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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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마루의 길섶에 돌무지가 있고 그곁의 커다란 구름나무가지에는 뒤축 물러난 짚신짝들이 그 무슨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백호를 끌고 고개로 오르던 천태봉은 돌무지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백호도 지쳤는지 걷는 다리에 힘이 없었다. 전라도땅에 들어선지도 벌써 며칠째다.

태봉은 돌무지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백호에게 중얼거렸다.

《길손들이 무사하라고 빌고 가는 돌무지가 분명한데 우리도 쉬여가자.》

훈향을 실은 봄바람이 살살 불어오는데 주변은 물론 건너편 산기슭에 진달래며 철쭉꽃이 불타듯 피여났다.

서산마루에 걸린 저녁해를 바라보며 태봉은 오늘밤은 이 산속에서 쉬여가야겠다고 작정했다. 문득 어디선가 봄바람에 실려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왔다. 태봉은 고개를 들고 기웃거렸다. 산속의 종소리, 가람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틀림없었다.

무릎을 짚고 끙 일어선 태봉은 백호를 끌고 종소리를 따라 걸었다. 종소리가 멎고 이번엔 법고며 광쇠, 목탁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에 우는 추녀의 풍경소리가 들렸다.

나무가지사이로 안침진 곳에 자리잡은 가람이 보였다. 그곳으로 내려간 태봉은 절문앞에 백호의 고삐를 매여놓고 절간안으로 들어갔다. 절간마당에 들어선 태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 퇴색하기는 했어도 아직은 우아한 법당이 추녀를 추켜들고 서있었다.

마당구석에 있는 우물에서 불목하니 (절간의 화부)인듯한 사나이가 커다란 바가지로 쌀을 일고있었다. 그는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태봉이를 보자 흠칫 놀라 일어섰다. 그는 태봉이의 관군복인 동달이차림과 등에 걸멘 총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입을 벌렸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나리께서 어떻게 우리 가람에…》

머리를 동인 수건우로 상투가 삐죽한 그 사나이는 무척 겁에 질린 눈치였다.

《내 주지스님에게 좀 할 말이 있소.》

사나이는 어쩔지 몰라하더니 떠듬거렸다.

《저희네 절간에는 아무도 온 사람이 없삽고 속인이라고는 이 불목하니 하나뿐이옵니다.》

불목하니의 동에 닿지 않는 소리를 듣고 태봉은 의아해서 그를 건너다보았다.

《좌우지간 이 절 주지스님을 좀 만납시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지금 저녁불공을 드리는중이여서… 퇴에 앉아 잠시 기다리십시오. 곧 끝이 납니다.》

하고나서 불목하니는 허둥거리며 법당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뒤 목탁소리가 멎더니 법당문이 열리며 과히 늙지 않은 중이 나왔다. 그는 퇴아래로 내려와 두손바닥을 맞붙이고 합장배례하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사장삼을 떨쳐입은 중은 자기가 주지라면서 태봉이더러 어떻게 자기네 가람에 들렸는가고 물었다. 그의 얼굴에도 몹시 불안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내 주지스님께 부탁이 있소이다. 들어주시겠소?》

《무슨 부탁이온지 말씀하십시오.》

《내 오늘 이 절에서 하루밤 신세를 지고 가자고 하는데 거절 않으시겠는지?…》

주지는 얼굴의 긴장을 풀더니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네, 그야 어려울게 있겠소이까. 어서 올라가십시다.》

태봉이를 이끌고 법당을 빙 돌아 뒤로 간 주지는 한 문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췄다.

《북쪽방이여서 좀 침침합니다. 불목하니더러 곧 불을 때라고 하겠습니다.》

주지가 물러간 후 태봉은 방안에 들어섰다. 크지 않은 방인데 구름노전을 깔고 구석에 이불 한채와 목침 하나가 놓여있었다. 특이한것은 벽에 호랑이족자가 하나 걸려있는데 그 호랑이는 흔히 보게 되는 날카로운 이발을 드러내고 아가리를 쩍 벌린 사나운 인상이 아니라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고있었다. 그것을 보고 태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태봉은 대자대비한 세존(부처)의 훈계를 받는 가람에서는 범도 선량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족자속의 호랑이에게 눈을 끔쩍이며 이죽거렸다.

《산속의 대왕님께서 인상이 그래가지구서야 오늘 밤 나를 지켜주시겠소이까?》

날이 어둡자 불목하니가 방안의 등잔에 불을 밝히고 이어 밥상을 들여왔다. 목기에 담은 감투밥은 흰밥으로 갈라 푼듯한데 보리쌀과 수수쌀이 더러 섞여있고 찬으로는 산나물국에 달래와 드릅나물무침이였다.

기갈이 감식이라고 태봉은 배고프던차라 걸신스럽게 먹었다. 밥상을 물린 그는 로독과 식곤증에 몰려 인차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는지. 태봉은 푸른 달빛이 흘러드는 깊은 밤중에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여났다. 벌떡 일어나앉은 그는 본능적으로 머리맡의 화승총을 끄당겨잡으며 문밖의 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랑자, 제발 참으시오이다.》

《주지스님, 일없습니다.》

《그래두.》

《왜놈에게 붙어사는 저런 관군놈은 없애버려야 해요.》

《뒤일을 생각하셔야지요, 우리 가람을…》

《좋아요. 오늘 밤은 참겠어요.》

《고맙소이다. 남무관세음보살.》

발자욱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갔다.

주지스님이란 사람은 목소리만 들어도 이 절의 주지란것이 분명한데 자기를 죽이려던 랑자, 처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아무튼 오늘밤은 무사하리라는 생각에 태봉은 요우에 쓰러져 다시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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