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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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얼마나 잤던지 누가 팔을 흔들어 눈을 떠보니 로친이 다가와 귀안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요?》

《엉?》

《어째 웃방에서 숨소리가 안 나우? 문짬에 귀를 대봐두 감감하우. 이게 무슨 일일가?》

《원, 젠장. 환장을 했군. 제가 인젠 나이가 어떻게 됐게 제 귀가 멀어진건 모르구, 쯧쯧.…》

《아니요. 쓰르라미소리는 들리는데… 숨소리는 안 들리우. 저것들이 또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요, 예?》

그 소리에 김진세는 벌떡 일어나 사이문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이다가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문을 방싯 열어봤다.

방안에는 이불만 펴져있고 아들며느리는 간 곳 없다.

두내외는 화다닥 놀라 방안으로 뛰여들어갔다. 허씨가 김진세의 팔에 매달렸다.

《이게 무슨 일이요? 저것들이 다툰게 아니요? 싸운게 아니요? 무슨 소리를 못 들었소? 아이고, 가슴이야.…》

김진세는 울컥해져서 로친의 손을 홱 뿌리쳤다.

《조용하우. 동네가 듣겠소!》

그리고 밖에 나가 집둘레를 돌아보았으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온 김진세는 주먹을 부르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 이년놈들을 그저!》

김진세는 로친이 불을 켜자는것을 말렸다. 그들내외는 어둠속에 마주앉아 참을성있게 기다렸으나 젊은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는 지난해 가을 물동이가 산산 깨졌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김진세는 앉아배길수가 없어 마차길로 달려나갔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려 발을 제대로 내짚을수가 없었다. 그는 발길이 가는대로 개천가에도 나가보고 우물터도 돌아보고 마을길을 따라 료량없이 오르내리며 어둠에 묻힌 산기슭과 골짜기들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깊이 잠든 마을에는 괴괴한 정적이 깃들었다.

김진세는 자기 그림자를 밟으며 허둥지둥 걸어내려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동림촌쪽으로 걸어내려갔다.

마촌과 동림촌사이의 중간쯤 되는데까지 내려온 김진세는 자기네 밭쪽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밭가운데에서 웬 그림자가 언뜻거리는것이 보였던것이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김진세는 길가의 나무그늘밑으로 얼른 들어섰다.

그는 터슬터슬한 나무그루를 안고 밭쪽을 바라보았다. 나무잎사귀들사이로 흘러내리는 희읍스름한 달빛이 그의 얼굴에서 어른거렸다.

(아하니, 저게?…)

두 그림자는 밭이랑을 따라 앉은걸음으로 나란히 움직여나간다. 융융 울리는 말소리들사이로 사각사각… 탁… 탁… 하는 야릇한 소리가 들려온다. 애어린 강냉이포기들이 모두 잠을 깨여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며 희롱질이라도 하는듯 한들한들 떤다.

그들이 아들과 며느리이란것을 알아본 김진세는 눈이 커지며 나무그루를 꽉 그러안았다.

(저것들이 이 밤중에 김을 매는게 아닌가? 원, 저런… 김이야 며칠전에 말끔히 맸는데 저런… 저것들중에 누가 먼저 나가자구 했을가? 며늘아이가 밭을 어서 보고싶다구 졸랐을가? 창억이 저녀석이?… 에익, 잠도 안 오는데 나가 김이나 매자구 했을가? 원, 젊은것들은 저렇게 성급하다니까!)

로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암, 밭을 매는게 제일 좋은 얘기구 말이지. 그 이상 좋은 말이 어디 있겠나.… 저녀석이 셈이 들었거던. 이 정신 봐라. 저녀석이라니? 이제야 쌈두 겪구 피두 흘린 의젓한 유격대지. 암, 무산민중을 위한 군댄데 그쯤한걸 모를가! …)

풍겨오는 흙냄새가 가슴에 안겨들어 그는 목이 멜 지경이였다.

달무리가 선 하늘에서는 푸른 달빛이 소리없는 폭포처럼 쏟아져내려 이슬머금은 곡식들이 번쩍거리는 넓은 밭이 한눈에 안겨왔다. 저것들을 방에 눕혔을 때보다 밭가운데 놓고 바라보니 마음이 더 흐뭇해졌다. 이슬을 머금은 강냉이포기들도 후더운것이 뿌려진듯 달빛에 번들번들 빛나며 설레인다.

김진세는 아들과 며느리가 너무도 대견스러워 나무그늘밑에 숨어 눈을 슴벅거리며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들이 밋밋하게 기복이 져 내려간 밭이랑을 따라 저쪽지경에까지 가 머리도 안 보이게 되였을 때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네댓사람의 그림자가 마차길을 따라 이쪽으로 걸어올라왔다.

