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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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무렵 김진세는 왜놈의 군용마차에 실려 다른 운명의 길을 가며 근거지와 작별하고있었다. 바줄에 몸을 결박당한 그는 마차에 실은 빈 탄약궤짝들사이에 엇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몰라보게 부어올랐고 이마와 관자노리에는 피가 검붉게 엉켜있었다. 마차가 덜커덩거릴 때마다 들썩들썩 들추는 궤짝모서리들이 그의 머리며 잔등을 함부로 짓쪼았다. 그래도 그는 아픔을 모르고 물기가 도는 눈으로 멀어져가는 근거지의 산발들만 바라보았다.
털외투에 털모자를 푹 눌러쓴 얼굴이 좀상스러운 사마병놈은 이따금 그를 돌아보며 이죽거렸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마차들이 삐걱거리고있었다. 대개가 송장들을 실은 마차들이다. 앞마차의 뒤꽁무니에서는 거적밑에서 삐여져나온 꽛꽛한 다리들이 거들거리였다.
김진세는 삐거덕거리며 굴러가는 마차바퀴가 자기를 어디로 실어가는지 몰랐다. 그는 근거지의 산발들이 멀어져갈수록 머리를 점점 높이 쳐들며 뾰족산과 마반산의 꼭대기들을 눈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눈에 눈물이 사품쳐오르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수염발이 처량하게 나붓겼다.
김진세는 제땅에서 농사도 지어보고 정부의 정사에도 참여해서 사람으로 누릴것은 다 누려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종삼이 무사히 빠져나가 그 쌀이 사령부에 가닿았겠는지… 오직 그 한가지 걱정에 머리를 쳐들고 근거지의 산발들을 끝없이 바라보는것이였다. 무정한 산봉우리들은 앞산들뒤에 키를 점점 낮추더니 아주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로인은 자기가 참 맹랑한 일로 왜놈들에게 잡혔다고 생각했다. 그날밤 마종삼이와 함께 뒤울안에서 쌀주머니를 둘러메고 나오려는데 기마병 한놈이
뜨락으로 들어왔다. 장교놈이였다. 놈은 말에서 내려 굴뚝쪽으로 와 지붕에 새로 인 조짚을 뽑아서 씹어보았다. 그리고는 말한테로 가서 그것을
먹여보였다. 말은 조짚을 와작와작 맛스럽게 먹었다. 제놈들이 내 집 지붕을 벗겨 말먹이로 쓰자는 잡도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에 불이 확
일었다. 그는 꽁무니에서 도끼를 빼들고 몸을 날려 놈의 뒤더수기를 찍었다. 그리고는 둘이서 쌀자루를 둘러메고 뒈진 놈의 말까지 끌고 마을을 벗어져나오다가 웃쪽에서 내려오는
기마병놈들과 맞다들게 되였다.… 그때 장교놈이 그러거나말거나 좀더 어디에 숨어있다가 몰래 빠져나왔더라면 아무일도 없었을것이다. 놈들은 그를 동림촌의 어떤 천막안으로 끌고가서 군도날을 목에 대며
놈들사이에 무슨 흥정이 오가는것 같았다. 그러더니 목을 치지 않고 천막으로 다시 끌고들어가 팔다리를 바줄로 묶어놓았다.
아침에는 밥에 더운국까지 먹여주고 이렇게 마차에 처실었다.
