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4 장

신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1

 

푸르청청하게 높이 트인 가을하늘아래로 천년이끼오른 북악산의 바위메부리들이 머리를 추켜들었는데 마치도 그 하늘을 마중이라도 하는듯싶었다. 북악산의 바위들 짬사이에 뿌리를 박고있는 소나무들이 쏴― 솔바람을 일으키군 하였다.

정오의 따뜻한 해빛이 건청궁록원의 잔디를 어루만지고있었다. 그 잔디우에 회초리같은 나무모 두대가 놓여있었는데 민비가 아정이를 거느리고 나무모 있는데로 오고있었다.

민비와 아정은 나무모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정이가 민비에게 나무모를 가리켜보였다.

《중전마마, 이것이 어제 새로 부임해온 신임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보내온 사꾸라묘목이옵니다.》

민비는 대답없이 나무모에 눈길을 주었다. 그의 기색을 살피며 아정이가 계속 여쭈었다.

《봄이면 아지마다에 꽃이 활짝 피여 해빛을 반기다가 질 때도 한시에 화락하니 떨어진다고 하오이다.》

《그래서 왜인들이 이 나무꽃을 자기네 국화라고 하지 않느냐.》

이렇게 대척한 민비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 내심으로 신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 대한 생각을 곱씹고있었다.

(이노우에라… 강화도회담때 부사로 우리 나라에 와서 우리 대표를 강박하여 일본의 의도대로 조약을 체결했고 그 공로로 천황의 각별한 은총을 받았지. 그후에는 〈제물포조약〉, 〈한성조약〉을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내려먹인 이노우에, 일본정계의 거물인 그가 공사로 왔으니 장차…)

그의 상념을 깨뜨리며 아정이가 물었다.

《마마, 이 묘목을 어찌 하오리까?》

《묘목? … 하필이면 일본사람들의 국화를 우리 대궐안에 심는단 말이냐?》

민비가 언짢은 기색으로 이렇게 말하자 아정이가 나무모를 집어들었다.

《그럼 궁성밖에 심도록 하겠나이다.》

그러자 민비가 그를 제지시켰다.

《가만.》

주춤거리는 아정이에게 민비가 다시 의미심장하게 분부했다.

《그걸 일본공사가 자주 드나들 함화당아근에 심거라. 그러되 외따로 심지 말고 우리 소나무들밑에… 알겠느냐?》

《알겠사옵니다.》

아정이도 의미있게 대답했다.

민비는 눈길을 들어 일본공사관이 있는 남산쪽을 흐뭇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를 무시하고 직산광산을 개발한 오또리를 어디 두고보자고 이를 갈며 별렀는데 자기 뜻대로 전공사 오또리는 나떨어지고 신임공사가 새로 온것이다. 전공사 오또리는 직산금광개발과 관련하여 조선정부를 완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취한 자신의 경거망동으로 하여 운명이 비참하게 끝장나고말았다. 조선정부, 특히 총리 김홍집의 강력한 항의에 일본정부는 가뜩이나 무능하다고 질시하고있던 오또리를 조선공사직에서, 정계에서 제거해치웠던것이다.

(지금쯤은 외무대신이 이노우에공사를 영접하고있겠지. 그가 와야 이노우에가 우리 나라에 온 의도를 알수 있겠는데…)

 

이 시각 외무대신 김윤식은 자기 집무실에서 일본신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접견하고있었다.

유럽식의 검은 연미복으로 쭉 차려입은 이노우에가 김윤식의 앞을 거닐며 오만하게 지껄였다.

《우리 일본은 지금 청국과 교전중이여서 국사가 매우 다난한 때이지만 총리서리에 내무대신의 요직에 있던 본관이 특별히 주조공사로 부임된것은 조선문제를 중요시하는 천황페하의 각별한 관심에 의한것입니다.》

이노우에는 문득 발길을 멈추더니 예리한 눈길로 김윤식을 응시하였다.

《예.》

김윤식은 이노우에의 그 사무러운 눈빛과 얼굴의 험상궂은 칼자리가 끔찍하여 줄곧 외면하고있었다.

