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3 장

민비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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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며칠후 수문장 김만수의 소개로 교도중대에 입대한 엄병무는 검정군복과 무라다보총을 공급받았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교도훈련을 받았다.

련병장에 정렬해선 교도중대대렬에 총을 잡고 선 병무의 몸전체에서 류다른 신심과 환희가 넘치고있었다. 대렬앞에는 중대장 현홍택, 부중대장 우범선, 교도관인 일본공사관무관 구스세 사찌히꼬중좌가 엄엄한 기색으로 서있었다.
장화를 신고 다리를 쩍 벌리고 선 구스세중좌가 일장 훈시를 하였다.

《본관은 방금 도착하였기에 조선실정에 대한 파악이 부족하다. 하지만 조선군대가 아주 렬등하고 미개하다는것만은 잘 알고있다.

보라, 천황페하의 통솔을 받는 대일본제국의 황군을! 지금 제국황군은 강군이라고 자랑하던 로대국 청나라군대를 요정내고있다. 정예의 제국황군이 이처럼 강력한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명치 15년(1883)에 제정된 군인칙유의 정신으로 무장했기때문이다. 군인칙유 본훈 제3조에는 황군군기의 진수는 오직 대원수페하를 우러러 절대복종의 숭고한 정신에 있다고 밝혀져있다.

군들도 절대복종의 숭고한 정신을 체득하라, 알겠는가!》

교도중대원들은 힘있게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구스세는 대렬을 일별하고나서 호령했다.

《그럼 제식훈련부터 시작하겠다. 》

구스세는 목을 뽑으며 구령을 쳤다.

《기오쯔께 !》

곁에 서있는 우범선부중대장이 그의 구령을 통변하느라 또 목을 뽑았다.

《기척!》

교도대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차렷자세를 취했다.

구스세가 또다시 구령을 치고 우범선이가 통변했다.

《히다리 무께 히다리!》

《우향우!》

오른쪽으로 돌아서는 교도중대.

《마에 스스메!》

《앞으로 갓!》

교도중대가 행진하기 시작했다. 팔을 한일자로 높이 쳐들고 무릎을 굽혀 높이 드는 일본식행진법이다.

병무는 이 행진에 자기 운명이 달려있기라도 한듯 신심을 기울여 열성적으로 행진하였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흘렀다.

엄병무의 뛰여난 무술실력과 성근한 복무태도는 그로 하여금 달포만에 군졸로부터 군교인 참위(소위)로 승진하게 하였다.

그동안 교도중대는 제식훈련과 사격동작 등도 하였지만 보다는 장마통에 손상된 일본군병영보수와 도로, 다리를 수선하는 부역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겼다. 그것이 끝나자 곧 궁성파수에 나가게 되였다. 조선왕궁을 조선군대들이 호위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일본의 간특한 의도밑에 꾸며진 일이였다. 그러나 교도중대는 궁성밖의 성문보초나 서고 궁궐안의 보초는 여전히 일본군대가 맡고있었다.

엄병무의 가슴은 기쁨과 흥분으로 높뛰였다. 그립고 그리운 사랑하는 아정이와 만날수 있다는 크나큰 기대로 그는 밤에 잠도 들지 못했다. 그러나 날이 흐를수록 그의 기대는 실망과 허탈로 바뀌였다. 높다란 성벽밖에 서있는 그는 성벽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지조차 알수 없었거늘 하물며 아정이의 소식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병무는 마치도 수박속은 보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두꺼운 겉껍질만 핥는듯한 기분이였다.

보름가까이 성문밖보초를 서던 병무에게도 드디여 궁궐안의 경비를 설 기회가 마련되였다. 하지만 수박겉핥기는 마찬가지였다. 녀인들이 있는 후궁에는 군대는 물론 외간남자들의 출입이 일체 금지되여있었던것이다. 그곳으로 드나들수 있는것은 오직 환관 혹은 내시라 불리우는 성기 불구자인 고자들뿐이였다.

병무는 여전히 아정이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채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였다.

어느날 그가 강녕전의 파수를 서고있는데 어린 처녀애가 그의 앞으로 지나가는것이였다. 나이는 열네댓 되였을가, 옷차림으로 보아 녀관들의 세면물을 비롯한 잔시중을 드는 녀종인 무수리같아 보였다.

저런 애와 이야기한다 해서 무슨 큰일은 없겠지 하고 생각한 병무는 나직한 소리로 그 애를 불렀다.

《얘야.》

걸음을 멈춘 무수리는 올롱한 눈으로 병무를 쳐다보았다.

《너 혹시 홍아정이란 궁녀를 모르느냐?》

무수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병무는 몸이 훅 달아올라 다그어물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

무수리는 몸을 돌리더니 손을 들어 북악산쪽을 가리켰다.

《저기.》

《어디?》

《건청궁.》

《엉?!》

병무는 진정 놀랐다. 건청궁이라면 지엄한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가 있는 곳이 아닌가?!

문득 무수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홍상궁은 날 무척 고와해요.》

《홍상궁이라니? 그가 벌써 상궁이 됐단말이냐?》

《아정 아씨는 중전마마를 모시는 특별상궁이와요.》

《뭐?》

병무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무수리에게 당부했다.

《얘야, 너 홍상궁에게 엄병무가 여기에 있다고 좀 알려주렴.》

고개를 끄덕거린 무수리는 되돌아가며 입속으로 병무의 이름을 뇌이는것이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화려한 궁녀복을 입은 아정이가 숨차게 뛰여오는것이 보였다.

아정은 분홍빛치마에 소매가 넓은 초록색원삼을 입었는데 낭자머리에는 칠보족두리를 쓰고 앞머리 량옆으로 떨잠을 꽂았으며 긴 낭자비녀에 드림댕기를 늘이고 가슴에는 녀관의 표식인 쌍봉흉배를 붙이고있었다.

병무는 아정의 차림새보다 눈에 익은 어딘가 사내아이들같은 그 인상적인 걸음새를 보는 순간 행복감으로 심장이 뚝 멎는것만 같았다.

병무를 발견한 아정이도 저쯤에서 갑자기 강직되기라도 한듯이 우뚝 멈춰서는것이였다. 그는 말없이 한동안 병무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병무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순간에 불꽃같이 확 타오르는 그 눈빛에서, 순간에 해쓱해지는 그 낯색에서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병무, 자기에 대한 아정의 사무치는 정회를 가슴깊이 느낄수 있는 다음에야.

얼마뒤 아정이가 입을 열었다.

《조반을 드셨나요?》

어느 한시 잊지 못하던 그리고 절망끝에 저승에서나 만날수 있을것처럼 치부하던 정다운 사람에 대한 인사말치고는 우스을 정도로 평범하고 례사로왔다. 그것은 마치도 10여년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아주 친한 지기에게 《어디 가니?》하고 묻는 인사말과 흡사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의 상봉은 견우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고 리몽룡과 성춘향이가 광한루에서 만난것만치나 감격스러웠음은 더 말할것 없다.

병무와 아정의 사랑의 정염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궁실법에 후궁의 녀인들이 외간남자와 만나는것은 엄격히 금지되여있지만 그런것에 구애되기에는 이들은 너무도 젊었고 그들의 정애가 너무도 뜨거웠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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