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6
(1)
눈덮인 향원못가를 산책하는 민비를 시종하던 아정이가 고뇌의 기색이 짙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전마마, 요즘 무슨 심뇌를 그리 깊이 하십니까?》
민비는 한숨부터 내쉬였다.
《나도 남편이나 섬기고 아이들이나 키우는 항간의 려염집아낙네처럼 살고싶구나.》
아정은 저으기 놀란듯 어리손을 쳤다.
《마마, 무슨 그런 말씀을…》
《아니다. 아니할 말루 팔자에 없는 국모가 되여가지고 이런 마음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진심이 어린 민비의 표정을 보고 아정이도 입을 다물었다.
민비는 혼자소리 하듯 심중을 토로했다.
《이 얼어붙은 땅처럼 이노우에는 나도 얼게 만드는구나.》
아정은 나직하나 힘있는 어조로 민비를 고무했다.
《이 얼어붙은 땅을 녹여줄 따뜻한 바람이 꼭 붑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기마련이 아니옵니까, 중전마마.》
《그런 믿음이라도 있기에 지탱해나가는게지.》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아정은 민비의 귀바투 입을 가져갔다.
《마마, 듣자니 서양렬국들이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다나봅니다.》
호기심을 느낀 민비가 묻는 눈길로 아정이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손타크부인이 그랬사와요.》
《손타크부인, 그를 본지도 오래구나.》
《마마, 소일거리삼아 그를 한번 만나보지 않겠소옵니까?》
《그래라.》
이틀후 민비는 손타크와 마주앉았다.
쟁반을 들고들어온 아정이가 원탁우에 두개의 커피잔을 놓아주며 손타크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손타크부인, 커피입니다. 》
《고마와요, 아정아가씨.》
아정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민비가 친절하게 손타크에게 커피를 권하였다.
《어서 드세요, 식기전에…》
《고맙습니다, 왕비전하.》
손타크가 허심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난 어쩐지 커피보다 조선숭늉이 더 입에 맞습니다.》
《예, 조선숭늉도 훌륭한 음료입니다.》
민비가 커피잔을 저으며 은근스럽게 물었다.
《듣자니 요즘 부인이 경영하는 손타크호텔이 번성한다지요?》
《유일한 서양식호텔이다보니 조선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이나 서양물을 먹은 조선의 개화인사들이 자주 찾군 합니다. 그들은 우리 호텔이 외국인거주지역인 정동에 있다 해서 흔히 <정동클럽> , <정동구락부>라고 합니다.》
《정동구락부라… 그래, 그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요?》
《호사가들이라 건드리지 않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민비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입술을 감빨며 은근스레 물었다.
《일본에 대해선 뭐라고 하는가요?》
긴장한 표정으로 손타크는 얼른 대척했다.
《왕비전하, 말들이 많습니다. 특히 로씨야계, 프랑스계, 도이췰란드계사람들이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요?》
민비의 눈이 구름속에서 해가 나오듯 순간에 빛을 뿜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을 비롯한 극동지역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는것입니다. 아시다싶이 로씨야와 프랑스는 동맹관계에 있고 도이췰란드는 이들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 아닙니까? 이 세 나라는 일본이 조선과 그 주변지역을 독점하는것을 결코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 민비의 눈이 긴장으로 쪼프려졌다. 《영국과 미국은 어떤 태도입니까?》
《그들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지만 실상 그들도 조선에서 일본이 모든 리권을 독차지하는것은 달가와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민비는 신심있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손타크를 바래워준 민비는 아정과 함께 바둑놀이를 하였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바둑통에서 흰 알을 하나 끄집어낸 민비는 그것을 딱소리가 나게 바둑판에 놓았다. 그러자 바둑판에서 챙 하는 금속성이 기분좋게 울렸다. 아정이도 검은 알을 하나 집어 바둑판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바둑판에 놓인 민비와 아정이의 손은 둘 다 섬섬옥수다.
민비가 또 한알을 꺼내여놓으며 생각에 잠긴 어조로 뇌였다.
《온 한해 세상을 들썩하게 하던 동학군도 해를 넘기지 못하고 끝장이 나나부다.》
《그런가보옵니다.》
아정이는 상심한 기색으로 나직이 대꾸했다.
《청일전쟁도 끝장을 보고있지, 동학란도 평정해치웠지. 요즘 이노우에공사가 범잡은 포수처럼 으시대겠구나.》
《쥐잡은 고양이처럼 좋아할겁니다.》
《그래, 네 말이 더 분명하다. 쥐잡은 괭이처럼 좋아할게다.》
《중전마마, 성즉필패라고 일본도 꼭 망하는 날이 있사옵니다.》
《옳다, 성하면 쇠하는 법이지.》
다시 바둑알을 놓던 민비가 아정이를 쳐다보며 은근스럽게 물었다.
《요즘 너희 군정은 어떻게 지내느냐?》
아정은 불시에 낯을 붉히며 아미를 숙였다. 그는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나직이 대답했다.
《뭐, 무탈하옵니다.》
《대단한 싸움군이라면서?…》
《차력군이옵니다.》
《오, 차력군…》
민비는 아정이에게서 눈길을 돌려 창쪽을 바라보며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너희들이 부럽구나. 좋은 나이때지.》
《중전마마도 아직 젊으셨나이다. 이 섬섬옥수를 보시오이다.》
아정은 민비의 고운 손을 가리키며 상긋 웃었다.
《아니다. 녀자나이 40이면 볼장을 다 본셈이야.》
《아니오이다. 일전에 웨벨공사부인과 손타크부인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들은 마마께서 상기 처녀같다고 하였소옵니다.》
《귀맛이 좋구나.》
민비는 소리없이 웃었다.
《사실이오이다.》
《고맙다, 칭찬해주어.》
아정을 이윽히 바라보던 민비가 말을 이었다.
《아정아, 내 때를 보아 너를 궁밖으로 내보내주마.》
아정은 깜짝 놀랐다.
《예, 중전마마?!》
《너를 어찌 한뉘 대궐에서 늙히겠느냐. 너도 화촉지연을 올려야 할게 아니냐. 왕실법도엔 없다만 뭬라느냐, 개화세상이 돼가는데…》
《중전마마!…》
감격과 흥분으로 아정이의 눈굽에 대뜸 미음이 핑 돌았다. 그는 이마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