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6
(2)
홀연 합문밖에서 상감마마가 림어하시였다고 아뢰는 조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정이가 부랴부랴 바둑판을 거두었다.
민비도 재촉했다.
《얼른 보이지 않는 곳에 치우거라.》
편전에 들어선 고종은 민비의 곁 보료우에 앉았다.
부복했던 아정이가 몸을 일으켜 뒤걸음으로 물러가자 민비가 고종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상감마마, 수라를 진어하시였습니까?》
《진어했소.》
《하온데 어인 일로?》
고종은 한숨부터 내쉬고나서 대척했다.
《이노우에공사가 내알현을 주청해왔소.》
《그러하옵니까?》
민비의 표정에도 우려하는 빛이 떠올랐다.
《대신들은 다 물리치고 곤전과 의정부, 내각의 수반인 김홍집이만 림어(참가)시키라는거요.》
《…》
《일본공사가 또 야료를 부릴 생각을 하면 과인은 벌써부터 속이 떨리오.》
《상감마마, 마음을 든든히 가지시옵소서.》
《그래야겠지.》
《서울엔 일본공사만 있는것이 아니옵니다.》
이렇게 뇌이는 민비의 표정은 랭랭했고 어조는 쌀쌀했다.
몇시간후 이노우에공사가 단신으로 함화당에 들어섰다.
그는 고종과 민비에게만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표시했을뿐 김홍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흰 와이샤쯔에 받쳐 까만 양복을 쭉 뽑아입은 그는 선진국의 문명인다운 뽐을 내려는것이 분명했다.
오늘은 비밀이 충분히 담보된다고 생각되므로 본사신도 진속의 생각을 토론하고저 하니 마음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청문해주시기 바란다고 서두를 뗀 이노우에는 손을 주무르며 고종과 민비의 앞을 거닐면서 발언하였다.
그의 어조는 자못 부드러웠으나 눈에는 독기, 위협기가 어려있었다.
이날 함화당에서 진행된 고종과 민비 그리고 김홍집이만이 참석한 내알현에서 이노우에는 대원군과 그의 손자 리준용이가 왕후 민비와 세자 척을 페위시키려 한다고 왕실내부에 쐐기를 치면서 일본정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국왕 고종과 왕후 민비를 지지하고 보호할것이라고 입에 침발린 소리를 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유명무실한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조선정부를 개조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정계와 조선정계를 비교해보면 일본정계인사들의 평균나이는 40인데 조선은 60으로, 이렇게 조선정계가 로인화되다보니 자연 조선정계의 기상도는 저기압 즉 보수와 침체에 빠지기마련이라고 빈정거렸다.
때문에 젊고 유능한 사람들로 조선정부를 갱질하여야 하는데 새 내각에는 박영효나 서광범이와 같은 다년간 외국에 있으면서 견문을 넓힌 사람들을 기용해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끝으로 이노우에는
고종은 너무 괴로와 고개를 떨어뜨린채 눈을 꾹 감고있었으며 민비는 착잡한 고뇌의 표정으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있었다.
국왕과 왕비는 함구무언하고있어도 김홍집은 파렴치하고 건방진 이노우에의 수작을 참고있을수 없었다.
그는 흥분과 격분으로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나서 입을 열었다.
《여보시오 공사, 당신은 환갑로인이라는데 참으로 정정하십니다.》
열변을 토하느라 얼굴에 내밴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있던 이노우에는 김홍집의 말이 찬양의 소린지 아니면 비난하는 소린지 가늠이 가지 않아 얼빤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당신이 잠시도 쉬지 않고 방안을 왔다갔다, 왔다갔다하며 긴 언변을 늘어놓는 바람에 어지럼증을 겨우 참고 견디였소.》
이제야 김홍집이가 자기를 비난할뿐아니라 조소하고있다는것을 깨달은 이노우에는 손수건을 바지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쑤셔넣고나서 가시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공사, 당신은 당신네 나라 어전회의에서도 성상앞을 그렇게 흔들흔들 걸어다니며 연설하시오?》
김홍집은 천황페하란 소리를 우정 성상이란 말로 력점을 찍어 말하였다.
《…》
이노우에는 얼른 답변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볼따귀의 상처자리만 매만졌다.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불현듯 일본궁성의 어전회의광경이 떠올랐다. 젊은 천황 무쯔히또앞에서 모든 대신들이 최대의 정중, 경건한 태도로 고개도 들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그런데 오늘 자기는 조선국왕앞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마치도 식민지총독처럼 행세하지 않았는가. 지나쳤다는 때늦은 후회를 느꼈다. 그런데 김홍집이 저자식이 그것을 꼬집어 말하는 까닭은 뭔가?
