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5 장

토왜구국의 기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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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손으로 이마를 고인 현홍택은 신중한 기색이였다. 고시문을 읽고 생각이 깊은 모양이였다.

병무도 고시문 한장을 들고 읽어보았다. 고시문은 국문으로 씌여있었다.

《경병(중앙군)과 영병(지방군)에게 고하고 백성들에게 알리노라.… 이제 우리 동도(농민군)가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개화를 표방하면서 외적과 결탁하는것)를 제어하며 조정을 밝고 바르게 하고 국가를 안보할새 매양 의병 이르는곳에 병정과 군교가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와 결전함에 비록 승패는 없으나 인명이 피차에 상하니 어찌 불상치 아니하리오. 기실은 조선사람끼리 서로 싸우자고 하는바 아니어늘 이렇게 피줄이 같은 한집안끼리 싸움하니 어찌 애닮지 아니하리오.》

고시문에서 눈길을 뗀 병무는 잠시 하늘중천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영준하게 생기고 인정미가 있는 농민군대장 전봉준의 모습이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다.

그런데 자기는 그런 좋은 사람들, 전봉준이나 태봉이와 같은 사람들과 싸우자고 총을 들고있지 않는가.

그의 입에서는 저도모르게 한숨이 뿜어나왔다. 병무는 다시 고시문에 눈길을 박았다.

《또한 공주 한밭(대전)일로 말한다 하여도 봄시기에 있은 사건(농민군이 충청감영군을 격멸한 전투)의 원쑤를 갚는것이라 하나 후회가 이를데 없으며 방금 대군이 서울을 짓누르고있어 팔방이 흉흉한데 편벽되여 서로 싸움만 하면 가위 골육상전이라 한편 생각컨대 조선사람끼리라도 도(사상)는 다르나 척왜척화의 뜻은 일반이라 두어줄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척왜척화하야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 하고 동심합력하야 대사를 이루게 하올세라.》

고시문을 읽은 병무는 생각이 깊었다. 귀전에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전봉준의 목소리가 쟁쟁히 울리였다.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두가 마음과 힘을 합치자는 전봉준의 호소는 그의 가슴에 뜨겁게 마쳐왔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되지 않게 하려는것이 전봉준의 숙원이였고 동족끼리 싸우는 비극에서 벗어나자는것이 그의 념원이였다. 여러차례에 걸친 그의 이런 애국적호소는 민족적량심이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크게 감동시켰으니 농민군 《토벌》을 위해 공주에서 수천명의 군사를 끌고 온 창의장 리유상이 전봉준을 찾아와 농민군에 합류하였고 그에 뒤이어 려산부사 겸 영장인 김원식이 역시 농민군에 의거하여왔다.

락엽이 깔린 숲속으로 엄병무는 방향없는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무거운 발은 가랑잎속에 푹푹 빠졌다. 그의 귀전에서는 자기를 질타하던 천태봉의 준절한 웨침이 증폭되여 계속 울리였다.

《…왜놈의 개가 되여 우리를 치러 왔니?! …왜놈의 개가 되여 우리를 치러 왔니?!… 왜놈의 개가 되여 우리를 치러 왔니?!…》

더는 참을수 없어 병무는 두손바닥으로 귀를 꽉 막았다.

《내가 왜놈의 개가 되다니?!…》

괴롭게 부르짖은 병무는 눈앞의 모든것이, 푸른 하늘이며 흰구름이며 나무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것 같았다. 중심을 잃고 비청거리던 그는 끝내 가랑잎 덮인 땅우에 쓰러졌다.

죽은듯이 누워있는 그의 뇌리에 불현듯 직산금광이며 개성해평리인삼포전에서 겪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전에 목격한 사실이 하얀 참지에 진한 먹으로 그린 그림처럼 선명하게 되새겨졌다.

엄병무네 교도중대가 일본교관의 명령을 받고 동학군들이 들어있다는 어느 한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일본군들이 소탕작전을 끝내고 철수한, 한물 지난 뒤였다. 하늘을 덮은 피빛의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거멓게 숯이 되여버린 마을의 참경은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었다. 개짖는 소리 하나, 닭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마을은 무덤속처럼 괴괴하고 적막하고 을스산한 살풍경이였다.

여기저기 나딩구는 조선사람의 시체들, 우물에는 산채로 처넣어 죽인 마을사람들의 시체가 넘쳐났다. 어느 집뜨락에는 죽어넘어진 젊은 녀인의 젖가슴에 매달려 갓난애가 젖을 빨고있는데 애기의 입으로 들어가는것은 젖이 아니라 뻘건 피였다.

이 참경을 바라보는 교도대원들의 표정은 비창하고 비통했다.

중대가 떠나려고 정렬했을 때 병무는 중대장 현홍택에게 저 어린것을 그대로 두면 죽고말겠는데 어디다 맡기고 오겠다고 나직이 말하니 현홍택은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회억한 병무는 벌떡 웃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릎을 세워 두팔굽을 고인 그는 손으로 골을 싸쥐였다.

(장차 어떻게 할것인가?)

이것은 근래에 그가 자주 자신에게 되뇌이는 물음이였다. 왜놈들의 개노릇을 하는 교도중대에 더는 그대로 있을수가 없었던것이다.

사실 병무는 조상들의 뒤를 이어 군정이 될것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모른다. 그는 군정이 되면 명실공히 나라와 겨레를 지켜 외적들과 싸울것으로만 생각하였다. 하기에 교도중대를 지금은 왜나라교관이 훈련을 주고있어도 장차는 그것이 궁성수비대가 된다는 말을 듣고 교도중대에 입영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정작 입영하고보니 자기의 예상과는 너무도 판판으로 도리여 외적과 단짝이 되여 동족과 싸우게 되지 않는가. 세상이 왜 이런 꼴로 되여가는지 그는 정말 모를 일이였다. 생각같아서는 동학군들한테로 훌 넘어가 짐승같은 왜놈들을 쳐죽였으면 속이 후련할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기는 비도로, 역적으로 몰리우고 대대로 무반의 록을 받으며 살아온 자기 가문도 풍지박산되고말것이 아닌가.

결국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수 없는 병무는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정녕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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