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 회)

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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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현숙은 나무그늘밑에 아이들을 빙 둘러세우고 손벽을 치며 노래를 배워주고 최형준은 아이들이 련습하기 편리하도록 부지런히 낫을 휘둘러 풀을 베서 물쪽에 내던졌다.

아이들은 손벽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선생님둘레를 돌아갔다. 야드르르한 잎사귀들이 풍성한 은백양나무가지들은 바람을 안고 부드럽게 설레이고 그속에서는 참새들이 야단스럽게 우짖어댔다. 최형준은 웃도리를 벗어제끼고 걸싸게 낫질을 하여 풀을 한아름씩 베여서는 물쪽에 훨훨 내던졌다. 물우에서는 풀단이 흩어지며 한가롭게 떠내려갔다. 날아떨어지는 풀가지들이 먹을것인가 하여 물고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빛살처럼 번쩍거리며 뛰여올랐다.

《저것 보라요! 저게 누구들인지 알아요?》하고 림성실이 뒤를 돌아보니 김중권은 벌써 저만치 앞에서 고삐를 툭툭 채여 말을 재촉하며 걸음을 다그쳐가고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림성실이도 문득 수집은 생각에 휩싸여 황황히 길로 올라와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림성실은 말의 이마며 관자노리에 꽃 몇송이를 꽂아주고는 발깃하게 상기된 얼굴로 김중권을 돌아보며 눈을 곱게 흘기였다.

《사람들한테 들키는게 그렇게 겁이 나요? 같이 가다가 혼자 내뛰면 어떻게 해요, 아이참!》

말들은 이마에 붙은 꽃을 먹어보자고 머리를 휘두르고 혀를 길게 내둘렀다. 그것이 우스운지, 김중권의 소행이 재미나서인지 림성실의 얼굴에는 마냥 미소가 넘쳤다.

《풀을 베주는게 최형준동무가 아니요?》

김중권이 물었다.

《그것도 찬찬히 보지 못했어요? 호호호…》

《최형준이 맞지?》

《그래요.》

《허참, 할일도 없다.… 풀밭에 나와 련습할게 있는가? 좋은 학교마당을 두고…》

《왜 그러겠나 맞춰보라요.》

《저 친구들이 뭐가 좀 있는게 아닌가?》

《사업상 련관도 있겠지만 최형준동무는 틈만 있으면 저렇게 현숙동무를 도와줘요. 그런데 저 현숙이는 곁을 안주지요. 아예 싫어해요.》

《왜? 최동무가 남자로서야 빠진데 있는가?》

《제 보기엔 깊은 사상적문제 같아요.》

《사상적문제? 그건 무슨 소리요?》

《현숙이는 여기로 첨 왔을 때 저 강사동무의 좌경적인 강연을 듣고 아주 나쁜 인상을 받았어요. 그때 어찌나 분개했던지 강사를 찾아가서 따지며 론쟁까지 했댔어요.… 좌경바람에 관계했던 사람이라고 그러는지 아주 질색이지요.》

《그건 지난 일이구 지금이야 새 로선을 받들고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소.》

《글쎄말이야요… 저렇게 지성을 다하는데도 현숙이는 그냥 얼음고드름이지요.》

《그래도 무슨 향기를 피우길래 벌이 윙윙 날아들지?》

《그 안속이야 어떻게 알겠어요.》

《허, 나는 소경이야.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니까.》

림성실은 한숨을 호- 내쉬였다.

《현숙이를 봐요.… 녀자는 저렇게 자존심이 세야 돼요, 나처럼 이러지 말고.…》

《허허허…》 하고 허거프게 웃는 김중권의 눈에 물기가 번들거렸다.

그들이 또한 산굽이를 돌아가는데 앞쪽에서 얼굴이 가무잡잡하게 탄 리성림이 벗어쥔 군모로 부채질을 훨훨 하며 걸어올라왔다. 량볼로 땀물이 줄줄이 흘러내리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불만의 빛과 심술궂은 미소가 가득 어렸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뒤에서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어깨에 건 반성위가 무슨 종이장같은것을 손에 들고 열심히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걸어왔다.