그 자식이 또 힐책하듯 따지고들었다.
《우리는 당신네가 요구하는대로 내정개혁을 진행하기 위해 군국기무처를 내오고 국정개혁을 과감히 내밀고있소. 그런데 별안간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겠다는 그 저의는 뭐요?》
김홍집은 조성된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군국기무처를 통해 페정쇄신을 단행하여 그토록 오매불망 념원하던 부국강병국을 이룩하려던 그 대망과 열망이 이노우에라는 한놈의 섬오랑캐때문에 저지, 파탄되게 되였다는 생각으로 심장이 옥죄는듯한 분통과 고통을 느끼고있었다.
이노우에가 갑자기 낯짝을 붉히며 큰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군국기무처는 유명무실한 기관이라고!》
《공사, 우선 다시한번 당신에게 충고를 주겠소. 여기는 지엄하신 상감마마와 중전마마께서 림어하고계시는 어전이요. 그리고 당신은 일국의 사신에 불과하지만 나는 상감마마밑의 의정부수반인 령의정이며 내각수반인 총리대신이니 발언을 삼가하시오.》
또다시 실수한 이노우에는 그저 씩씩거리기만 했지 뻐꾹소리도 못했다.
고종과 발뒤의 민비는 고개를 쳐들고 김홍집과 이노우에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보고있었다.
《공사, 당신은 상감마마이하 우리 문무백관들의 총의에 의해 창립된 군국기무처를 유명무실하다고 하였는데 그 리유는 뭐요?》
《군국기무처는 3개월동안에 무려 208건이나 되는 법령을 채택공포하였는데 그것이 실현되였습니까?》
《옳소. 우리는 남보다 뒤떨어졌기에 낡은것을 재빨리 혁파개명하려는 일념에서 짧은 기간에 많은 법안을 채택하였소. 하지만 이것은 회의원전원이 다수결로 결정한것이고 상감마마의 재결을 받아 공포한것들이요. 그리고 이 법령들은 이미 실시되였거나 실천되고있으며 앞으로는 전부 실현될것이요.》
《어쨌든 군국기무처는 내가 새로 내놓은 20개조개혁안과 맞지 않으므로 해산해야 하오.》
《좋소. 한 나라의 최고립법기관을 한갖 일국의 공사따위가 제 마음대로 없앨수 있다면 군국기무처의 총재관인 나도 해임되겠은즉 나는 한갖 일국의 공사에 불과한 당신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고싶지 않으니 겸하여 령의정과 내각총리직에서도 사임하겠다는것을 언명하오. 실례지만 공사, 이건 당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요.》
멸시조로 이노우에에게 이렇게 언급한 김홍집은 팔걸이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고종과 민비앞에 정중하고도 경건한 태도로 부복하여 아뢰였다.
《량위전하, 소신의 소청을 윤허해주십시오.》
이노우에를 대하는 김홍집의 강건하고도 강경한 태도에 감복한 고종이 부드럽게 일렀다.
《총리대감, 우선 일어나시오, 어서…》
《소신은 윤허를 받기전에는 일어날수 없소옵니다.》
민비는 일본정계의 거물이라고 하는 이노우에와 같은 오만하고 얄미운 왜놈을 보기좋게 쳐갈기는 김홍집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싶은 통쾌감을 느꼈으며 우리 조정에도 김홍집이와 같은 훌륭한 인걸이 있다는 가슴뿌듯한 희열과 함께 경복에 가까운 심정으로 절절하게 당부했다.
《대감, 지내 흥분하지 마세요, 무슨 큰일이나 났다고…》
마지막말은 분명히 이노우에더러 들으라고 한 말인데 그 뜻을 알아차린 이노우에는 발뒤의 민비쪽에 독살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성이 독같이 오른 이노우에는 고종과 민비를 향해 건숭 목례를 하고는 씽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홍집은 이틀날부터 정부에 나오지 않고 집에 있었다. 그를 뒤따라 탁지대신 어윤중이며 외무대신 김윤식을 비롯한 혁신관료들도 사임을 제출하고 정부에 나오지 않아 조선정부는 사실상 와해상태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고종과 민비에게도 골치거리였지만 일본공사 이노우에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이였다. 그는 이 사태를 빨리 수습하라는 본국정부의 지령과 독촉을 매일과 같이 받았다.
고종과 민비의 거듭되는 절절한 당부와 스기무라서기관을 통해 보내온 이노우에의 량해의 구두친서를 전해들은 김홍집은 며칠후 다시 정부에 나왔으며 뒤이어 모든 혁신관료들이 다 제대로 재임함으로써 긴장한 사태가 수습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