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3

 

총리대신 박정양, 내무대신 박영효, 군무대신 신기선이가 고종의 편전에 부복하고있었다.

얼굴에 심히 노한 기색을 띤 고종이 흰 버선발로 그들의 앞을 오락가락하였다. 세운 한쪽 무릎우에 두손바닥을 포개얹은 민비는 싸늘한 눈초리로 박영효를 지켜보았다.

부복한 세 대신의 머리맡에서 걸음을 멈춘 고종이 어성을 높여 물었다.

《시위대를 페하고 훈련대에 왕궁호위를 맡겼다는게 사실이요, 총리대신?》

총리 박정양을 제쳐놓고 박영효가 먼저 입을 벌렸다.

《페하, 호위대의 교체는 이미 페하께서 재가하신바이므로 실시함이 가하다고 사려되옵니다.》

《나는 총리한테 묻고있소.》

《페하!》

박영효가 나직이 그러나 절절하게 부르짖으며 한무릎 나앉았다. 고종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경들은 짐이 시위대를 꾸리기 위해 고심참담한것을 잊었는가!》

박영효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

《페하! 페하께서 그처럼 심혈을 기울여 꾸리신 그 시위대가 지난해 왕궁습격을 막아내지 못했을뿐더러 지금 역시…》

고종이 벌컥 화를 냈다.

《그만하지 못할가! 내무대신은 무슨 심사로 시위대와 훈련대의 교체를 계속 고집하는가!》

박영효는 높아진 고종의 음성에 머리를 숙였다. 민비는 그에게서 시종 눈길을 떼지 않고있었다.

(박영효가 감히 페하의 분부를 거역해! 갑신때 일본을 등에 업고 우리 민씨일족의 멸망을 시도하던 그 대역부도죄를 덮어버리고 내무대신의 요직에 앉혔는데… 음.)

고개를 쳐든 박영효가 천연스럽게 뇌까렸다.

《페하, 신은 다만 페하의 재가를 집행하려는 의도외에 다른것은 없사옵니다.》

《그게 짐앞에서 하는 진심인고?》

자기를 주시하는 민비의 예리한 시선을 감촉한 박영효는 눈을 감고 고패를 숙였다. 그의 뇌리에는 얼마전 스기무라서기관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훈련대와 시위대의 교체는 우리 일본의 대조선정책수행에서 관건적문제인 동시에 로씨야세력의 침투를 제압하는 시급한 문제임을 자각하고 힘있게 내미시오. 보꾸상은 조선정부에 파견된 우리 공사관원임을 잊지 말라고 한 이노우에각하의 말을 명심하시오.》

《박대신.》

낮고도 침착한 소리에 상념에서 깨여난 박영효는 민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하께서 응답을 기다리고계시오.》

이제는 한본새로 우길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박영효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예, 소신은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 심고끝에 상주하는것이옵니다.》

민비는 박정양한테 눈길을 주었다.

《총리대신도 그렇게 생각하오?》

《…》

고개를 숙인 박정양은 함구무언이였다.

민비가 고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고종은 얼굴에 단호한 빛을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종과 민비의 침묵에 까닭모를 불안을 느낀 박영효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종을 간절한 눈길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페하!》

그의 말을 중둥무이시키며 고종이 결연히 언명했다.

《경들은 듣거라! 짐의 심복의 호위병을 페하고 일본공사가 조종하는 훈련대를 왕궁에 배치하여 왕실의 안위를 그들에게 일임하자는것은 절대로 허용할수 없다!》

《…》

고종의 여느때없이 단호한 태도에 세 대신은 놀란 눈길을 쳐들었다.

고종의 철퇴같은 선언이 계속되였다. 그는 지금껏 쌓이고쌓인 울분을 터뜨리는듯 낯색이 벌겋게 상기되고 목소리도 떨렸다.

《또한 지난해 6월이래의 칙령은 물론 재가사항은 짐의 의사가 아닌것이 허다하니 그것들을 모두 취소한다!》

세 대신은 동시에 고개를 숙이는데 박영효의 낯은 경악과 불안으로 굳어졌다.

민비는 그러는 박영효를 싸늘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고종의 폭탄선언은 그날로 일본공사관에 전해져 침략의 척후병들로 하여금 당황망조케 하고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일본고문관들은 창문도 없는 공사관의 밀실에 급급히 모여앉아 조성된 엄중한 사태를 타개할 방책을 의논하였다.

이노우에공사는 휴가를 구실로 이미 귀국하고 없었다.

그처럼 기세등등하여 조선에 부임했던 이노우에 가오루공사는 자기가 내세웠던 소위 전심전력한 내정의 개조도, 독립기초의 공작도 종말을 고했음을 자인하고 조선침략의 새로운 방책을 모색하기 위해 귀국의 길을 서두르게 되였던것이다.

을미(1895)년 음5월 19일 그는 도꾜의 무쯔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날렸었다.

《…로씨야의 간섭이 일본으로 하여금 료동반도의 영구점령을 포기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기회에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를 제압하기에 이른것이며 그들은 또한 최근 로씨야공사관의 출입이 잦은 한편 일본을 타인시하고있으며 많은 일본인고문관들은 렬국공사들의 질시하에서 쌓인 사무를 집행하지 못하고있을뿐아니라 외교사절단의 항의에 부딪친 사건도 있다. 본인은 신경통이 심하니 조속 귀국허가를 내려주기를 바란다.》

이노우에가 귀국한 상황에서 대리공사직을 맡고있는 스기무라서기관과 호시고문관이 이들의 두령노릇을 하였다. 스기무라의 지명을 받은 호시가 초불앞에 나서서 자못 비장한 어조로 고종이 지난해 일본의 왕궁습격후 취한 모든 칙령과 재가사항을 취소하겠다고 한것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다고 고아대면서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 기울인 모든것에 대한 전면부정, 전면대결이라고 떠들었다.

고문관들의 얼굴에 긴장과 실망, 분개의 착잡한 표정이 어렸다.

고종의 폭언에 대처하기 위해 스기무라대리공사가 급급히 소집한 일본고문관들의 긴급비밀회의는 늦도록 계속되였으나 그들은 박정양내각을 계속 존속시킬것과 친일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것 등을 결정하였을뿐 고종과 민비에 대한 로씨야의 영향력을 저지시킬 대책은 세우지 못했으며 또 세울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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