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4 장
신임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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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녁 어슴녘에 수심과 불안과 초조감에 잠긴 고종이 다시 민비를 찾아왔다.
와룡초대에 초불을 붙이고있던 조상궁이 얼른 자리를 피하자 고종은 민비에게 짜증을 부렸다.
《곤전, 어쩌자고 네 협판을 임명해서 란을 겪게 만들었소?》
《했기에 이노우에란 사람의 진속을 알수 있지 않았습니까?》
민비는 침착하고도 진중한 태도로 대꾸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정권은 일원에서 발해야 한다느니, 국왕의 친재권을 회복시킨다느니 하는 이노우에의 수작은 죄다 새빨간 거짓말이옵니다. 그들 왜인들의 진속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주권을 빼앗고 우리의 삼천리근역과 천여만창생을 저들의 손아귀에 거머쥐자는것이옵니다. 상감마마, 부디 통속하옵소서.》
이렇게 하소하는 민비의 눈굽에서 또다시 비분의 눈물이 끓었다. 그는 이노우에와 같은 왜인들에게 수모를 당하는것이 참으로 뼈가 저리도록 통분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이번의 내알현을 통해서 왜인들에게 그 어떤 기대도 걸어서는 안된다는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다. 민비의 가슴에 못을 박은 이노우에도, 가슴에 못을 박히운 민비도 이제는 서로 상대방을 더욱 똑똑히 알게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민비의 말뜻을 미처 다 리해하지 못한 고종은 두덜거렸다.
《당장 란이 일어나겠는데 그런 말이나 하고있을새가 있소?》
《란이라니요?》
《아니 곤전, 왜군들이 대궐을 습격한다는 소릴 듣지 못했소?》
《호호…》
민비는 불현듯 즐겁게 웃어댔다. 고종은 그러는 민비를 어처구니없어하며 지청구했다.
《웃을 경황이 다 있구. 허참…》
민비의 표정이 정색해졌다.
《상감마마, 이노우에는 결코 오또리처럼 미련한짓을 하지 않아요. 그는 더 교활하고 로회한자입니다. 일본정계의 거물이라는 그가 무엇때문에 남의 전철을 밟겠소옵니까. 지금 우리를 놀래우느라 그러는겁니다.》
《그럴가?》
고종은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였다.
《마음놓으세요, 상감마마. 하지만 강약이 부동이라고 힘이 약한 우리가 그의 기분을 맞춰주어야 하옵니다.》
《어떻게?》
《우선 네 협판을 임명한데 대해 사과하는 한편 새 정부에 그들이 추천하는 박영효와 서광범을 기용하도록 합시다. 이노우에의 요구를 들어줍시다. 그러면 가뜩이나 우월감에 차있는 그가 만족해할것이 아니옵니까? 교만과 자고자대, 이것이 바로 그의 특징이며 약점입니다. 이 약점을 리용해야 하옵니다.》
《그러면 그가 순순해질가?》
《영낙없소옵니다. 두고보십시오. 그러자면 상감마마께서 먼저 그에게 내알현을 요청해야 하옵니다.》
고종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국의 군주가 한갖 공사에게 알현을 요청한다?…》
《전하, 개구리가 움츠리는것은 더 멀리 뛰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합문밖에서 궁녀들이 아뢰는 소리가 울렸다.
《아뢰오. 군무대신 조희연대감이 대령하였나이다.》
《군무대신이 또?》
고종이 의혹과 불안이 깃든 표정으로 민비를 돌아보았다.
민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신첩이 불렀소옵니다.》
《그러니 곤전은 벌써…》
이노우에가 공사관 정원에 심은 사꾸라나무에 물을 주고있는데 정문으로 뛰여들어온 구스세중좌가 이노우에앞에 멈춰서더니 장화뒤축을 딱 소리나게 붙이며 보고하였다.
《공사각하, 서울주둔대대들의 왕궁습격출동준비가 완료되였음을 보고합니다.》
씩씩하게 보고한 구스세는 좀 가라진 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습격시간을?…》
이노우에가 그의 말을 중둥무이시켰다.
《중좌, 당신은 외교관생활이나 혹은 외국려행을 한적이 있소?》
구스세는 어줍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럴수밖에 없지. 자넨 지금 군복을 입고있어도 외교관이란 말이요. 현역군인이 아닌 공사관무관, 다시말해 정치가란 말이요. 군복쟁이는 원래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지만 외교단무관인 당신은 정치가가 되여야 하오. 그래 정치가로서 생각해보시오. 오또리공사의 전철을 내가 밟을것 같소?》
구스세의 낯은 벌거우리해졌다.
《알겠습니다, 공사각하! 그러니 위공작전이였군요.》
《이제야 자네의 머리가 도는구만.》
이노우에는 구스세를 데리고 현관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스기무라서기관이 조선정부에서 온 조희연군무대신을 만나고있는데 무슨 소식이 있을게요.》
공사의 집무실로 들어온 이노우에와 구스세가 방금 의자에 몸을 붙이는데 스기무라가 웃는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공사각하, 조선정부가 아니, 민왕후가 우리의 요구를 다 수락했습니다. 박영효, 서광범의 입각은 물론 우리 고문관의 채용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이노우에는 방구석으로 다가가 바께쯔의 물에 손을 씻더니 바지뒤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손을 닦았다.
스기무라가 아첨기어린 소리로 계속 뇌까렸다.
《일본군을 입성시키겠다는 각하의 일성이 경복궁을 뿌리채 뒤흔들어놓았습니다, 하하.》
《하하, 정말 그렇습니다.》
구스세중좌도 스기무라와 함께 통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창문쪽으로 다가가더니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나직이 시 한수를 외웠다.
옛 차실집에도 봄이 왔네
사꾸라와 함께 꽃피듯 열려지는가
옮겨온 차실집도 무사시노
무사시노의 사꾸라처럼 물들여지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