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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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박대감의 집이라면 서울장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키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대궐같은 으리으리한 기와집, 드넓은 마당의 한쪽으로 치우쳐 정원이 있는데 갖가지 나무와 기암괴석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화강석받침대우에 놓인 류선화며 석류, 참대화분들이 한여름의 무더운 열기와 습기속에서 푸르싱싱하게 자라고있었다.
너렁청한 사랑방의 두 벽을 꽉 채운 자개박이장농들, 다른 벽을 가리운 기명화초를 그린 6첩병풍, 알른알른하게 옻칠한 네모난 자개박이탁, 그우에 원화기(전화기)가 놓인 그 탁앞에 이 집 주인인 내무대신 박영효가 앉아있었다.
그는 자기 맞은편에 수집은듯 고개를 숙이고있는 젊은 녀인을 정겹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고개를 숙이고있소, 부인?》
흰 얼굴에 가리마를 반듯하게 내고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예쁘장한 녀인이 진주같이 희고 가쯘한 이를 드러내보이며 할기죽 웃었다.
《미천한 소첩이 존귀하신 금릉위대감을 어찌…》
《하, 또 그 소리요? 왕후페하께서 궁안의 미녀들중에서 고르고골라주신 부인을 맞으니 10년타향살이의 시름이 씻은듯이 가셔졌소.》
《중전마마께서 마련해주신 이 집과 대감님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모시겠나이다.》
이때 탁우에서 원화기소리가 울렸다.
박영효가 미소를 띠우고 안해에게 턱으로 원화기를 가리켰다.
《받아보오.》
《무서워요.》
《무섭다…》
영효가 혼자소리처럼 뇌이며 거드름스럽게 송수화기를 들었다.
《나요… 아, 협판이요?…》
전화는 내무협판 유길준이한테서 온것인데 양주목에서 란이 일어났다면서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니 대신은 곧 내무아문으로 출사(출근)해야겠다는것이였다.
《마차를 보내오, 응.》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걸어놓는 영효에게 안해가 겁기어린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왜, 또 일본으로 쫓겨갈가 그러오? 다시는 가지 않소! 다시는!》
호기있게 말한 박영효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자기 집 대문앞에 멎어선 쌍두마차를 타고 내무아문으로 나간 박영효는 자기밑의 협판인 유길준과 마주앉았다.
유길준은 양주목에서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관아로 밀려갔는데 총리가 없어 군무대신 조희연에게 보고했더니 그는 당장 진압하겠다고 방금전에 왕궁시위대를 그곳으로 파견하였다고 말하였다.
《아니, 대군주페하께 상주도 안하구?》
평소에 조희연을 좋지 않게 보면서 그에게서 건덕지를 잡으려고 늘 눈을 밝히던 박영효는 뜻밖에 그의 실책을 발견하자 쾌재를 부르고싶을만큼 기뻤다.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마차를 되집어타고 곧장 죽동 조희연의 집으로 간 그는 《국태민안》이요, 《가급인족》이라고 단구를 써붙인 솟을대문앞에서 내려 호기있게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대문이 열리더니 키가 작달막하고 뚱뚱한 몸을 온통 비단천으로 휘감은 조희연의 처가 분칠한 낯에 웃음을 한가득 띠우고 나타났다.
《아이구머니나! 내무대신님께서 우리 집에 다 오시다니요?》
《부인, 대감을 만나자고 왔습니다.》
《아이구, 한발 늦으셨네요. 방금전에 일본군을 위문한다고 일본공사관으로 가셨는걸요. 일본군복에 훈패까지 가득 달고말이예요. 호호…》
조희연의 녀편네는 입이 함박만해서 자랑했다.
박영효는 미간을 모았다. 일본군복을 입다니? 신제(새로 제정한)군복은 아직 상감께서 재가하시지도 않았는데… 그는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해 또 물었다.
《분명 일본군복을 입고 가셨는가요?》
《그러문요. 그래서 내가 꼭 일본장교어른같다고 말해주었는걸요.》
조희연의 처는 남편이 떠나가면서 이쯤이면 이노우에각하도 박영효보다 자기를 더 믿을것이라고 하던 말만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인사말도 없이 흘쩍 떠나가버리는 박영효의 뒤에 대고 입을 비쭉거렸다.
《흥, 저는 일본군복도 못 입는 주제에 …》
박영효는 그길로 고종의 편전으로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