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 회)
제 7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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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무실에는 씁씁하고 향긋한 약냄새가 떠돌았다. 9. 18사변후 관내로 들어가버린 은행업자의 응접실이였던 이 방에 놓여진 원탁이며 의자, 책상, 벽장 등의 가구들은 모두 둔탁하고 묵직한것들뿐이였다.(오의성에게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기름때가 거멓게 밴 마루바닥에는 중국식창살무늬의 그림자가 길게 이그러진 모양으로 비꼈다.
오의성은 창곁에 뒤짐을 지고 버티고 서서 바깥을 내다보며 거리쪽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며 발구름소리,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사령부가 라자구로 옮겨온 이후로 온 시가가 이렇게 떠들썩하기는 처음이다.
문득 거리쪽으로 뻗은 골목을 통하여 언뜻언뜻 지나가는 낯선 대렬이 바라보였다.
대오의 앞장에는 백마를 탄 대장이 섰다. 그뒤로 붉은 기발을 든 기수, 나팔수… 그다음으로 대렬이 보무당당히 척척 행진해간다. 대렬의 병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새 군복에 새 배낭을 메였으며 어깨우에서는 보총이 번쩍거린다.
오의성은 뒤짐을 진채로 주먹을 꽉 부르쥐는가 하면 입귀아래로 흘러내린 밤빛의 팔자수염끝을 씰룩거리기도 하였다.
현관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몸이 옆으로 퍼진 장교가 승냥이털반외투앞자락을 열어제끼고 뛰여들어왔다. 그는 오의성의 뒤에 와서 숨을 헐떡거리며 부르짖었다.
《사령님이 조선공산군의 입성을 허락했습니까? 려장님이 가서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오의성은 얼굴만 뒤로 돌리였다. 얼마전에 동산호의 부대에서 채려장부대로 넘어온 고참모였다. 승냥이털반외투앞자락을 헤쳐놓은 그의 말상인 얼굴에서는 땀물이 철철 흐르고있었다.
오의성은 그의 승냥이털반외투가 지금에는 참을수없이 역겨워나며 울화가 터져올랐다.
그는 고참모에게로 다가가 그 반외투의 목깃을 와락 거머쥐고 마구 흔들어댔다.
《여름이 다 됐는데 아직도 이따위 마적껍대기… 마적껍질을 벗지 못해?》
고참모는 쓰러질듯이 비칠거리다가 똑바로 섰다.
《사령님… 사령님…》
《썩 물러가! 무슨 큰 변이 났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게냐?》
《채려장님께서는 저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할게라고 했습니다. 리광일당에 대한 사살건을 들고나오면… 그때에는…》
《썩 물러가! 너희놈들이 감히 나를 가르치려구? 썩 물러가!》
고참모는 겁에 질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비실비실 뒤걸음질쳐나갔다.
집무실에는 오의성 혼자 남았다.
거리쪽에서 터져오르는 조선사람들의 만세소리가 메아리쳐와 창유리들이 지르릉지르릉 울었다.
오의성은 무슨 일이 터질것 같은 심란한 생각에 책상쪽으로 무겁게 걸어가서 호피가 깔린 회전의자에 주저앉았다. 무엇을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고 여느때없이 두손이 거북해졌다. 그는 책상모서리에 던져진 소설책에 눈길이 미치자 무심결에 그것을 들었다. 《삼국연의》였다. 요새 와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는 진한장에게 소설책을 읽히고 그것을 들으며 밤시간을 보내는 때가 종종 있었다.
지난밤 진한장이 읽다가 접어놓은 책장을 펼친 그는 까다로운 상형문자들의 글줄에 눈길을 박고 움직일줄 몰랐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기의 문맹을 개탄하며 옆방에 대고 구슬픈 목소리로 소리쳤다.
《게 누구 없느냐-?》
옆방에서 몸이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해맑은 장교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달려나와 그의 옆에 서서 허리를 굽혔다.
오의성은 그에게 소설책을 내밀었다.
《아무데나 읽어라… 속이 시원해질데를… 오늘은 웬일인지 가슴이 클클하구나…》
《호궁을 탈가요?》
《아니 책을 읽어라.》
얼굴이 해맑은 장교는 그의 옆에 다가가서 자장가를 부르는듯 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약간씩 억양을 넣어가며 읽어내려갔다.
《때는 마침 깊은 겨울이라 날씨가 무섭게 춥고 하늘에는 구름이 빽빽하게 끼여있었는데 몇마장을 가지 않아서 홀연 북풍이 몰아치며…》
목단추를 끌러놓고 호피속에 몸을 묻은 오의성은 스르르 졸음에 취하는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나 그는 책읽는 소리는 전혀 듣지 않고 바깥에 정신이 가있었다. 현관문소리가 나고 발자욱소리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여러 사람이 방안에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오의성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뛰여일어났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눈정기가 번쩍거리는 청년
청년
《사령님, 안녕하십나까?
오의성은
《아,
《제가 혹시 독서를 방해한게 아닌가요?》
《원… 무슨 말씀을… 어서…》
지방색이 짙은 동북말씨에 인이 박인 오의성은
그는
술렁거리던 방은 인차 조용해졌다.
오의성은 50이라는 나이와 자기의 군직에 어울리는 풍채좋은 몸을 의자등받이에 기대며 팔자수염밑에 음험한 미소를 머금었다. 벌겋게 충혈된 그의 눈에는 호의만 비껴있지 않았다. 그 눈에서는 날카로운 경계의 빛과 호기심 그리고 오만한 그 무엇이 끓고있었다.
문득 그는 철퇴같이 크고 든든해보이는 두주먹을 원탁우에 올려놓으며 비만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소인은
《오사령님, 그건 너무 과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아까 보니까-
그가 터뜨리는 웃음소리에 응접실의 기둥뿌리까지 울리는듯 하였다. 뜻밖의 물음이며 엉뚱하게 들이대는 청이였다.
《정말 사령님은 롱담이 대단하십니다. 만여명 군사를 거느리신 사령님이 이런 청을 한다고 누가 곧이 듣겠습니까. 진담이라도 그렇지요. 바꾼다는게야 말이 됩니까? 우리는 서로 왜놈들과 싸우는 우군인데 총 몇자루가 뭐겠습니까.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쯤한 총 몇자루야 왜놈들과 한바탕 싸우면 얻을수 있는건데 더 드릴수도 있습니다!》
오의성은 귀바퀴가 벌겋게 되여 한손을 내흔들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 그건 내가… 롱말도 진담도 아니고 그저… 그저… 해보는 소리요.》
《허허허… 오사령께서 이렇게 허물없이… 격식도 없이 맞아줄줄은 몰랐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