치를 차리는 돈 12만냥을 마련하는데 선혜청(수탈을 맡은 중앙관청)과 병조 그리고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과 같은 군영들에서 지출하도록 어명을 내렸지요. 그러다보니 글쎄 병기제조를 맡은 군기시에서 갑옷 13부를 만드는데 드는 몇푼 안되는 돈조차 없어서 선혜청에서 돌려쓰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군사장비를 개선강화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나라의 방비력이 이처럼 허약하니 왜놈들이 제멋대로 침탈행위를 랑자하게 저지르는것입니다.》

《죽일놈의 량반사대부들, 태평성대만 념불처럼 외우면서 술이나 처마시고 시나 읊으며 허송세월하더니 끝내 나라를 망치는구나.》

불같은 장탄식끝에 아버지가 우시는지 꺼이꺼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하여 김만수가 중얼거렸다.

《조정의 대감, 령감들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텐데.》

《그까짓 쓸개빠진 놈들을 믿을게 있나. 내가 다리병신만 되지 않았어두… 좌우지간 우리 병무를 군영에 넣어주게.》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김만수가 의논조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참, 요새 일본사람들이 교도중대라는걸 만드는데 거기에라두 넣을가요?》

《왜놈들이?…》

《우리 궁성을 저희들이 계속 파수서기가 멋적으니까 장차 조선군대로 교체하려는것 같습니다.》

《그러니 교도중대라는게 궁성시위대겠구만?》

《예.》

《거기에 넣어주게나. 제 나라 궁성이야 제 나라 병정이 지켜야지.》

웃방에서 아래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병무가 벌떡 일어나앉았다. 가슴속에서 이름할수 없는 격정이 북받치고 흉벽을 쿵쿵 두드리는 힘찬 박동소리가 제 귀에도 들리는상싶었다. 그렇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란한 때에 내가 설 자리는 병정이 되는것이다. 가슴속에 가득 고여 용솟음치는 더운 피를 나라를 지키는 길에 바치지 않고 어디에 쏟아붓는단 말인가. 천일양병이 일일용병에 있다고 10년세월 산속에서 닦은 무술도 바로 오늘같은 때에 쓰려고 키운것이 아닌가. 그리고 궁성시위대가 되여 대궐안의 파수를 서게 되면 혹여 그립고 그리운 아정이를 만나볼수도 있지 않겠는가.

병무는 더 참고 앉아있을수 없어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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