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5 장
토왜구국의 기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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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이 창의소로 정한 농가굴뚝에서 연기가 꾸역꾸역 솟아오르고있었다.
여러컬레의 신발이 널려있는 토방앞에 다가선 태봉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문이 열리며 전봉준의 준수한 얼굴이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태봉이가?!》
전봉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선생님, 그간…》
태봉이 허리를 숙이는데 벌써 버선발로 뛰여나온 전봉준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에 들어선 태봉은 여러 두령들에게 모두절을 했다.
《자, 어서 앉으라구.》
최경선이 이렇게 권하자 태봉은 문가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래 갔던 일은 어찌 되였나?》
최경선이 물었다. 태봉은 고개를 숙이며 대꾸했다.
《저, 양총 스무자루에 칼, 창을 수두룩이 지고왔습니다.》
태봉은 획득한 무기의 수량이 적힌 종이장을 최경선에게 내밀었다.
전봉준이 태봉이에게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상한 사람은 없고?》
《예.》
방안사람들속에서 일시에 찬탄과 경탄의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태봉이, 장하다. 장해!》
손화중이 태봉이에게 신뢰어린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데 김개남은 태봉의 어깨를 어루쓸며 중얼거렸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가 태봉이 같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들의 칭찬이 거북상스러워 태봉은 자리를 일려고 했다.
《그럼 전…》
전봉준이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아니, 그냥 앉아있게. 지금 앞일을 의논하던중일세.》
태봉이에게 친근하게 말한 전봉준은 신중한 낯색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오늘 태봉이도 숱한 병쟁기를 구해왔지만 우리가 왜놈들과 싸우자면 뭐니뭐니해도 무기가 든든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포에 양총으로 신식무장을 한 왜놈들에게 맨손으로 접어들수야 없지 않는가.
최경선이가 지난 전주화의이후 우리 군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무기들을 줴버린것이 큰 잘못이였다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새로 병쟁기를 갖추기 위해 고생하지 않을게 아닌가고 자책에 잠겨 말하였다.
전봉준이도 심각한 기색으로 자기 잘못이 크다고 반성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지간히 무장을 갖춘 조건에서 놈들과 싸우면서 놈들의 무기를 더 빼앗아내야 하겠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전봉준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다시 싸움에 일떠서지 않으면 안되게 된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처음 우리가 전주화의에 응하면서 기대한것은 두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거류민보호를 구실로 기여든 왜적들의 출병구실을 없앰으로써 놈들을 물러가도록 하자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조정의 권세가들이 그래도 백성들의 처지를 고려하여 페정을 개혁해주리라는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너무도 순박하고 어리석었습니다. 사태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더욱 엄중해지고있습니다. 간악한 왜적들은 우리의 정화로 출병구실이 없어지게 되자 이번에는 <내정개혁>을 들고나왔고 마침내는 무력을 동원하여 남의 나라 왕궁까지 강도적으로 습격점령하고 왕궁의 보물들을 훔쳐냈으며 조선군대의 무장까지 해제시키는 횡포무도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뿐만아니라 왜놈들은 우리 나라에서 청국과의 전쟁까지 벌림으로써 우리의 산천을 황페화시켰습니다. 이제는 왜놈들의 흉심이 무엇인가를 누구나 똑똑히 알게 되였습니다.
놈들은 이 땅을 저들의 땅으로 만들고 우리 천여만 생령을 저들의 어육으로 만들자는것입니다. 실로 우리 배달민족앞에는 엄중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우리는 강도 왜놈들을 이 땅에서 내몰기 위해 한몸바쳐 싸우느냐 아니면 망국노가 되여 치욕을 당하느냐 하는 생사존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아!-》
전봉준은 불같은 한숨을 토했다. 그의 말은 비감으로 떨렸고 그의 얼굴은 비장한 각오로 불타고있었다.
