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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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침묵이 흘렀다. 그것은 둘사이에 심연을 깊이 파놓은듯 한 오랜 침묵이였다.
장원은 문득 이마를 스치는 선뜩한 기운에 얼굴을 들었다.
형이 영악한 짐승처럼 독기를 내뿜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있었다. 그는 두손을 앞으로 내밀며 기진한듯 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너 나를 뭘로 아느냐?》
이런 무서운 자존심의 발작에 장원은 가슴이 움츠러들었으나 속에 있는 말을 다 내뿜었다.
《살아보자고 순사놈들까지 끌어들여 술대접을 하는 형이 나는 정말 루추하게 여겨지오. 그런다구 놈들이 은총을 베풀것 같소? 서완오놈이 이 면에서만도 몇몇 가정을 짓밟아버렸소? 왜놈이나 지주놈이나 순사나부랭이들이나 다 같은 배속들이란 말이요. 조선사람은 누구나 형처럼 살아서는 안되우. 그건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요. 작두밑에 목을 들이미는 격이란 말이요.》
《이 마당에 와서 나를 가르치려들지 말라!》
《형, 왜 그렇게 눈이 어두워졌소? 왜 세상이 움직여가는걸 보지 못하우? 이놈 세상이 오래 갈것 같소? 여기서 유격근거지가 륙칠십리길이요. 언제 유격대가 쳐나올지 모르오! 그때에 가서 저놈들과 가지런히 서서 개죽음을 당하고싶소?》
《네가 눈이 멀었다. 라남에만 가봐라! 그 강한 일본군을 무슨 수로 당해낸다더냐?》
《형은 왜놈만 무섭구 날로 강세를 취하는 저 항일유격대는 무섭지 않소? 여기서 라남이 더 가깝소, 유격근거지가 더 가깝소?
멀지 않았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무지한것들이 퍼뜨린 미신같은 풍설에 떠서… 어리석게 굴지 말아!》
《풍설이 아니요! 미신이 아니요!》
전장원은 다음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근기있고 겸손하고 무던하지만 일단 화가 동하면 성난 황소처럼 분별이 없어지는 그였다.
《내가 왕재산에서 직접 들었소!
순식간에 방안공기가 얼어붙은듯 했다. 얼굴에서 피기가 가시여진 전수원은 몸을 뒤로 젖히며 벽에 등을 맥없이 기대였다. 그의 크게 뜬 눈에서 새까만 동자가 바르르 떠는듯 하였다. 이그러지며 푸들거리는 입술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아- 너였구나.…》
그는 넋이 빠진듯 천정을 쳐다보며 헛소리를 쳤다.
《네가… 네가… 너였단 말이지. 면장 동생이…》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번들거리고 눈에서는 흰자위만 보였다. 전장원은 그의 팔을 잡아흔들었다.
《형! 형! 왜 이러시우?》
이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래우에 검은 제복을 입은자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방안에 들어섰다. 눌러쓴 제모채양밑에서 살기를 뿜는 눈, 코밑수염에 어리는 차거운 미소… 밖에서도 다급한 발자욱소리들이 울리고 독같은것이 와지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최순사를 알아본 장원은 소스라쳐 놀라 뛰여일어났다.
《면장 동생이 왕재산사건관계자라니 참 유감스러운 일인데?》
장원은 자기에게로 매달리는 형을 밀어던지고 등불을 훅 불어 껐다… 전수원이 정신을 차렸을 때 문짝이 떨어져나간 방문으로는 푸른 달빛이 쏟아져들어오고 어딘가 먼곳에서 개짖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방바닥에는 엎어진 책상이며 종이장들, 옷가지들이 널렸고 그우에 흩어진 유리쪼각들이 달빛을 차겁게 반사하였다.
장원은 격투끝에 잡혀가고 자기만이 란장판이 된 방바닥에 쓰러져있다는 이 엄혹한 현실이 악몽속의 일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유리쪼각들이며 옷가지들을 쓸어만져보았다. 동생이 잡혀가고 모든것이 끝장이 난것은 부정할수 없는 현실이였다.
최순사일당이 밖에 잠복해있다가 왕재산에서
이제는 자기 운명도 다 되였다고 생각하니 몸을 움직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가까스로 벽에 기대여앉아 이마에서 끈적거리는것을 손바닥으로 씻으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전수원은 동생을 설복하여 돌려세움으로써 그도 자기도 위기에서 벗어나자고 찾아왔었다. 그런데 이런 벼락이 내려질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무서운 절망감때문에 자기의 충고를 외면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 이런 재난을 가져온 장원에 대한 원망이나 미행한 순사놈들에 대한 저주도 생기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벽에 붙이고 허망한 눈으로 차거운 달빛이 쏟아져내리는 바깥하늘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푸른 물기가 번들거렸다.
이제는 틀림없이 악형을 당하게 되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를 동생에 대한 련민의 정이 가슴에 젖어들었다.
문득 날카로운 의혹이 그의 가슴을 선뜩 찔렀다.
(장원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가? 내가 순사들을 밖에 매복시켜놓고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않을가?)
최순사가 방에 들어설 때 자기를 밀쳐버리던 장원의 눈, 혐오스럽게 쏘아보던 그 눈이 앞에서 황황 불타오르는듯 하였다.
그는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몸서리를 쳤다.
(아, 나는 그런 비렬한짓은 안했다. 이것만은… 이것만은… 장원이한테 말하여야 한다!)
전수원은 자기가 어떻게 허둥거리며 밖으로 달려나갔는지 몰랐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는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끝없이, 끝없이 달려갔다. 지진이 이는 대지우를 달려가는듯 비칠거리기도 하고 쓰러져 딩굴기도 하였다.
(장원아!… 장원아!… 나는 그런 비렬한짓은 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