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 회)
제 6 장
저물어가는 갑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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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오르는 모닥불이 동굴속을 밝혔다. 굴벽에 옥절이의 그림자가 새겨졌다. 두팔로 다리를 휩싸고앉아 세운 무릎에 턱을 고인 옥절은 생각에 옴해있었다.
태봉이가 그의 어깨에 자기 웃옷을 씌워주고 곁에 앉았다.
《옥절아, 우린 이제 어쩌자니?》
옥절이는 미동도 없었다.
그러는 옥절이를 태봉은 의혹에 찬 눈길로 응시하였다. 옥절이가 이전 달리 말수가 적어지고 눈에도 늘 랭혹한 빛이 어려있고 더구나 웬일인지 자기를 피하려고 하는것이 아무래도 모를 일이였다.
모닥불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옥절이가 싸늘한 목소리로 나직이 내쏘았다.
《왜놈들을 죽일테야!》
예전과 다른 옥절이의 태도가 못내 의아하고 궁금스러워 태봉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무슨 일이 있었니?》
《왜놈들이 할아버지를 죽였어!》
옥절은 같은 소리만 곱씹을뿐이였다.
태봉은 늘 사글사글하던 옥절이가 별안간 벙어리마냥 과묵하고 모진 처녀로 변해버린것이 이상하기만 하였다.
문득 옥절이가 입고있는 개털등거리가 태봉의 눈에 마쳐왔다. 무척 눈에 익은 등거리였다. 그러자 불현듯 그것이 옥절이의 할아버지 변로인이 입던 옷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변로인이 온 해포동안 입고다니는, 지어 무더운 삼복철에조차 걸치고다니던 털이 모지라진 누런 개털등거리, 그래서 변로인의 몸의 한부분처럼 여겨지던 그 개털등거리를 태봉이가 어찌 잊을수 있으랴. 그런데 자세히 눈여겨보니 가슴과 잔등쪽에 거멓게 얼룩이 져있었다.
《이건 무슨 얼룩이가?》
태봉이가 의아쩍게 물으니 옥절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할아버지의 피자욱이야.》
그제야 태봉은 변로인이 왜놈의 총창이나 칼에 찔려 잘못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얼마나 심하게 찔렸으면 가슴과 잔등에 다 피얼룩자리가 나있겠는가. 이 순간 태봉의 뇌리에는 소가죽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농민군들의 목을 작두로 자르던 왜놈《토벌》장교의 가증스러운 몰골이 진하게 되새겨졌다.
할아버지를 잊지 않으려는, 할아버지의 원쑤를 기어이 갚으려는 옥절이의 금강석같은 마음이 헤아려져 태봉은 가슴이 저려들었다.
《빨아입으렴.》
무심결에 하는 태봉의 말에 옥절이는 결기있게 대꾸했다.
《빨지 않을테야.》
이윽하여 태봉은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한밤중에 잠을 깼다. 모닥불이 사그러진 동굴속에는 랭기가 스며들었다. 문득 추위에 몸을 옹송그리는 옥절이가 눈에 띄였다. 자기의 동달이를 벗어든 태봉은 옥절이의 어깨에 그것을 살며시 씌워주었다.
숲속으로 찬란한 아침해볕이 스며들었다. 동굴속에서 나온 태봉이는 기지개를 켜고나서 몸놀림을 하였다. 풀잎이며 나무잎새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령롱하게 반짝이고 산새들의 우짖음소리로 숲속은 청신하고도 소연했다. 나무가지에 앉은 한쌍의 고운 산새가 서로 정답게 부리를 비비며 빗쫑 삘리리 기분좋은 소리를 냈다.
옥절이가 어디선가 바가지에 물을 떠가지고 나타났다. 태봉은 그한테서 바가지를 넘겨받으며 물었다.
《너한테 분통이 있니?》
옥절이가 머리를 흔들며 되물었다.
《분통은 왜?》
태봉이는 천연스럽게 대꾸했다.
《얼굴에 바르자고 그래.》
《아이참.》
옥절은 어처구니없는듯 눈을 빨았다.
《녀인들처럼 치장거리로 바르자는게 아니야.》
《그럼?》
《누군지 몰라보게 하자는거지. 복면대신에 분면을 하고 왜놈들을 치자는거야.》
그제야 옥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얼굴에 희박처럼 분을 발라 누군지 모르게 위장한 태봉이와 옥절은 일본군의 기마순찰대나 일본군초소놈들을 처단하기도 하고 왜놈들의 병참기지나 수송수레, 수송선을 습격하여 군수물자를 불태워버리거나 물속에 처넣기도 하였다.
누군지 모르게, 지어 남녀도 분간할수 없게 얼굴을 하얗게 분칠하고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태봉이와 옥절이를 두고 왜놈군대나 친일매국노들은 《분면당》이라 부르며 벌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