《왜 손님을 혼자 떨궈두고 먼저 걸어오오?》 하고 김중권이 성림에게 퉁명스럽게 꾸짖었다.

성림이는 군모로 턱밑을 훔치며 눈살을 익살스럽게 찌프렸다.

《에익, 정말 베차서 죽겠습니다. 청년기분이 돼서 손님허울을 벗어던지는 바람에 이거야 어디 따라다니겠습니까. 별걸 다 알아보려 하구 간참해들려구 하지요. 안 가는데 없어요. 내참, 이거야…》

《뭘 저렇게 들여다보우?》

《사진입니다. 십리평에 지금 사진사가 와서 찍고는 그 자리에서 깨워주는 바람에 모두 모여들어 사진들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인데 거기서 가족사진이랑 약혼사진이랑 몇장 얻어가졌지요. 그게 무슨 별게라고 저렇게 자꾸 꺼내 들여다보는데 갑갑증이 나서 어디 같이 걸을수 있어야지요.》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다가온 반성위가 시원하게 웃으며 인사말을 하였다.

《허, 어디로 이렇게 동행하십니까?》 그리고는 팔에 건 양복저고리에서 손수건을 찾아서 꺼내 이마의 땀을 점잖게 꾹꾹 찍어냈다.

《십리평에 회의지도하러 갑니다.》 하고 림성실이 대답하였다.

《회의요?…》

《어디를 돌아오는 길입니까?》 하고 김중권이 물었다.

《저 셋째섬에도 가고 서대포에도 가고 환대를 잘 받으며 한바퀴 빙 돌았습니다. 이 전령병동무가 수고많았습니다. 저는 날씨가 이렇게 화창하니 끝없이 걷고싶구만요, 허허허.…》

반성위는 이렇게 말하며 말이마에 붙어있는 꽃을 보는듯 하더니 얼굴에 엄숙한 빛이 보일듯말듯 어리였다.

그와 헤여져 얼마쯤 가던 김중권이와 림성실이 뒤를 돌아보니 반성위는 길복판에 서서 그들을 주의깊게 바라보고있었다.

《저 동지가 뭘 눈치챈게 아닌가?》

《그게 그렇게 겁이 나는가요?》

김중권은 또다시 아까 최형준이네를 만났을때처럼 걸음이 빨라졌다.

림성실은 그의 옆에서 따라가며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좀 천천히… 저하고 같이 가는게 그렇게 쑥스러운가요? 저 현숙동무를 보라요. 얼음고드름인체 하면서도 저렇게 자주 같이 있게 되니 얼마나 좋겠어요.》

그리고는 응석이라도 부리듯 밝게 웃어보였다.

김중권은 그 비교가 마음에 거슬렸는지 문득 걸음이 떠지며 얼굴빛이 정색해져서 림성실이를 돌아보았다.

《늘 같이 있는게 사랑이요?》

자기의 롱말에 그렇게 정색해지는바람에 림성실은 내내 가슴밑에 깔려있던 설음이 북받쳐올라 속눈섭에 눈물까지 맺혔다.

《그런건 아니지만… 오늘같은 날에야 왜 그래요?》

《그럼 내가 어찌면 되겠소? 걷자고 해서 걸었지, 노래를 부르자고 해서 불렀지…》

《그런게 아니야요. 솔직히 말해줘요. 그전에 저하고 왜 영 헤여지자고 마음먹었더랬어요? 여기 와서도 왜 될수록 멀리하자고 그래요? 저는 고민했어요! 괴로왔어요!》

김중권은 그의 얼굴을 빤히 여겨보다가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였다.

