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4 장
신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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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비는 함화당으로부터 자기의 처소인 건청궁 옥호루로 돌아왔으나 이노우에한테서 받은 굴욕감을 삭일수 없어 입을 옥물고있었다.
이리를 피하니 범을 만난다고 조폭한 오또리공사가 없어져 한시름 놓게 됐다고 여겼는데 신임공사 이노우에는 오또리보다 더 포악한 인물이 아닌가. 오는 놈마다 개개명관이라고 어쩌면 우리 나라에 오는 공사들이란 한결같이 광패스럽고 녕독스러운 놈들뿐인가. 이런 심뇌에 잠겨있던 민비의 뇌리에 불시에 일본놈들이 어떻게 자기가 서태후에게 생일선물을 보낸 내용까지 다 알고있을가 하는 생각이 갈마쳤다. 그놈들의 귀에 들어갈가봐 얼마나 비밀리에 진행한 일이였다고…
그는 아무리해도 이 의혹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혹시 내 측근에 왜놈들과 통하는 간세(간첩)가 있는것이나 아닐가.
하지만 린방인 청국의 서태후에게 생일선물을 보낸것이 무슨 큰 일이란 말인가. 청국과 전쟁을 하는것이야 일본이지 어디 우리인가.
아무튼 이날 민비는 심중이 복잡하고 기분이 언짢고 괴로왔다. 왜놈들때문에 매일과 같이 당하는 이 심적고통을 언제까지 겪고있어야 하겠는지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문득 일본인들이 자기 민비를 죽이려 하니 신변을 각별히 주의하라고 하던 나쯔미에게서 들은 말이 머리속에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섬찍해졌다. 왜놈들이란 철면피하고 잔인하고 악독한 족속들이라 자기 하나쯤 죽이는것을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 한마리 죽이는것으로 여길수도 있었다. 아무튼 조심하자,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 머리를 숙여도 왜놈들한테만은 절대로 수그러들지 말자.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곁으로 다가온 고종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위무했다.
《곤전, 참으시오.》
《참아야지요. 별수 있습니까? 하지만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눈에 피물내게 된다는 말을 이노우에도 알게 될겁니다.》
하면서도 민비의 눈귀에서는 다시 분노의 눈물이 끓고 두줄기 눈물이 백자기같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윽고 민비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독기서린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달도 차면 기울고 모든것이 성하면 쇠하기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일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지만 그들도 망하는 날이 꼭 있을것입니다. 그날을 보기 위해서도 내 이를 사려물고 참겠으니 전하께서는 너무 성려치 마십시오.》
《고맙소, 곤전.》
고종은 민비의 희고 작은 손을 자기의 두손으로 꼭 잡았다.
이때 합문밖에서 군무대신 조희연대감이 대령했다고 아뢰는 소리가 울렸다.
《뭐, 조희연?…》
고종이 친일파인 조희연이 이런때 나타난 사실에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민비에게 눈길을 주었다. 민비는 고종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소매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눈물자욱을 닦았다.
피둥피둥 살찐 몸에 얼굴이 유들유들한 조희연이 방으로 들어와 고종과 민비앞에 부복하였다.
《웬일이냐?》
고종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희연은 고개를 쳐들고 황급히 아뢰였다.
《전하, 지금 이노우에각하의 명령으로 서울주둔 일본군려단이 왕궁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고있사옵니다.》
《뭣이?!》
《무어라?!》
고종과 민비는 깜짝 놀라 서로 마주 쳐다보기만 하였다. 수그린 이마너머로 고종과 민비의 기색을 흘끔흘끔 살피던 조희연이 물러간 후 자리에서 움쭉 일어선 고종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민비에게 물었다.
《곤전, 어쨌으면 좋겠소?》
민비는 벽의 어느 한점을 쏘아보며 내뱉았다.
《천하에 불법무도하고 후안무치한…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저 왜국을 경계한 까닭이 가슴사무치도록 아니, 뼈가 저리도록 깨우쳐집니다.》
《아니 곤전, 당장 정수리에 불이 떨어지게 됐는데…》
그러나 민비는 아무 대꾸없이 여전히 앞의 한점만을 응시할뿐이다.
《허참.》
이노우에를 욕하는 소린지 민비를 탓하는 소린지 까닭모를 소리를 한마디 내던진 고종은 소매를 털며 편전에서 나가버렸다.
열려진 창문너머 뜨락에서 불안스레 갈팡질팡하며 종종걸음치는 궁녀들이 내다보였다. 눈을 간잔조롬히 뜨고 생각에 옴해있던 민비는 이윽고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서가에서 중국고전소설인 《금병매》를 뽑아들고 돌아와 다시 보료우에 앉으며 서탁우에 그것을 펼쳐놓았다.
이때 방으로 들어온 조상궁이 민비앞에 부복하며 간청했다.
《중전마마, 여름때처럼 왜인들이 당장 궁성으로 쳐들어온다는데 어서 옥체를 피신하옵소서.》
민비는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쌀쌀하게 뇌였다.
《설레지들 말고 제 할 일들이나 하라구 해라.》
조상궁은 다시금 애원했다.
《중전마마!…》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버럭 어성을 높이는 민비의 말에 조상궁은 입도 벌리지 못한채 급기야 편전에서 물러났다.
온 궁성안이 불안속에 모대기였으나 오직 민비만은 태연자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