김진세는 나무그늘에서 나와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일 앞에 서신분은 장군님이시고 그이의 옆과 뒤에서 리성림이와 한흥권, 장룡산이 걸어왔다. 장군님께서는 동림촌에 나가 당, 공청회의를 지도하시고는 유격대초소들을 돌아보시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김진세는 장군님을 반겨 달려나가고싶었으나 웬일인지 발이 땅에 얼어붙어 엉거주춤 서있었다.

가까이에 다가오신 장군님께서는 환한 달빛밑에서 인차 로인을 알아보시였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그이와 지휘관들의 아래도리는 밤이슬에 화락하니 젖었고 풀냄새와 땀내가 뒤섞여 풍겨왔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로인은 두손을 앞에 모아쥔채 인사도 못 올리고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장군님, 며늘아이가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저것들이 자다가 없어졌길래 나와보니 글쎄 저 밭에서 나란히 김을 매는게 아니겠습니까.》

《예?》

《저것들이 글쎄 제 밭이 얼마나 그리웠으문 저리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로인이 가리키는 밭, 자신께서 밭갈이를 해주셨던 그 밭쪽을 바라보시였다.

지경쪽에서 김을 매올라오던 두 그림자도 엉거주춤 일어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이께서는 그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시다가 김진세와 장룡산이며 한흥권의 잔등을 떠미시였다.

《우리를 알아본게 아닙니까? 자, 빨리 갑시다. 공연히 방해가 되겠습니다. 허허… 빨리 물러나야지.…》

말없이 걸음을 다그쳐 한참 걸어오던 장룡산이 속이 근질거려나 참을수 없는듯 김진세를 돌아보며 벌쭉 웃어보였다.

《아바이! 창억이가 그래 처음 만나서 어떻게 합데까? 무던히 속도 썩이더니… 예? 귀를 잡구 절을 합데까? 업어들입데까, 안아들입데까? 예?》

장군님께서도 이런 롱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듯 즐겁게 웃으시였다.

한흥권이 넌지시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허, 아직 깜깜이군. 우리 중대에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는데…》

《어떻게 했게?》

장룡산이 헤벌린 입에 웃음이 가득 넘쳐 그를 쳐다보았다.

《오판단이 배재태구멍으로 들여다보고 뛔와서 보고하는데 창억이 저 친구가 글쎄 신발이 빠지지 않아 애쓰다가 보금이 들어가니까 그 잘난 개발을 쑥 내밀며 어디 좀 뽑아봐라, 이러더라지 않소. 그러니까 보금이는 글쎄 그 발을 큰 보물처럼 가슴에 받아안구 조심조심 당기더라는군. 신발이 쑥 뽑아지니까 둘이 마주보며 웃는데 허, 그 웃음소리 어찌나 시원한지 오판단이도 하늘로 날아오르는것 같더라지 않소, 허허허.…》

모두 걸음을 멈추고 껄껄 웃었다.

장룡산은 무릎을 철썩 내리쳤다.

《좌우간 창억이 걸작이다! 하하하…》

《사내대장부 그쯤한 배심이야 있어야지. 그래 장동무면 진짜 귀를 잡고 절할테요?》 하며 장군님께서도 즐겁게 웃으시였다.

한흥권이는 턱을 쳐들사 하고 소리없이 벙글거리기만 하였다.

《뭐니뭐니해두 그런 정찰에 우리 오판단이 드러났다니까!》

《허허허.…》

《하하하.…》

그 즐거운 웃음소리들이 고마와 김진세는 눈물이 글썽해져 장군님을 우러러보았다.

장군님, 아닌게아니라 저것들이 첨 만나 어떻게 화해될가 은근히 걱정했습니다.… 그렇게 헐하게 될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과연 다행입니다.》

모두 다시 걸음들을 옮겼다.

장군님께서는 달빛을 받으시려는듯 두손을 넓게 벌리시며 환하게 웃으시였다.

《로인님, 큰 잔치를 차려야 하겠습니다.》

《예, 차리겠습니다! 크게 차리겠습니다! 우리 애들이 장군님께 큰절을 올릴겝니다. 모시러 가겠습니다!》

《지금당장은 그만두시고 올농사를 잘 지은 다음 차리십시오. 그땐 저도 와서 떡도 치고 좀 대접을 받아야겠습니다. 큰절은 그만두고 국수 한사발이면 됩니다. 허허허.…》

김진세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을 썩 지나가 그이와 헤여졌으나 돌아서지 못하고 길바닥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희푸르스름한 달빛속에 멀어지는 장군님의 뒤모습을 지켜보는 로인은 볼편을 부들부들 떨며 울먹이였다.

(장군님은정밑에서는 끊어진 연분두 이어지구 눈물만 흐르던 우리 집에두 웃음이 넘칩니다. 장군님은정은 정말 해볕이구 저 애들은 양지밭에서 자라는 낟알처럼 잘 영글어져갑니다!)

온 누리에 달빛이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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