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8

(1)
 

군량미인 집채같은 쌀가마니무지가 쌓여있는 언덕에서 왜놈보초들이 한군데 모여 화토불을 쪼이고있었다. 하늘엔 달빛도 별빛도 없는 캄캄칠야이지만 화토불빛으로 주변은 환하였다.

웬 녀인이 쌀무지곁으로 발볌발볌 다가가고있었다. 람루를 걸치고 머리는 헝클어졌는데 나이를 대중할수 없게 얼굴엔 온통 검댕이칠이다. 사람이라기보다 흡사 귀신모양새인 그는 베보자기에 싼 세개의 석유병을 품에 안고있었다. 쌀가마니무지에 다가선 그는 왜놈보초놈들을 살폈다.

두런거리는 놈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 가서 쌀무지를 보고 오라!》

《오장님두, 아 이 추운날 그 무거운 쌀가마니를 어느놈이 업어가겠습니까, 끌어가겠습니까?》

《다른 놈들은 뜨뜻한 조선온돌방에서 딩굴겠는데 우리 보초들은 줄창 한지에서 떨어야 하니, 젠장…》

녀인이 쌀가마니무지에 몸을 가리우고 허리를 폈다. 화토불빛이 긴장한 그의 얼굴을 비쳤다. 그는 변옥절이였다. 살며시 몸을 일으킨 옥절은 안고온 석유병베보자기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는 며칠동안 곡식을 걷어들인 논밭에서 이삭주이를 하였다. 그것을 절구로 찧어 쌀을 내여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이 세병의 석유를 샀다. 그는 쌀가마니무지주변을 돌아가며 석유를 뿌렸다. 쌀이 다 타버려 밤새 추위에 떤 놈들이 아침도 못 먹고 굶을 생각을 하니 아슬아슬한 속에서도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옥절이가 왜놈들과의 이런 싸움길에 나선것은 달포전이였다. 짐승같은 왜놈들에게 할아버지를 잃은 후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것만 같았다. 옥절은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강에서 개처럼 죽어너부러진 왜놈의 더러운 시체를 보았을 때 제 목숨을 버리는것이 너무도 허무한짓이며 살아서 놈들을 끝까지 복수해야 한다는 의분이 온몸을 태우는것이였다. 이후로 그는 왜병들이 길어먹는 우물에 서슬을 치거나 천막을 불태우는 등 놈들의 눈을 피해가며 제힘껏 복수전을 벌렸었다.

석유를 다 뿌린 옥절은 품에서 성냥을 꺼내였다. 혹시 젖을가싶어 유지로 싸고싼 성냥은 첫 가치에 대번에 불이 확 일었다. 그는 그것을 석유내가 코를 찌르는 쌀가마니무지밑에 모아놓은 검불에 갖다대였다. 불은 옥절이가 생각한것보다 더 빨리, 더 잘 붙었다. 쌀가마니들에 불길이 달리여 퍼져나갔다. 불길속에서 낟알튀는 소리가 탁 탁 울렸다.

옥절은 혹시 불이 꺼지면 다시 성냥을 켜려고 잠간 지켜서있었다.

불길은 점점 가마니무지우로 기세좋게 번져져올라갔다. 주위가 환해졌다. 그제야 불길을 발견한 왜놈보초소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불이다!》

드디여 옥절은 허리를 수그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옥절이를 발견한 왜놈보초들이 고함을 질렀다.

《서라!》

《저쪽이다!》

왜놈들이 지르는 웨침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탕탕 울리고 옥절의 머리우로 불찌가 쁑 쁑 지나갔다.

종주먹을 부르쥔 옥절은 죽을힘을 다하여 달렸다. 짚신이 벗겨져나가고 치마말기가 무엇엔가 걸려 찢겨지고 나무가지가 그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그루터기가 종아리를 긁었으나 그는 그런것도 느끼지 못했다.

왜놈들이 여전히 악청을 지르고 총을 쏘며 그를 뒤쫓아왔다.

《산채로 잡으라!》

칼을 뽑아들고 뒤따르는 왜놈장교가 고아대고 총검을 든 왜병들이 그를 기를 쓰고 추격했다.

옥절은 나무뿌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 다시 달렸다. 귀전에서 피융 피융하는 총탄소리가 아츠럽게 울리고 머리우에서 총알에 부러진 나무아지들이 떨어져내렸다.

산정에 올라선 옥절은 그만 우뚝 멈춰섰다. 눈아래로 천길만길 아뜩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아섰던것이다.

옥절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총을 꼬나든 왜병들이 그에게로 다가오고있는것이 어둠속에서도 보였다. 진퇴량난의 위급한 정황에 부딪쳤으나 옥절의 기상은 태연했다. 고개를 들고 어두운 하늘을 우러르던 그는 눈을 감고 벼랑아래로 몸을 던졌다.

아연해진 왜병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잠시후 절벽끝으로 다가온 놈들이 아래를 굽어보고 전률하듯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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