이노우에가 다시 건방진 걸음을 옮겼다.

외무대신의 집무실에는 가을철의 밝은 아침볕발이 창문으로 비쳐들고있었다. 그래서 방안을 거니는 이노우에의 몸은 어떤 때는 상체가 빛발속에, 하체가 그늘에 가리우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얼굴과 상체가 그늘속에, 하체가 밝음속에 드러나기도 했는데 이런 변화의 교체는 늙은 김윤식으로 하여금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였다.

《본관이 〈강화도조약〉교섭이후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있기때문에 이번에 모든 부문의 조정을 위임받은것인즉 조선정부도 본관을 지금까지의 공사들과 동일시하지 말고 아무 일이나 기탄없이 토의해주기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국왕전하에 대해서도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의례적이 아닌 내적접견을 받을수 있도록 전달해주기 바랍니다.》

이노우에가 다시 발길을 멈추었다.

《알겠습니다.》

김윤식의 대답을 듣고야 또다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한 이노우에는 그 무슨 연설을 하는듯 한 발언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제 국왕전하께 신임장을 봉정할 때에는 왕비전하도 참석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노우에의 신사연한 건방진 자세와 자화자찬격의 오만한 말투가 따분하고 지루하여 역겨움을 품고있던 김윤식은 이 면담이 한시바삐 끝나기만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방금 말한 이노우에의 너무도 무엄하고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불끈해진 김윤식은 서늘한 눈길로 그를 직시하며 한마디 내뱉았다.

《그건 곤난하오.》

《곤난하다? …》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리며 이노우에는 얼굴의 상처자리를 매만졌다.

《우리 나라의 왕실법에 외국사신의 접견시 왕비전하는 동석하지 않기로 되여있소.》

이노우에는 이렇게 대척하는 김윤식을 마뜩잖게 쏘아보며 뇌까렸다.

《그래서 본관을 지금까지의 공사들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요구한게 아닙니까?》

《아무튼 상주는 해보겠습니다.》

김윤식이가 이처럼 타협조로 나오니 이노우에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주시오.》

이노우에가 신임장봉정때 민비의 참석을 강력히 요구한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제국정부에서 이또총리며 무쯔외상 등이 조선공사 오또리 게이스께의 갱질문제를 두고 의논이 분분하였지만 적합한 대상자가 없어 부심하고있을 때 돌연 내무상 이노우에가 자진하여 나섰다.

너무도 의외의 일이라 이또총리와 무쯔외상은 깜짝 놀라 말도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총리서리까지 한 내무대신의 요직에 있는 그가 한갖 외국공사를 자진한다는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때문이였다. 무쯔는 내무상각하의 미거를 정부요료가, 온 국민이 흠복하여마지않을것이라고 열띤 소리로 찬양하기까지 하였다. 이또도 이제는 마음이 놓인다고, 조선에 정통한 이노우에 자네가 직접 팔을 걷고 나섰으니 말일세 하고 감동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때 이노우에는 야심찬 웃음을 머금고있었을뿐이다. 바로 그 야심, 야마도족의 숙원인 조선정복에서 첫 쇄국의 장벽을 뚫은 자기, 이노우에가 조선정복의 끝장을 보는데서도 결정적역할을 함으로써 일본의 민족적영웅으로, 력사적인물로 되려는 야심밑에 내무상직도 내버리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것이다. 그는 조선정복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서는 조선의 실제적통치자인 민왕후를 빨리 자기 손에 거머쥐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면 조선정계에 발을 들여놓는 첫순간부터, 다시말해 신임장봉정식때부터 그 녀인이 자기 이노우에의 의사에 따르도록 해야겠다고 작정하였던것이다.

마차를 타고 공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노우에는 동행한 스기무라서기관에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어떤가? 조선왕비가 참석할것 같은가?》

스기무라의 대답은 애매하였다.

《글쎄요. 민비가 접견을 허락한 외국인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밖에 없습니다.》

《미국서기관?》

《알렌서기관에 대한 민비의 신임은 각별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노우에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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