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5 장

토왜구국의 기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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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사공이 침중한 표정으로 노를 저었다. 삐걱거리는 노대소리, 배전에 출렁이는 물결, 강변을 불어치는 찬바람, 왜놈들이 마가을추위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중년의 선객곁에 앉아있던 병무가 몹시 낯이 익은 늙은 사공에게 말을 걸었다.

《로인님, 얼마전까지 처녀사공이 배를 부리댔는데?…》

늙은 사공은 낯색이 컴컴하여 아무말도 없는데 병무의 곁에 앉은 중년사내가 침울한 어조로 대신 말했다.

《저 칠봉로인의 딸 성녀는 죽었수다.》

《예?!… 죽다니요?》

병무는 너무도 깜짝 놀라 벌린 입도 다물지 못했다. 처녀의 몸으로 사공일을 하느라 해볕과 강풍에 얼굴이 감실감실하게 탄 처녀, 하지만 균형잡힌 미끈한 몸매며 유난히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여 퍽도 아릿답던 처녀, 더우기 앓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겠다고 아글타글하던 처녀, 그래서 심청이와 같은 효녀라고 늘 왼심이 씌여지던 그 처녀가 갑자기 죽다니 병무는 진정 믿어지지 않았다.

병무의 얼굴에서 의혹과 경악의 표정을 읽은 중년사내가 띠염띠염 그러나 분노에 치를 떨며 성녀의 참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직산금광을 개발한 왜놈들이 제물로 꽃다운 조선처녀 성녀를 산채로 생매장해죽였다는 말을 들은 병무의 머리속에는 대번에 직산 보덕리에서 겪은 사실이 환히 떠올랐다. 그러자 사공로인의 모색이 퍽 낯익어보이던 까닭도 알수 있었다.

그때 자기는 왜놈들의 짐승같은 만행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어디 자기뿐이였던가. 직산은 물론 아근의 고을과 마을의 사람들이 왜놈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안고 보덕리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때를 상기한 병무는 불현듯 지금의 자기 처지에 대한 죄의식으로 가슴이 옥죄였다.

그런 인두겁을 쓴 왜놈들밑에서 자기가 교도훈련을 받고 또 그런 왜놈들의 총알받이로 동학군《토벌》에까지 나갔으니 아, 내가 과연 사람이란말인가! 병무는 지금껏 조선사람의 얼도 없이, 넋도 없이 살아온 자신이 끝없이 환멸스럽고 저주스럽고 증오스러웠다.

털부숭이왜놈병정이 늙은 사공에게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무슨 생각이나 하는가? 바리바리 노를 저으라!》

하지만 늙은 사공은 한본새로 느릿느릿 노를 저었다.

배전에서 벌떡 일어나 사공의 곁으로 다가온 털부숭이는 대뜸 그의 뺨을 후려쳤다.

《나쁜놈의 새끼, 빠가!》

사공은 이렇게 뇌까리는 털보왜놈을 노려보았다.

《무슨짓이요?》

격분한 병무도 배전에서 벌떡 일어섰다.

《넌 또 뭐야!》

왜놈병정들이 일제히 병무에게 총을 겨누었다.

불이 이는 눈으로 놈들을 쏘아보던 병무는 어쩔수 없어 다시 주저앉고말았다. 늙은 사공도 분노를 강잉히 씹어삼키며 다시 노를 저었다. 그의 눈에서 심상치 않는 불꽃이 번뜩이는것을 병무는 보았다.

나루배가 어느덧 강심에 이르렀다.

그러자 갑자기 사공이 노대를 뽑아던지고 강물속으로 뛰여들었다. 그리고는 배전을 힘차게 잡아흔들었다. 배안에서 왜놈병정들이 아우성쳤다. 드디여 나루배가 뒤집히고 왜놈들이 물속에 빠졌다.

《앗, 와라레따!》

《사람… 살리오!…》

찬물속에 빠진 왜놈들이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사공이 재빠르게 건너편 물가로 헤염쳐갔다. 그런데 그의 뒤로 왜놈 하나가 따라가고있는데 섬나라의 바다가에서 나서자란 놈인지 헤염솜씨가 여간만 빠르지 않았다.

물에 빠져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병무는 이윽고 사공과 그를 뒤따르는 왜놈을 보고 인차 그쪽으로 헤염쳐갔다. 죽을 힘을 다하여 헤염치는 사공과 눈에 살기를 띠우고 그를 뒤따르는 왜놈사이가 점점 좁아졌다. 드디여 사공을 따라잡은 왜놈이 그에게 손을 뻗치는 순간 어느덧 왜놈곁에 당도한 병무가 놈의 골통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왜놈이 이번엔 눈을 부릅뜨고 병무에게 덤벼들었다.

물속에서 치고 때리는 치렬한 격투가 벌어졌다. 늙은 사공도 병무와 합세하였다. 드디여 왜놈이 두눈알을 까뒤집으며 강물속으로 잠겨버렸다.

《빨리… 강기슭으로!》

병무가 머리를 쳐들고 헐떡이며 사공에게 소리쳤다.

둘이 나란히 힘을 내여 헤염쳤다. 마침내 기슭에 이른 병무와 사공이 웃몸은 모래톱에, 아래도리는 물속에 잠근채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이윽고 그들은 모래불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들의 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문득 걸음을 멈춘 사공이 강물쪽을 바라보았다. 병무도 뒤돌아보았다.

왜병 두어놈이 뒤집힌 배에 매달려 구원의 소리를 지를뿐 강물은 고요하고 잔잔하게 흘렀다. 모름지기 헤염을 잘 치지 못하는 놈들은 이미 물에 빠져죽은 모양이였다.

어깨에서 서서히 총을 벗겨든 병무가 그쪽에 대고 겨냥하였다.

쪼프린 그의 눈에서 류다른 빛발이 뿜어나왔다.

땅!

되알진 총소리와 함께 뒤집힌 배전에 매달려있던 한놈이 강물속으로 꼴깍 사라져버렸다.

병무는 다시금 겨냥하였다.

땅!

나머지 한놈마저 물밑으로 잠겨버리고말았다.

병무를 신뢰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늙은 사공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격정에 넘쳐 부르짖었다.

《나리, 고맙수다!》

하지만 잠시후 늙은 사공이 근심어린 기색으로 말을 뗐다.

《일없을가요?》

《일없습니다. 죽은 놈들은 고변하지 못하니까요.》

이렇게 대꾸한 병무는 그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젠 어쩔셈입니까?》

《동학군으로 가겠쉐다.》

늙은 사공의 얼굴은 젊은이다운 의기와 패기로 불타고있었다.

《년세도 많으신데 견뎌내겠습니까?》

《힘이 진하면 왜놈의 멱줄을 이발로 물어뜯어서라도 딸의 원한을 풀어야지요.》

《아무쪼록 몸조심하십시오.》

《그럼 군교나리, 어서…》

늙은 사공은 눈물이 그렁하여 고개를 깊이 숙였다.

병무는 강쪽을 다시한번 확인하고나서 발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늙은 사공은 자리를 뜨지 않고있었다. 병무는 그에게 어서 가라고 손을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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