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10
궁성시위대에서 집으로 돌아온 엄병무는 포개놓은 이불에 기대여 누워있었다.
아래방에서 아버지가 목기를 깎는 소리가 들리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저녁동자질하는 소리가 달그락거릴뿐 집안팎은 조용하였다. 늘 재잘거리는 태순이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것으로 보아 어데 놀러나간 모양이였다.
서창에 빨갛게 어렸던 저녁락조도 스러지고 방안이 어둑해졌으나 그는 등잔불을 밝힐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매일 밤 몇시간씩 등불밑에서 씨름하던 영어공부도 요즘은 하는둥마는둥하였다. 병무는 저로서도 알수 없는 회의심과 권태에 잠겨있었다. 그것은 온 한해 세상을 들썩하게 하던 동학군도 왜놈들에게 진압당하고 천지개벽이 일어날듯하던 군국기무처의 갑오개혁도 흐지부지되였을뿐만아니라 왜놈들의 강요로 군국기무처마저 해산당한 사실에 기인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청일전쟁의 마당으로 화한 삼천리강토는 왜놈들의 군화와 말발굽에 짓이겨지고 사람들의 살림은 더 궁핍해졌다.
나라형편이 왜 점점 이 모양으로 되여가는지 그는 괴롭도록 안타까왔다. 1년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런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아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정이 되려는 뜻밖에 없었다. 그때의 병무는 얼마나 천진하고 단순하고 고박했던가. 그러나 산에서 내려와 세파에 휘말려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아니, 고민이 커졌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쁨에 넘친 태순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머니, 오빠가 왔어요!》
(오빠라니, 태봉이가?)
생각하기를 그만둔 병무는 얼른 몸을 일으켜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아래방문이 벌컥 열리며 태순이의 손에 이끌려 천태봉이가 방안에 들어섰다.
방안의 사람들은 놀란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봉이가 오래간만에 나타난것도 놀라왔지만 보다는 털벙거지를 쓰고 검정동달이에 등에는 화승총을 멘 그의 관군복차림새때문이였다.
태봉이는 말없이 손에 든 보짐과 함께 화승총을 벗어 벽에 기대세우더니 엄초관과 공씨앞에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절을 하였다.
좀 당황한 기색으로 태봉의 인사를 받은 엄초관은 그의 차림새를 다시금 훑어보더니 의아쩍게 입을 열었다.
《그새 어디 가있었나? 한데 그 관군복은?》
태봉이가 좀 게면쩍게 대꾸했다.
《까마귀무리에 섞여돌아가자니 까마귀흉내를 낸겁니다.》
그제야 태봉이가 변복을 했다는것을 알아차린 엄초관과 병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거센 숨을 몰아쉬던 태봉은 고개를 떨구고 괴롭게 말했다.
《오늘 우리 전대장께서 처형되였습니다.》
《응?!》 엄초관이 눈을 치뜨더니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아까운 사람을 또 잃었구나. 저 흉포한 왜놈들이 조선사람을 다 죽이는구나.》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깃들었다.
이윽고 병무는 태봉이를 데리고 웃방으로 올라갔다. 저도 따라가고싶어 바재이는 태순이를 눌러놓고 부엌으로 내려간 공씨는 얼마후 그들에게 저녁밥상을 차려주었다. 콩나물밥에 시래기국, 열무김치와 백하젓이 전부였다. 공씨는 오래간만에 집에 들린 태봉이에게 초라한 밥상을 차려준것이 미안스러운듯 서둘러 내려갔다.
태봉이가 보짐을 헤치고 술 한병을 꺼내들더니 《
다시 웃방으로 올라온 태봉은 밥상앞에 앉았으나 숟가락을 들념을 못했다. 전봉준대장을 잃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면 저러랴싶어 병무도 심중이 무거웠다. 그러나…
《눈물은 내리고 밥숟갈은 오른다는데 어서 들게.》
병무의 권고를 받고서야 마음을 다잡고 수저를 든 태봉은 끝내 밥그릇을 절반도 비우지 못했다.
밥상을 물린 태봉은 병무의 얼굴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넌 지금도 궁성시위대에 나가니?》
병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위대도 왜놈들이 틀어쥐고있니?》
《아니, 우리 시위대는 미국군사고문들이 훈련주고있다.》
《미국이?…》 태봉의 눈에는 호기심이 어렸다. 《그들은 어떻니?》
병무는 심드렁하게 대척했다.
《그놈이 그놈이야.》
《그럴테지.》 쓰겁게 뇌인 태봉은 울기에 찬 소리로 내뱉았다. 《도대체 이 나라엔 언제 가야 군대같은 군대가 생긴다더냐!》
말을 마친 태봉은 두손바닥으로 량무르팍을 꾹 눌러잡고앉아 미동도 없었다.
병무는 태봉의 거동을 은근히 지켜보았다. 그가 말하는 품이며 행동거지가 별로 어른스럽고 진중한것이 이전에 광대노릇하면서 막돼먹게 놀던 때와는 판 달라보였기때문이다.
점도록 말이 없는 태봉이에게 병무가 말을 건넸다.
《넌 이젠 어쩔셈이가?》
태봉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꾸했다.
《전라도로 가련다. 옥절이를 찾아야겠다. 그 불쌍한게 그새 죽지나 않았는지…》
태봉의 말에 병무는 동정을 느꼈다.
《잔치하려니?》
《잔치?》 태봉은 어처구니없는듯 코웃음을 치더니 이어 결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나라가 칠성판에 올랐는데 잔치라니?… 난 전선생님의 뜻을 따르련다. 끝까지 토왜구국하겠다. 이 땅에서 왜놈들을 깡그리 몰아낼 때까지 싸우겠다. 그 길만이 우리 백성들이 살수 있는 길이다.》
가뜩이나 날카로운 태봉의 눈빛이 더욱 예리하게 번쩍였다. 그는 자기가 할바를 뚜렷이 알고있었다.
병무는 태봉이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는 확실히 딴사람이 되였다.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옳바르고 심지가 또한 얼마나 굳은가. 태봉이가 서당의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다는것을 병무는 잘 알고있었다. 공부한것을 셈한다면 태봉이는 자기 병무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자기는 서당에도 다녔고 더우기 10여년세월 산속에서 병서를 비롯하여 참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병무는
태봉이와
병무와 태봉은 깊어가는 밤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끝없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