전주화의 이후 일본침략자들의 횡포무도한 침략행위와 통치배들의 매국배족적배신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된 엄중한 민족적위기는 애국적인 농민군으로 하여금 구국성전에 떨쳐나서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그간 남원 순창일대를 순회하면서 정세를 예리하게 살펴오던 전봉준은 나라에 닥친 절박한 위기를 절감하고 또다시 거족적인 투쟁을 벌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7~8월말경에 태인의 고향집에 들렸다가 9월 중순 다시 싸움의 길에 올라 원평을 거쳐 삼례에 이르렀다. 그때 이곳에 집결된 농민군의 수는 약 4000명에 달하였다.
삼례에 투쟁본부를 정한 전봉준은 다시 농민전쟁을 일으킬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던것이다.
이윽하여 가슴속의 격정을 묵새긴 전봉준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 이번 거사를 앞두고 꼭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리 남접과 북접의 련합을 실현하는것입니다. 사실말이지 지난 거사때도 북접이 호응해나섰더라면 좀더 큰일을 할수 있었는데 북접이 응하지 않아 우리 호남만으로 싸우다보니 손실이 많았소이다. 허나 이번엔 절대 그래선 안됩니다.》
동학에서는 삼례에 모인 농민군은 호남의 동학조직이라는 뜻에서 남접의 폭동군이라고 하였고 충청도의 청산에 모인 농민군은 호서의 동학조직이라는 뜻에서 북접의 폭동군이라고 하였다.
손화중이가 우려하는 기색으로 전봉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호서의 동학군을 이끈다는 교주 최해월선생이 싸움을 반대해나서니 문제가 아니웨까?》
전봉준은 손화중을 마주 바라보며 침착하게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먼저번 거사때는 우리가 여러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지만 이번은 오로지 토왜구국, 다시말해 왜놈들을 치고 나라를 구원하자는 한가지 기치뿐이니 그도 외면하지 않을거외다.
세번째로 이번 거사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것은 모든 반일세력들을 모두 우리 편으로 끌어당기는것입니다. 지난 임진왜란때도 전체 조선사람들이, 관민이 일떠나 싸워 끝끝내 왜놈들을 내몰지 않았습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좌중이 설레였다.
이때 부엌문이 열리며 주인할머니의 웃음어린 소리가 울렸다.
《아니, 조반들은 자시지 않고 의논들만 하시려우?》
손화중이 호걸스럽게 웃으며 대척했다.
《허허, 금강산구경두 식후경이라는데 싸움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주인할멈, 감투밥을 듬뿍듬뿍 담아 들여보내주시우.》
《전대장, 손대장, 여러 대장들을 위해 오늘은 소고기국까지 끓였수다.》
모두 벙글거리며 길다란 목로상에 다가앉았다.
삼례에서 타오른 토왜구국의 봉화는 삽시에 료원의 불길마냥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전봉준의 호소에 따라 전주, 고창, 태인, 남원, 금구, 련광, 정읍, 고부를 비롯한 전라도 각지로부터 또다시 투쟁에 일떠선 농민군부대들이 홍수처럼 삼례로 밀려들었다. 이무렵 충청도의 청산에는 청주, 서산, 릉주, 안면도, 공주, 충주, 보은, 괴산, 황간, 안성, 수원, 지평, 이천, 통천, 원주, 횡성 등 충청, 경기, 강원도일대에서 모여온 농민군들이 집결하여있었다. 이 시기 구국항쟁의 불길은 대구, 성주, 함양, 거창, 해주, 재령, 안악, 장연, 평양, 영유 등지를 비롯한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그리고 이 시기 반일투쟁에는 농민뿐만아니라 각계각층, 지어 일부 애국적인 량반들과 유생들, 아전, 관군도 참가한 실로 그전시기에 볼수 없었던 거족적인 구국항쟁이였다.
더우기 전봉준의 꾸준한 노력으로 남북접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북접의 농민군에도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의 참전명령이 내리였다. 그러나 북접두령 손병희가 군사들을 이끌고 10월 20일 충청도 론산에 와서 전봉준의 부대와 합세하기까지는 또 한달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