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4 장
신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4
달도 없는 캄캄한 밤거리로 검은 옷에 복면을 한 두 사나이가 걸음을 다그치고있었다. 갑자기 울리는 말발굽소리에 그들은 재빨리 곁의 집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홰불을 든 일본군 세 기마순찰병이 말을 달려 지나가자 사나이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법무협판 김학우의 집에 당도한 그들은 사위를 살피고나서 기와를 얹은 담장을 훌떡 뛰여넘었다. 불빛이 밝은 사랑방쪽으로 발을 저겨디디며 다가간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루에 올라서서 방안의 동정을 엿보았다.
초불이 휘황한 방안에서 술판이 벌어지고있었다. 그런데 상좌에 앉은것은 주인인 김학우가 아니라 금릉위 박영효였다. 그를 중심으로 김학우, 신응희, 리규완, 정란교들이 둘러앉아있었다.
청회색비단바지저고리에 호박단조끼를 입은 김학우가 팔을 휘저으며 기염을 토하였다.
《아, 이제는 이 땅에서 청국군대가 다 쫓겨가고 일본세상이 되였는데 왜 아직도 우리가 이 모양으로 있어야 하는지 까닭을 모르겠소.》
박영효가 웃사람답게 그를 점잖게 타일렀다.
《아직은 대원위대감이 조정을 좌우지하고있으니 좀 참아야지.》
《아, 그까짓 고목이야 넘어뜨려버리면 될게 아니요?》
《그러면 민중전이 또 나설게 아닌가?》
그러자 차력군인 박영효의 심복 리규완이가 손을 내저었다.
《내무대신인 이노우에각하가 조선공사로 부임해올 때야 무슨 큰 변화가 있을게 아닙니까? 어르신네들이야 어련히 대신 한자리씩은 차지하게 될텐데 무슨 걱정이시오. 그때에 가서 이 규완이 같은 사람을 잊지들이나 마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내 술을 쳐드리리다.》
리규완은 량손으로 술병을 들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마루우에서 방안의 광경을 지켜보던 두 사나이의 눈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한 사나이의 얼굴에는 이놈들의 술판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군 하는 뜻이 씌여있었고 다른 사나이의 낯에는 그래도 끝날 때가 있겠지 하는 뜻이 어려있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두 괴한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며 지어 말조차 하지 않고 눈짓과 손짓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한식경이 지나 드디여 술판이 끝나고 박영효네가 밖으로 나왔다.
김학우는 대문가에 서서 그들을 바래주었다.
《밤길에 잘 살펴가시우.》
대문에 빗장을 지른 김학우는 사랑방쪽으로 만족스러운 걸음을 옮기였다. 그는 잠간 걸음을 멈추더니 끅- 트림을 하였다.
이 순간 복면한 두 괴한이 그에게 욱 달려들었다. 한 사나이가 그의 턱끝에 강철빛이 번뜩이는 칼을 들이댔다.
《엉?!》
김학우의 두눈이 겁기로 대뜸 커지고 전률하듯 온몸을 떨었다.
가슴에 칼을 받은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 나떨어지고말았다.
한 사나이가 자, 이제는 빨리! 하는 뜻으로 대문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다른 사나이가 그를 급히 제지시키며 그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꾹 꾹 눌렀다. 그제야 빨리 뛰자고 하던 사나이도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그것은 《그렇지, 그걸 잊을번했군.》하고 말하는상싶었다. 그는 품속에서 접은 종이장을 꺼내여 펴더니 죽어넘어진 김학우의 조끼앞섶에 《토적토왜》라고 쓴 종이장을 꾹 끼워놓았다.
창밖에선 동살이 퍼지고있었다. 돋을 볕은 이노우에집무실의 벽체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여놓았다.
오까모도가 평양에서 가져온 대원군의 편지를 본 이노우에는 책상을 꽝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런 중요정보를 홀시하다니, 밥통같은것들!》
《각하, 죄송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이노우에를 바라보는 스기무라의 눈에는 경탄과 경의의 빛이 흐르고있었다.
이노우에는 오까모도가 문건을 가지고 평양을 떠났다는 통보를 받은 어제저녁부터 온밤 눈 한번 붙이지 않고 그를 기다렸던것이다. 그러다보니 그가 드팀없는 일과로 지켜온 새벽 랭수욕도 하지 못하고말았다. 오까모도는 방금전에 당도했는데 얼마나 말을 때려몰았는지 오까모도도 군마도 둘다 땀을 즐벅히 흘린채 쓰러지고말았다. 게다가 오까모도의 머리에는 피가 내배인 흰 헝겊이 동여매여있었다. 서흥고개를 지날때 동학군의 습격을 받았는데 자기를 호위하던 군조는 죽고 자기도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 하였다는것이였다.
