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11
(3)
태봉은 말등에서 조심스럽게 화승총을 벗겨들었다가 며칠전 메돼지한테 당한 봉변을 되새기고는 허리춤에서 비수를 뽑아들었다. 노루는 허기졌는지 풀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태봉은 손을 쳐들어 노루를 향해 비수를 힘있게 던졌다. 순간 어디선가 《땅!》하고 총성이 동시에 울렸다. 태봉은 엉겁결에 덤불나무뒤에 몸을
숨겼다.
누군가 묵은 락엽무지속에 발목을 묻으며 걸어갔다. 죽어넘어진 노루곁으로 다가가는 그를 보던 태봉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사냥군의
차림새가 며칠전 절간의 숲속에서 만났던 그 총각과 다름이 없었던것이다. 감물올린 저고리며 개털등거리… 메돼지로부터 자기를 구원해준 그 총각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태봉은 다시한번 놀라며 목을 움츠렸다. 남복을 했어도 사냥군총각의 자태가 옥절이와 너무도 같았기때문이였다.
노루곁에 이른 총각이 무릎을 꺾고 앉더니 죽은 노루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하더니 이어 그의 표정이 긴장해졌다. 노루의 목에 박힌 비수를 본 모양이다. 피묻은 비수를 뽑아든 총각이 얼굴을 쳐들고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덤불뒤에서 그를 지켜보고있던 태봉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옥절이가?!…》
틀림없는 옥절이였다.
태봉은 격정에 넘쳐 소리쳤다.
《옥절이!》
옥절이도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다음순간 태봉이의 관군복색을 본 옥절이의 눈빛이 홱 달라졌다.
《옥절이, 나야, 태봉이야!》
태봉은 두팔을 쳐들고 덮칠듯이 달려갔다.
태봉이를 알아본 옥절이도 뜻밖의 해후에 놀라 어쩔바를 몰라했다. 하지만 이어 그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옥절은 몸을 홱 돌리더니 앞으로 내달렸다.
태봉은 놀라움에 싸여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자기를 보고 달아나는 옥절이가 의아쩍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주먹을 쥐고 옥절이를 무작정 뒤따랐다.
《옥절이, 서라!》
하지만 옥절이는 더 기를 쓰고 달아났다. 태봉이도 입을 강물고 달렸다. 드디여 그들의 사이가 좁아졌다.
《옥절이!》
태봉의 숨가쁜 소리, 헉헉 단김을 내뿜는다.
옥절은 저도 견딜수 없어 우뚝 서버렸다.
《옥절이, 왜 그래?… 왜 달아나는거야?!…》
이렇게 부르짖은 태봉은 옥절이의 두어깨를 힘있게 잡아 자기쪽으로 홱 돌려세웠다.
《내가 얼마나 보고싶었다고… 얼마나 찾았다고…》
격한 태봉이의 말소리가 흐느끼듯 끊어지군 했다.
옥절이도 태봉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를 꽉 그러안은 태봉이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하다.
그들은 산속으로 걸어가고있었다. 태봉이가 앞에서 풀덤불을 와락와락 헤치며 걸었고 고개를 숙인 옥절이가 가끔 침묵을 깨뜨리며 뒤를 따랐다.
태봉의 얼굴은 울분에 넘쳐있었고 옥절이의 목소리는 비분에 차있었다.
《왜놈들이 우리 할아버지를… 흑…》
옥절은 말하다말고 어깨를 떨었다. 태봉이도 흐르는 눈물을 팔소매로 뻑 훔치군 하였다. 변로인은 옥절이 못지 않게 태봉이에게도 그리운 할아버지였던것이다.
그들의 앞에 자그마한 공지가 나졌다. 공지에는 왜놈들의 군용전선주가 서있고 두줄기 통신선이 늘여져있었다.
태봉이가 멎어섰고 옥절이도 걸음을 멈췄다.
옥절이를 한번 건너다본 태봉은 통신전선대를 오르기 시작하였다. 끝까지 올라간 그는 통신선을 잘라버리고 내려왔다. 그는 옥절이와 함께 풀덤불속에 잠복해있었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일본군장교가 케블퉁구리를 멘 두명의 통신병을 데리고 나타났다. 절단된 통신선을 보고 놈들이 수군거렸다.
《바람에 끊어졌나?》
《혹시 비도들이 한짓이 아닐가?》
《비도들이야 다 진압되지 않았나?》
장교가 그들에게 호령했다.
《잔당들은 아직두 날치고있어. 올라가보라!》
병졸 한놈이 전선대를 타고오르자 장교는 다른 병졸에게 저쪽전선대로 오르라고 지시했다.
처음놈이 전선대에 거의다 올랐을 때 태봉이가 그에게 뼘창을 날렸다. 목에 뼘창이 박힌 통신병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전선대를 꽉 부둥켜안았으나 결국 돌덩이처럼 땅우에 쿵 떨어지고말았다.
《엉?!》
왜놈장교가 권총을 뽑아들고 겁에 질려 두리번거렸다.
옥절이가 한손으로 단총을 들고 그놈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공지로 뛰여나간 옥절이가 죽어너부러진 왜놈장교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들고 환성을 질렀다.
《아, 륙혈포!》
그사이 나머지 왜놈통신병을 처치한 태봉이가 보총을 빼앗아 메고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