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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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호의 등에 허리를 바싹 수그린 태봉이가 고개길로 치달아올랐다. 채찍을 휘두르는 그는 비분강개한 표정이였다. 지금도 그의 눈앞에는 손에 수갑을 차고 발에 족쇄를 찬 김개남대두령이 사형장인 전주 서교장으로 지척지척 걸어가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발에는 무거운 사슬이 끌리건만 고개를 거연히 쳐든 그의 얼굴은 태연하고 온화했다.
전봉준농민군의 총관령인 김개남은 이해 11월말 전라도 태인현 중승리에서 적들에게 체포되여 전주감영으로 끌려갔다. 다음날 오후 4시 그는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교장에서 한방울의 물방울로 사라졌다.
총관령 손화중도 고창에서 체포되여 서울로 압송중에 있었다. 이들뿐이 아니라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등 각지에서 체포된 농민군지휘관들이 일본군에 의해 서울로 이송되고있었다. 이미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농민군의 두령들이 붙잡히면 일본군에 넘겨 서울로 압송케 하라고 조선정부에 강요했던것이다.
순창군 피로리를 향해 달리는 태봉의 가슴은 이런 울분과 함께 전봉준의 신상에 대한 우려로 재처럼 타고있었다. 관군복차림을 한 그는 허리에는 환도를 찼고 등에는 화승총을 메였다.
피로리에 당도한 태봉은 마을의 동태도 살필겸 몇끼로 건너뛴 배도 채울 심산으로 주막집부터 찾았다. 주막집뜨락에 들어선 태봉은 어두운 밤이라 말은 어디다 비끄러맬지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방문이 열리며 쏟아져나온 불빛과 함께 주인이 밖으로 나왔다.
주인은 태봉의 관군복색을 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쇼.》
《이 말은 건사해주.》
태봉은 무뚝뚝하게 대척했다.
《예, 예, 어서 방으로.》
태봉이가 방에 들어서니 두 나그네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있었다.
태봉이를 힐끗 쳐다본 그들은 무관한듯 대작을 계속했다. 갈삿자리를 깐 방안벽은 눌러죽인 빈대피로 그 무슨 문양이라도 그려놓은듯 싶었다.
이윽고 그에게도 술상이 차려져 들어왔다.
《그 사람은 술법을 안다는데… 가만…》
감투를 쓰고 염소수염을 기른 중로배가 말하다말고 손가락을 빳빳이 세우더니 벽으로 기여드는 빈대를 눌러죽였다. 그는 손가락끝을 베잠뱅이에 뻑 문대고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잡힐수 있나?》
《수하 접주가 고변을 했으니 별수 있소?》
염소수염쟁이와 대작하던 술군이 하는 소리였다.
태봉은 그들의 말에 귀를 강구었다.
《에에, 제가 섬기던 대장을 고변하다니… 개만도 못한 놈.》
《개는 왜 껴드나, 개는 그래도 주인을 알지.》
불길한 예감을 느낀 태봉은 그들에게 은근히 물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이 혹 동학군대장 전봉준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십니까?》
《예. 록두
《그런데 그가 어찌 됐다구요?》
《하, 손님은 깜깜이군요. 전봉준이가 여기 복흥산속에서 잡혔지요. 이곳 접주 김경천이란 사람이 고변을 해서…》
《?!…》
태봉은 너무도 의외의 일에 입도 벌리지 못했다. 그는 농군들이 자기의 거동을 의아쩍게 쳐다본다는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갑자기 자리를 차고 일어선 태봉은 밖으로 나와 자기의 말을 찾아 올라탔다.
김경천의 집에 이른 태봉은 말등에서 담장안으로 뛰여내렸다.
전봉준의 당부를 전갈하러 김경천의 집으로 몇번 오간적이 있어 태봉은 이곳 지세에도 밝았다.
그는 발을 저겨디디며 불빛이 밝은 사랑방쪽으로 다가갔다.
방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마루에 가만히 올라선 태봉은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숫돌상판 김경천이가 누구와 마주앉아있었다. 그들사이에 푸짐하게 차린 술상이 놓였다.
《접주어른이 이번에 큰일을 제꼈소이다.》
낯모를 놈이 김경천이에게 하는 소리였다.
《여보게, 이젠 접주란 소리 그만두게. 내 이젠 접주가 아닐세.》
《그럼, 그럼, 이젠 접주가 아니지, 아니고말고…》
《이젠 원님이야, 원님!》
《글쎄, 그러기에 하는 말이웨다. 함께 꼬아바친 한신국도 이젠 원이야 떼여놓은 당상이고 일금 만냥이 또 어디웨까? 그러니 접주어른의 수족이 되여 움직인 나를 모른체야 안하시겠지요?》
《음, 두말하면 잔말이지. 가만, 칠사강을 한번 외워봐야겠네.》
《칠사강이요?》
《음, 원으로 제수될 때 임금님앞에 가서 외워바쳐야 하는 일곱가지 조항일세. 원이 반드시 시행해야 할 규범이지. 이를테면 농상성, 호구증, 학교흥, 부역균… 즉 농사와 장사가 잘되도록 하며 인가가 늘어나도록 하며 학교를 흥하게 하며 부역을 골고루 시키며…》
《헤헤, 접주님두 아니, 원님두… 언제 그런것에다 골머리를 썩이겠쉐까? 그저 백성놈들한테 걸테질을 극성스레 해서 재물을 모아야지요.》
《음, 그야 이를 말인가.》
마루에서 태봉은 주먹을 불끈 쥐였다. 더는 듣고만있을수 없어 문을 박차고 방으로 뛰여들었다.
《이놈들, 꼼짝말아!》
갑자기 괴한이 달려드는 사품에 얼혼이 나갔던 김경천이가 태봉이를 알아보고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아니, 이게 누구시오? 태봉시위대장이시구려.》
《그래, 내다, 태봉이다.》
칼을 꼬나든 태봉이의 기상은 험악했다. 하지만 김경천이는 여전히 간살을 부렸다.
《그런데 어떻게? 자, 어서 상앞에 앉으시우.》
《어떻게? 전선생님을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내 죄를 씻으러 왔다.》
그제야 김경천의 눈알도 불안과 공포로 허둥거렸다.
《저, 시위…》
태봉은 호령기어린 소리로 놈의 말을 꺾어버렸다.
《이놈, 상기도 아가리를 다물지 못해!》
《…》
사색이 된 김경천이는 말도 못하고 손바닥만 비볐다.
《이건 나 하나만이 아닌 배달동포들의 철추다!》
칼날이 등잔불에 섬광처럼 번뜩였다.
《아이쿠!》
김경천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나딩굴었다.
나머지 놈마저 처치해치운 태봉은 방안에서 뛰쳐나왔다.
뜨락을 꿰질러가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섰다. 무거운 걸음으로 사랑방쪽으로 되돌아온 태봉은 방안에서 술병을 들고나와 추녀에 뿌리고는 성냥을 그어댔다. 홀연 불길이 일어나며 삽시에 처마를 휩쌌다.
태봉은 화광이 충천하는 김경천의 집을 뒤에 두고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