마차는 삐거덕거리며 왕청쪽으로 굴러가고있었다. 김진세는 놈들이 왜 자기를 죽이지 않고 왕청으로 실어가는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왕청에 내다가 숱한 시민들앞에서 목을 치자는겐가?…
그는 머리를 쳐들고 서서히 흘러가는 산이며 골짜기며 버덩이며 얼어붙은 개천물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나 왜군들이 누렇게 한벌 깔렸다. 버덩에 늘어선 대포들은 모두 포신을 소왕청근거지쪽에 돌렸다. 포진지둘레의 눈들은 거멓게 어지러워졌는데 그우에서 왜놈들이 무엇들을 하는지 군데군데 몰켜서 와글거리고있었다. 마을과 마을사이로는 기마병들이 분주히 뛰여다녔다. 길이라는 길로는 모두 길고 짧은 왜군대렬들이 오갔다. 개천가에 주런이 친 천막들에서는 부상당한 놈들을 눕힌 담가를 멘 놈들이 드나들었다. 불타버린 마을에도 왜놈들이 누렇게 달라붙어 화목감들을 뜯어내였다. 불길에 그슬린 각재들이며 문짝들을 메고가는 놈들이 여기저기에 바라보였다. 눈에 덮인 밭을 꿰질러 전화줄을 끌고가던 놈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무엇이라고 꽥꽥 소리질렀다. 길가의 눈우에는 허리며 팔다리들이 꼬부라진 얼어붙은 시체들이 드문드문 수십개씩 줄지어 누워있었다. 아마 시체운반차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산비탈길옆에서는 홈타기에 구겨박힌 산포를 끌어내느라고 숱한 놈들이 어깨에 바줄을 걸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지르며 안깐힘을 썼다. 바위우에 올라선 장교놈이 군도로 공기를 내리칠 때마다 바줄을 어깨에 건 졸병들은 목소리를 합쳐 《여-이-샤-여-이-샤-》 하고 소리치면서 포를 끄는것이였다.
김진세는 뾰족산에서 석전을 벌릴 때에도 왜놈들이 뒤에 이런 전쟁판을 펼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우리가 얼마나 강하면 왜놈들이 이렇게
숱한 병력을 끌어들였겠는가! 우리
그는 산속 움막에서 자기때문에 혼자 속을 썩이고있을 로친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으나 가슴에 자랑이 넘치여 의젓하게 머리를 쳐들고 번쩍이는 눈으로 전장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하늘에서 까마귀들이 기승을 부리며 떼를 지어 날아들면서 까욱… 까욱… 울어대였다.
(허, 저 까마귀들을 보지. 왜놈송장냄새에 만주까마귀들이 다 날아드누나. 흐흐흐…)
왕청시가에 도착하여 그가 끌려간 곳은 사형대나 철창속도 아니고 어느 병영의 마구간이였다. 어둑시근한 마구간의 짚덤불우에서는 백여명의 사람들이 딩굴고있었다. 모두 여러 근거지들과 그 린근의 마을들에서 붙잡혀온 농민들이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토벌》사령부가 얼마전부터 돈벌이를 시작하여 《민간인포로》들을 무순탄광과 하이라르의 어느 공사판에 팔아넘긴다는것이였다.
김진세는 무순이라는데가 어느쪽에 붙어있는지도 몰랐으며 하이라르라는 고장이름은 듣다가 첫소리였다. 아마 세상 한끝에 있는 불모의 땅일것이다. 너무도 뜻밖이고 너무도 기막힌 소식에 그는 밑둥이 잘린 나무처럼 허우적이다가 짚덤불에 쓰러지고말았다.
밤이 되자 먹물을 풀어놓은듯 캄캄한 어둠속 여기저기에서 앓음소리들과 가슴을 찢는 흐느낌소리들이 들려왔다.
김진세는 잠들지 못하였다. 눈에서 뜨끈뜨끈한것이 흘러내려 귀안에 떨어졌다. 이제 산속에 숨어있는 로친이며 봉남이는 어떻게 되고 자기는 먼 타향에서 고생살이를 하다가 어찌 무주고혼의 신세로 되겠는가? 무순이라는데는 몇천리밖이고 하이라르라는데는 몇만리밖인가?
온갖 시름과 착잡한 궁리, 번민에 시달린 그는 자정이 퍽 지나서 잠에 노그라떨어졌다. 자면서도 잔등으로 선뜩선뜩 스며드는 찬바람에 짚덤불속으로 자꾸 기여들게 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지 뼈속까지 얼어드는 추위에 잠을 깼다가 짚덤불을 뒤집어쓰고나서 몸을 꼬부린 그는 아슴푸레한 잠결에 어둠속 어디에선가 버스럭거리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웬 사람이 어둠속에서 짚덤불우를 기여다니며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면서 휘파람같은 소리로 여기 소왕청이나 대왕청에서 오신분이 없는가고 물었다.