《나는 그래도 동무가 내 마음을 리해하려니 하고 믿어왔댔지. 그래서 아무 설명도 안했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령관동지의 생활을 보면서 많은 가책을 받게 됐소. 사령관동지는 병환에 누워계시는 어머님을 보시고도 추호의 주저나 망설임도 없이 남만진출의 길을 떠나시였소. 남만에서 돌아오시는 길에 량강구에서는 어쨌겠소.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고아로 된 두 동생… 철주동생이 따라나서는것도 떼여놓고 길을 떠나셨소. 언제한번 일신상의 문제나 가족의 운명때문에 걸음이 떠진 일이 있었겠소. 자신의 개인과 관련된 모든것을 다 희생시키고 오직 혁명과 조국광복을 위해 한생을 바치시는이가 우리 사령관동지요. 나는 저도모르게 우리가 일찌기 약혼한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됐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된 혁명가로 되자면 개인생활도 사령관동지처럼 해야 된다. 그때 이런 마음에서 동무한테 그런 편지를 보냈댔소. 잘했다는게 아니요. 지금은 내가 과도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심정은… 그랬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김중권의 눈에 괴로운 빛이 어른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갈려지며 떨리기 시작하였다.

《여기 와서도 만나면 싫은소리를 많이 했지. 어쩐지 내 눈에는 동무가 신통하게 일하는것 같지 않아서… 지금 우리 사령관동지의 가까이에는 혈육이라고는 없소. 아버님과 어머님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이미 세상을 떠났지. 삼촌님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고계시고 두 동생도, 고향에 계시는 조부모님들도 소식조차 모르오. 사령관동지는 우리를 혈육이상으로 믿으며 혁명을 령도하고계시오. 이런 사령관동지이신데 우리가 혈육이 되여 잘 받들고 잘 모셔야 하지 않겠소? 나는 여태까지는 우리가 사랑을 약속한 이상 그 감정은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서로 리해하면서 오직 사령관동지만을 받들고 혁명을 잘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소. 그래서 어찌다가 만나도 다 리해하겠거니 하고 싫은소리랑 했소. 그게 리해 안되고 싫으면 물러가도 좋소.》

김중권은 담배를 꺼내물고 성냥을 북 그었다. 림성실은 저도모르게 성냥불이 꺼지지 않도록 몸으로 바람을 막아섰다. 그리고 담배에 성냥불을 붙이며 부들부들 떠는 사나이의 검스름하고 큰 손을 보며 호- 한숨을 내쉬였다.

그가 담배연기를 한껏 들이삼켰다가 후- 내뿜을 때 림성실은 생각깊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담배가 그렇게 맛스러워요?》

김중권은 여전히 근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사진을 눈앞에 가져오기도 하고 멀리 가져가기도 하면서 이모저모로 다심하게 들여다보시다가 옆에 서있는 김중권을 돌아보며 즐겁게 웃으시였다.

《성실동무는 상냥스럽게 웃는게 아주 잘됐군.… 그런데 동무는… 더 틀지게 서서 벙글써하게 웃었더라면 좋았을걸… 이거야 어디 애인옆에 앉아있는 남자눈인가, 적을 노려보는 눈이지. 허허허… 그래도 괜찮게 됐소. 잘됐소.》

김중권은 귀가 벌겋게 되며 뒤더수기를 쓸어만졌다.

장군님께서는 이윽고 웃음을 거두시였다.

《동무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도적질이라도 하는것처럼 사람들 몰래… 한생의 인연을 맺은바치고는 불같이 사랑할것이지 성실동무가 애처롭지 않소? 내 이전부터 눈여겨 살피다가 너무 안돼서… 그리고 동무가 말을 들을것 같지 않아서 군사명령의 형식을 취했는데 그건 리해하오. 동무가 정 그러면 나는 이 사진을 어디다 내걸고 그밑에 김중권이와 림성실은 약혼한 사이이다 이렇게 크게 써붙일가 하오!》

그러시고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김중권이 밖으로 나오니 국제당파견원 반성위가 마당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그는 낮에 어깨에 둘러멨던 양복저고리를 단정히 입었다. 중권이를 보자 그는 볕에 새까맣게 탄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아니, 벌써 회의를 끝내고 왔습니까?》

《예.…》

《여기 와 들으니 김창억동무 안해가 온성에서 돌아왔더군요!》

《예.》

《그 녀성을 만나볼수 없을가요? 김일성동지는 방에 계십니까?》

《계십니다. 》

반성위는 그와 헤여져 사령관동지의 방문쪽으로 활기에 넘쳐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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