이노우에는 군조나 오까모도의 생사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듯 대원군의 편지를 가져왔는가고 따져물었다.
《여기…》
오까모도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주자 그제야 이노우에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됐다! 오까모도, 장하오!》
이노우에는 편지 든 손으로 뒤짐을 진채 방안을 성급히 거닐었다. 편지장이 꼬리처럼 뒤에서 너풀거렸다.
《요시! 우리 일본과 공수동맹을 맺고도 계속 청국과 두길보기를 했단 말이지.》
씹어뱉듯 이렇게 뇌까린 이노우에는 한문으로 씌여진 대원군의 서한을 스기무라에게 넘겨주었다.
《읽어보라.》
스기무라는 서한에 눈길을 주었다.
민병석관찰사 앞
일본군의 압박으로 나라가 위태로우니 청군이 속히 와서 일본군을 소탕해주기를 바람.…
갑오년 7월 28일 대원군
눈을 쪼프린 이노우에가 스기무라에게 물었다.
《어떤가?》
《말이 나가지 않습니다.》
스기무라는 어이없어하는 인상이였다.
《이런 음흉한 대원군은 당장 제거해버려야 하네.》
이노우에는 눈을 희번뜩이며 고아댔다.
《하긴 친청파인 민씨척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입궐시킨 대원군이니 이제야…》
뒤짐을 지고 다시 방안을 오락가락하던 이노우에가 스기무라앞에 멈춰서며 언명했다.
《당장 총리대신이하 조선정부의 대신들을 호출하라!》
《하!》
해가 장바 한기장쯤 솟아올랐을 때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집무실에 불리여온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을 비롯한 조선정부의 대신들은 돌려가며 대원군의 서한을 보고있었다.
사무러운 눈초리로 난처해하는 그들의 기색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이노우에가 시까스르듯 뇌까렸다.
《이 편지는 평양성의 청군을 격파한 우리 제1군
의혹과 놀라움의 눈길을 서로 주고받는 대신들에게 이노우에는 위압적으로 계속 뇌까렸다. 그는 대원군의 서한에 청국병의 대부대가 계속 해서 온다고 하니 이는 실로 조선을 바로잡을수 있는 시기라느니, 혹은 일본에 붙어서 나라를 파는 무리가 서두르고있으니 이 뜻을 청국진영에 호소해주기 바란다느니 하는따위의 배신적인 구절들도 있다고 하면서 조선정부의 대신들을 힐책하였다.
조선정부의 대신들이 차마 그럴수가 있겠느냐는듯이 짐짓 의혹을 표시하자 랭소를 띠우고 그들을 바라보던 이노우에가 명함장을 집어보였다.
《자, 이것은 청군장수에게 전달해달라는 대원군의 본명을 쓴 명함장입니다.》
대신들은 《리하응》이라고 쓴 명함장에 시선을 박았다.
이노우에가 계속 열띤 소리로 뇌까렸다.
《보시는바와 같이 대원군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우리 일본의 호의를 배신하였습니다. 대원군뿐아니라 국왕부부 역시 류사한 서한을 청국군에 보낸 사실을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대신들은 다시금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노우에는 얼굴의 험상궂은 칼자욱을 쓸어만지며 야멸차게 뇌까렸다.
《각하들도 어제 밤에 법무협판 김학우가 암살당한 사실을 알고있겠지요. 김협판은 우리 일본에 충실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를 제일 미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내가 말하지 않아도 각하들은 짐작할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김학우의 암살사건이 그 어떤 사사로운 살해사건이 아니라 우리 일본을 겨냥한 정치적사건이라는데 있습니다. 자, 이걸 보시오.》
이렇게 말한 이노우에는 자기 집무탁우에 놓여있던 종이장을 쳐들어 흔들며 웨쳐댔다.
《이 삐라는 김학우의 암살자들이 그의 시체에 붙여놓은것입니다. <토적토왜>,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김학우의 암살자가 배일 내지 반일분자라는것을 명약관화하게 말해줍니다. 어쨌든 제반 사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해 모든것을 다하고있는 일본에 배신적이고 도전적인 대원군 리하응을 계속 집정의 자리에 둘수 없다는것입니다.》
대신들은 고개를 수그린채 묵묵부답이였다.
이해 10월 25일(음력)부관보에는 지난 6월 22일(음력)이래 대원군에게 부여되였던 권한을 거두어들인다는 국왕의 전교가 공포되였다. 이렇게 하여 대원군의 제3차 집권도 그의 성격이나 정치적경력과는 정반대로 일제의 정략에 우롱당하기만 하고 불과 4개월만에 끝나고말았다.
신흥군국주의 일본은 조선사람으로 자기의 주견을 가지고 행세하려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자기들의 침략의 편의를 위해 잠시 리용했다가는 그 목적을 수행한 뒤에는 가차없이 거세하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