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제 5 장

토왜구국의 기치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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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합문밖으로 나온 조상궁은 병무를 이끌고 어느 한 방으로 갔다.

방문앞에서 걸음을 멈춘 조상궁은 병무에게 크게 웃거나 떠들면서 사내의 인기척을 내서는 안된다는것이며 자기가 기별하기 전에는 절대로 밖으로 나와서는 안된다는 사정을 또 루루이 주의를 주는것이였다.

환관들외의 사내들은 지밀이나 궁녀방에 얼씬하지 못한다는 대궐의 법도를 병무도 들어 알고있었다.

조상궁의 말을 듣고 문을 연 병무는 깜짝 놀라며 문고리 쥔 손을 놓을줄 몰랐다. 방안에서 오매불망 그리던 아정이가 웃음머금은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고있지 않는가. 그는 정녕 꿈을 꾸고있는듯싶었다. 그는 저도 몰래 허벅지살을 꼬집어보았다. 띠끔하게 아픈것으로 보아 생시는 생시였다.

《어서!》

조상궁의 독촉을 받고서야 병무는 방안에 들어섰다. 뒤에서 조상궁이 문을 닫아주었다.

《아정이!》

병무가 기쁨에 넘쳐 부르짖자 아정이가 급히 입에 손가락을 세우며 자기앞의 방석을 가리켰다.

병무는 방금전에 일러주던 조상궁의 말이 상기되여 조심스럽게 아정이 앞으로 다가가 방석우에 앉았다. 흰 명주저고리에 하늘색의 남스란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앉아있는 아정이의 자태는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하였다. 크고 고운 눈에서 서늘한 빛을 뿌리는 아정은 모색이며 거동이며가 대궐에 들어와 더 가다듬어진듯싶었다.

천진란만하고 쾌활하던 이전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길이 없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세련되면 더 고상하고 더 우아해지는 법이여서 병무는 아정이 앞에서 저도모르게 몸가짐을 바로가졌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세요?》

아정이가 눈매 고운 눈에 웃음을 피우며 말을 뗐다.

《글쎄…》

병무는 싱긋 웃었다.

《황소처럼 씩 웃기만 하시네.》

아정이가 눈을 곱게 흘겼다.

《아정이, 나 방금전에 중전마마를 뵈웠소.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아정이와… 난 어쩐지 꿈을 꾸고있는것만 같소.》

아정이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중전마마의 관심이예요. 병무씨가 상경하게 된것도 또 궁성시위대에 군적을 두게 된것도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해후를 나누게 된것도…》

《나도 정말 그 관심에 무슨 말로 아룄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그런데…》

병무는 말하다말고 한숨을 내쉬였다. 아정은 묻는듯한 눈길로 병무를 건너다보았다.

《아정이를 비천도의 선녀처럼 바라보며 애를 태워야 하겠으니말이요.》

아정이가 소리없는 웃음을 웃었다.

《우린 지금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있지 않나요.》

《그래두 어디… 한이불속에 든것만 같은가.》

이렇게 말한 병무는 제 말이 제 듣기에도 상스러웠던지 얼굴을 붉혔다.

《아이참, 그런 말은 그만두자요. 참, 거기 전장에서 겪은 이야기나 하세요. 동학군이 어때요?》

아정이의 얼굴에는 진정이 어렸고 어조는 진지했다. 병무의 표정도 정색해졌다. 그는 벽의 한점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요. 아니, 훌륭한 사람들이요.》

병무는 빈 방이건만 좌우를 둘러보고나서 안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여 펼쳐들었다.

《우리 관군에게 보내온 농민군의 총대장 전봉준의 고시문이요.》

병무는 종이장을 아정이에게 넘겨주었다. 사뭇 정숙한 안색으로 고시문을 받아든 아정은 두눈에 총기를 담아 그것을 읽었다. 고시문을 읽은 아정의 낯색은 붉게 상기되고 숨결도 높았다. 고개를 쳐들고 앞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무어라 말할수 없는 착잡한 표정이 어려있었다.

《나 거기서 태봉이를 만났소.》하는 병무의 말에 아정은 상념에서 깨여난듯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태봉이라니요?》

《태순의 오빠, 아, 전라도 광대 말이요.》

《오, 그 사람. 그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해요?》

《전봉준대장의 시위대장이요.》

아정이가 신뢰에 넘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테지요. 그럴줄 알았어요.》

그들의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상싶었다. 그러나…

문밖에서 조상궁이 나직이 알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엄도령, 갈 때가 되였나이다.》

엄병무는 후날을 기약하고 아정이와 작별했다.

고개를 수굿하고 집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발밑에서 가랑잎들이 굴러다니고 마가을의 춥고 한산한 거리로는 겨드랑이에 손을 낀 사람들이 종종걸음쳐갔다. 하지만 아직 무아경에서 깨여나지 않은 엄병무는 이 모든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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