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제 5 장
토왜구국의 기치를 들고
7
(1)
군막밖에서 교도중대원들이 수군거렸다.
《엄참위더러 곧 상경하라는 군무대신의 명령이 내렸다지?》
《아니, 입궐시키라는 어명이라네.》
《뭐, 어명?! 히야, 대감 한자리라도 줄려나.》
《그럴지도 모르지. 워낙 용력이 출중한 사람이니까.》
《용력? 흥, 난 엄참위가 비도들에게 총 한방 제대로 쏘는걸 못 봤네.》
《좌우지간 엄참위는 팔자가 좋은 사람일세. 이 사지판에서 벗어나게 되였으니.》
이때 군막안에서는 부중대장 우범선이 중대장 현홍택과 엄병무에게 시들하게 말하였다.
《일본교관이 엄참위를 상경시키랍니다. 그런데 서울에 가는 일본군대들이 있으니 그들의 통역 겸 동행시키랍니다.》
현홍택이 어처구니없어했다.
《엄참위가 무슨 일본말을 안다구 통역노릇하라는거요?》
《어쨌든 일본교관밑에서 몇달을 훈련받았으니 영 생판은 아니라는거겠지요.》
현홍택이 낯을 찌프리며 우범선을 흘겨보았다.
《부중대장, 내 언제부터 하자던 말인데 당신은 언제 가야 중대장 앞서 교관에게 일러바치는 버릇을 고치겠소?》
그러나 우범선은 코웃음쳤다.
《내가 월권행위를 한다는거죠? 하지만 중대장님은 일본말을 모르지 않습니까?》
《여보, 중대는 중대장이 지휘하는게지 일본말을 안다구 해서 부중대장이 지휘하는게 아니요.》
《좋습니다. 앞으로 중대장님이 직접 교관에게 보고하십시오. 나는 곁에서 삐치지 않을테니.》
이렇게 내쏜 우범선은 시뜩해서 천막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사람이!…》
천막밖에 대고 성을 낸 현홍택은 이어 병무를 돌아보고 어줍어했다.
《이거 안됐소, 길떠날 사람에게 불미스러운 광경을 보여서. 허허…》
부중대장 우범선에 대해 늘 못마땅하게 여기고있던 병무는 참지 못하고 자기 심정을 토설했다.
《저야 뭐랍니까. 중대장님, 잘하셨습니다. 부중대장은 일본교관에게 지내 굽신거리고 발라맞춥니다. 중대를 떠난대서 하는 말이 아니지만…》
현홍택이 궁금스러운듯 병무에게 각근히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경시키라는 까닭이 뭐요? 엄참위야 알테지?》
병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영문을 전혀 모릅니다.》
《아무튼 엄참위와 헤여지게 되여 섭섭하구만.》
현홍택은 권문세가출신의 량반이고 나이도 지숙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너그럽고 아량이 있었다. 그와 헤여지는것이 병무도 서운했다.
《중대장님, 몸조심하십시오.》
《죽지 않으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럼…》
엄병무는 경례대신 현홍택에게 허리굽혀 절하였다.
헐썩거리며 고개길을 오르는 10여명의 일본군대들의 뒤를 따라 병무도 가파로운 고개길을 톺고있었다. 그의 등에는 일본군대들의 배낭이 세개나 덧지워져있고 어깨에도 네자루의 총이 덧메워져있었다. 병무는 얼굴에서 흐르는 줄땀을 손으로 연송 털어버렸다.
《오이, 조선놈!》
앞서 가던 털부숭이왜놈병정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보며 병무를 불렀다. 여러개의 덧짐을 진 병무가 힘겹게 그의 곁에 다가서니 놈은 다짜고짜로 병무의 뺨을 후려쳤다. 빨리 오지 않았다고 화가 난 모양이였다. 병무는 저도 모르게 두주먹을 불끈 쥐였다. 하지만 애써 분기를 눌렀다.
《내 배낭도 지고 가라!》
이렇게 씨벌인 털보왜놈이 자기 배낭을 벗어 병무에게 콱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거뿐한 몸으로 털썩털썩 앞서 걸었다.
이제는 등에 더 올려놓을 자리도 없어 병무는 할수없이 털보의 배낭을 가슴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낯익은 나루터에 이른 병무는 여러개의 배낭이며 총들을 모래톱에 벗어놓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어놓으니 살것 같았다. 왜놈병졸들도 강녘에 풀썩 주저앉아 나루배를 기다렸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다리쉼을 하는 놈들도 기분들이 좋은지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야, 시원히 목욕이나 하면 좋겠다.》
《강물이 얼음물 같겠는데 목욕이 다 뭐야?》
나루배가 다가오고있었다. 그런데 고물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늙은 사공이였다. 사공처녀는 어데로 갔는가. 왜놈들이 병무에게 다가와 자기의 총이며 배낭을 집어갔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하는 놈이 없었다.
배안에 탄 선객들이 겁기어린 눈으로 물녘의 왜놈들을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우뚝우뚝 일어선 왜놈들이 손을 저었다.
《바리바리 오라!》
드디여 물녘에 나루배가 닿고 겁에 질린 선객들이 허둥지둥 내렸다.
그들이 미처 다 내리기도 전에 나루배에 올라탄 왜놈들이 선객들을 와락와락 밀쳐버렸다.
《어이쿠!》
감투를 쓴 늙고 여윈 한 선객이 배전에서 떨어지며 급한 소리를 질렀다. 허리치는 물속에서 그 늙은이는 분격에 차서 앙상한 종주먹을 쳐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왜놈들이 감투가 벗겨져 손가락같은 상투가 한들거리고 온몸이 물참봉이 된 그를 보고 좋아라 웃어댔다.
드디여 병무도 배에 오르고 나루배는 강녘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