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7

 

자정이 지나고 2시도 지났으나 일본공사관 2층에 있는 이노우에의 집무실에서는 여전히 초불이 타고있었다. 재털이에는 꽁초가 수북이 쌓였다. 문서를 놓고 이노우에와 이마를 맞대고있던 스기무라가 하품이 나오는 입을 가리우며 잠내나는 소리로 말했다.

《각하, 그만하지 않겠습니까?》

이노우에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잘라말했다.

《무슨 소리, 이달 동지날에는 종묘에서 서고식을 가져야 하오.》

《서고식은 아무래도 미루어야 할것 같습니다.》

이노우에가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조선국왕이 앓는답니다.》

《앓아?… 무슨 잔꾀를 부리는게 아니요?》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음.》

이노우에는 볼따귀의 상처자리를 매만졌다. 그는 종묘서고식은 좀 미루더라도 군국기무처의 해산과 새 정부를 내오는것은 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고 힘주어 언급했다.

스기무라는 그건 이미 조선국왕과도 합의를 보았으니 어려울것 같지 않다고 대척했다. 그는 입으로는 긍정을 표시하면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또 아무리 새 정부를 세워도 더우기 국왕더러 친일을 하겠다고 종묘에 서고시켜도 이 나라에 왕후인 민비가 있는 한 우리의 정략은 실현하기 어렵다는것이였다.

이노우에는 이제는 홰대에 앉아있던 암닭을 우리에 몰아넣었으니 울고싶어도 소용없다고 웃었다.

스기무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 밤은…》

이노우에가 그를 제지시켰다.

《가만가만, 문건도 오늘밤중으로 끝장을 보아야겠으니 서고문을 한번 읽어보시오.》

스기무라가 한심스러워했다.

이노우에는 턱으로 벽의 현액판을 가리켰다. 스기무라는 벽을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린다.

《 <만사는 끝장을 보아야 아름답다> …자, 그럼 들으십시오.》

스기무라는 문서를 들고 읽었다.

《 <…나의 황조, 우리 황조는 계설하시와 후손에게 전계하신지 503년을 력하온바 짐의 세대에 이르러 시운이 일변하고 인물이 개양하였으며 우방 일본이 모충하여 전의의 협동으로써 오직 자주독립을 이룩하여 이미 우리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하려 하오니 짐소사 어찌 천시를 봉하여 우리 조종의 유업을 보존하지 아니하며 분발하여 일본과 협력하여 우리 전인의 기업을 더욱 빛나게 하지 아니하리오.…>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괜찮게 되지 않았습니까?》

《가만.》

이노우에가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지르고 방안을 거닐었다.

스기무라는 슬쩍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3시 45분을 가리키고있다.

《각하, 곧 파루가 되겠습니다.》

《가만있소. 서고문에 문제가 있소.》

《예?!》

《에, 서고식을 불가피하게 해를 넘기는 조건에서 서고문에서 <후손에게 전계하신지 503년을 력하온바…> 운운은 맞지 않소. 래년이면 504년이요.》

스기무라가 수긍했다.

《예, 그건 고치겠습니다.》

《다음 중요한건 <짐의 세대> 니 <짐소사> 운운이 문제인데 짐은 황제의 호칭이란말이요.》

《그건 각하께서도 시인하신 문제가 아닙니까? 조선국을 독립국으로 표방시키려면 형식적으로나마 황제국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하지만 조선국왕을 황제라고 하면 우리 천황과 동렬에 놓이지 않는가!》

《그럼 어떻게?…》

이노우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에도막부때에 도꾸가와장군을 대군이라고 했듯이 조선국왕을 대군주라고 합시다. 존칭은 페하라고 붙여서 말이요. 그래서 국왕은 대군주페하, 왕비는 왕후페하, 세자는 왕태자전하, 세자비는 왕태자비전하… 어떻소, 이렇게 부르는게?》

스기무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까짓 엽전왕 아무렇게나 부릅시다나.》

이때 벽시계가 네점을 쳤다. 시계종소리가 고즈넉한 밤에 유난스레 크게 울렸다.

스기무라가 못 견디겠다는듯 안락의자에 주저앉으며 두손을 쳐들었다.

그를 곁눈질로 보며 이노우에가 빈정거렸다.

《스기무라, 하느님은 근면한자를 돕는 법이요.》

한해도 다 저물어가는 갑오년 12월17일 일본의 강요로 군국기무처는 강제해산되고 친일적인 새 정부가 구성되였으며 이로써 부르죠아적 갑오개혁도 좌절파탄되였다.

갑오개혁의 실패는 외래침략군이 둥지를 틀고앉아 내정에 란폭하게 간섭하는 조건에서 나라의 독립과 사회적진보란 결코 이루어질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김홍집을 비롯한 혁신관료들이 부르죠아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폭력으로 일본침략자를 내모는데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할것이였다. 우선 이 시기 가장 혁명적인 반침략세력을 이루고있는 농민군부대들에 의거하여 광범한 반일력량을 총동원해서 적들에게 폭력으로 맞서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침략자들에 대해서는 외교적절차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왜적에게 폭력으로 맞서나갈수 있는 길은 오직 농민군과 련합하는 길뿐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농민군과의 련합을 거부하였다. 혁신관료들은 봉건량반출신으로서 다만 나라의 근대화를 지향한 혁신관료일따름이였다. 하기에 그들은 민족이 단합하여 왜적을 치자는 농민군의 절절한 호소를 귀담아듣지 않았으며 그것을 외면하였다. 이리하여 구경은 개혁사업자체까지도 망쳐먹게 되였던것이다.

갑오개혁은 갑오농민전쟁과 마찬가지로 일본침략자들의 강도적인 내정간섭과 간악한 파괴모략책동으로 말미암아 실패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19세기말 우리 나라는 민족적독립을 고수하고 근대화를 실현함으로써 사회경제적진보를 이룩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끝내 놓쳐버리고말았다.

일본침략자들은 군국기무처와 그의 개혁사업을 말살한 후 국왕 고종더러 종묘사직에서 《홍범 14조》를 강압적으로 발표하게 하였다.

조선의 기본법전이라고 할수 있는 친일을 골자로 한 이 《홍범 14조》는 조선에 대한 예속화정책을 규정한 횡포한 내정간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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