《저는 화룡에서 오는 련락원입니다. 어떻게나 탈출해서
그는 자기를 화룡유격대 정치위원이라고 하며 도중에서 변절자가 생겨 잡혔노라고 했다. 사람들은 잠을 방해한다고 그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고 동정의 말도 했다.
얼마후 구석쪽에서 한 목소리가 소왕청에 가야
김진세는
《소왕청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예? 그걸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여보시오… 잡니까?》
《자기사… 내 잡혀 끌려오기 전에 사동이란 마을에서 오는 조카를 만났는데…
《하…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김진세는 그의 인편에 자기 소식을 전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들어 그쪽에 대고 속삭였다.
《여보시오, 이리 좀 오시오.》
《로인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마촌에서 왔소.》
《마촌이요?》
부스럭부스럭 기여오는 소리가 났다.
화끈한 입김이 이마를 스쳤다. 김진세는 입김에서 인단냄새같은것을 느꼈다.
(입안에서 겨불냄새가 날 처지에 이게 무슨 냄샌가?)
그러자 련락원이라는 사람이 자기 신분이며 임무를 이런데서 함부로 루설하는것이 미심쩍어졌다. 가슴이 화들화들 떨렸다.
그 사람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김진세의 머리며 어깨를 더듬어보더니 옆에 부스럭거리며 누웠다.
《화룡유격대에 내 조카가 있는데… 거기서 중대장을 한다던지 박창억이라고 모르겠소?》
《저는 안도쪽에서 가지 들어와서 잘 모르겠는데 그런 동무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마동호라고는 모르겠소? 내 외가편인데 안도에서 들어왔는데…》
《아, 그런 동무는 있습니다. 아바이, 나를 믿지 못해 이럽니까?》
김진세는 손을 내밀어 더듬어서 그의 어깨를 슬그머니 거머쥐였다. 그는 와뜰 놀라는듯 하였다. 그의 몸서리가 선뜩 손바닥에 느껴지는 순간 김진세는 몸을 날려 놈의 배를 타고앉으며 두손으로 목을 눌렀다.
놈은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뻐드럭거리며 부르짖었다.
《놓소! 놓아! 이 령감태기…》
김진세는 놈의 목을 짓누르며 소리쳤다.
《이놈은 밀정이요. 우리
그러자 놈은 갑자기 용을 써 몸을 비틀며 로인의 목에 다리를 걸고 넘어뜨리려고 힘을 쓰며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보초- 보초.》
밖에서 다급한 발자욱소리들이 울리더니 마구간문이 왈칵 열렸다. 어둠속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비통한 웨침소리들이 터졌다.
《아바이- 피하오-》
《놓고 피하시오-》
그러나 로인은 두팔뚝에 온몸의 무게를 주며 늘어져 배만 푸들거리는 놈의 목을 꾹 누른채 떨어지지 않았다.
전지불을 들고 달려들어온 두 보초놈이 총대로 김진세를 까눕히고 혀를 빼물고 늘어진 놈을 들어올려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넝마처럼 짚덤불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김진세에게 달려들어 마구 발로 짓밟고 총탁으로 내리깠다.
이윽고 놈들은 그를 량쪽에서 붙잡고 끌어내갔다.
마구간마당에는 희푸르스름한 달빛이 깔렸다. 놈들의 총대에 떠밀려 그 달빛을 밟으며 비칠비칠 걸어나가는 김진세는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가까운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런 외진데서 죽기가 원통해서였다. 놈들은 마구간뒤울안에 끌고가서 쏠 작정인지 그를 그쪽으로 몰아갔다.
마구간모퉁이를 돌아설 때 찬바람이 얼굴을 쳤다. 김진세는 숨을 모질게 들이쉬며 헉 하고 느끼면서 근거지의 하늘쪽에 눈길을 주었다. 문득
그는 다음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서 시퍼런 번개불이 번쩍이고 온 세상을 들었다놓는듯 한 폭음이 들려왔다. 총소리들이 울리고 어디선가 짐승의 멱따는듯 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마구간에서 사태처럼 밀려나오는 사람들이 쓰러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정신없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