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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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간호부의 동정의 손길이 갖다놓은 창턱의 유리꽃병에서 벗꽃(사꾸라꽃)이 연분홍으로 환히 피였다. 창턱밑의 방열기에서는 증기가 새는 찌-찌르륵… 하는 기이한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훗훗한 방안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떠돌았다.
병상에 누워있는 구니모도는 창턱에 피여난 벗꽃에 자기 운명과 관련한 숱한 의미를 부여하고 명상에 젖어 그것을 바라보군 하였다. 그러느라면 그 꽃이 창밖의 나무가지들에 하얗게 피여난 눈꽃과 한데 어울려져 온 세상이 벗꽃천지로 변하는듯 한 환각이 문득문득 일군 하였다.
그날 아침 창밖에 내내 피여있던 환상적인 벗꽃천지가 하얗게 흩날려내리자 꽃병의 벗꽃들이 한잎두잎 떨어져내리며 애달픈 시정을 불러일으키다가 일순에 화라락 흩어져내렸다.
구니모도는 가슴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하여 벌떡 일어나앉았다가 머리를 베개에 맥없이 던지고는 물기가 번들번들한 눈을 디룩거렸다. 꽃병에 앙상한 벗나무가지, 거먼 마루바닥에 점점이 흩어진 꽃잎들… 아, 피자 지는것이 꽃의 운명인가! 떨어져 흩어진 꽃잎들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기마련이다!
지는 꽃, 지는 해, 지는 인생을 막을 힘이 없는것이 우주의 섭리라면 《천황》페하께서도… 나도 이 섭리에 순응해야 한단 말인가? 밖에서는 무서운 추위가 계속됐지만 구니모도는 아늑한 입원실의 침대에 누워 오래동안 이러한 상념에 젖어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있었다.
며칠째 그를 짐승처럼 발광케 한 복통은 몇시간전에 잦아들었다. 그러나 의사들이 자기를 속이고있지 않는가 하는 새로운 불쾌감이 가슴한구석으로 흘러들어왔다.
의사들은 처음부터 저산성위궤양이라고 했다. 그러나 구니모도는 자기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그들의 이상스러운 눈길이며 벌써 저세상사람으로
치부하는것 같은 행동거지들에서 모든것을 느꼈다. 의사들의 말과는 달리 무서운 병마가 배에 주둥이를 틀어박고 자기 생명을 파먹고있는것이
틀림없다. 그는 그것이 무엇이라는것을 어렴풋이 알고있었으나 입밖에 내여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의사들도 자기를 속이고 자기
구니모도는 머리를 움직여 베개우에 반듯이 놓았다. 그리고는 복도로 지나가는 발걸음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누구 하나 걸음을 멈추지 않고 모두 조용조용 지나간다. 막역한 동료라고는 별로 없었지만 있다는 부하들도 찾아오기를 꺼려하는것 같다. 의사들도 용건만 보고 피해달아난다. 겁쟁이들! 비렬한들!… 온 세상을 저주하고싶어졌다.
이윽고 고요를 흔들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실내화를 끄는 사륵사륵하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위생모와 마스크, 위생복으로 온몸을 덮어 머루알같이 까만 눈만 보이는 간호부가 곁에 와 섰다.
구니모도는 《나는 아직 살아있소.》 하고 속으로 뇌까리며 쓰거운 비양조의 웃음을 머금고 그를 쳐다봤다.
간호부는 봉합편지를 머리맡에 놓고 얼른 나가버렸다.
봉투의 뒤면에는 사또 요시나리라는 이름자가 적혀있었다.
(이자는 두달전에 왕청전선에서 전사했다더니?…)
각하!
저는 치욕을 당한 황군장교로서
방략수립단위의 사고를 하지 말라던 각하의 충고를 어기고 하고싶은 말을 다 적으오니 용서하기 바랍니다. …
구니모도는 이런 첫 구절을 읽고 말라터진 두툼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건방진 자식, 저 혼자 죽는가?…)
각하!
황군은 패하였습니다. 오늘은 왕청전선에서, 래일은 북지전선에서도 패할것입니다. 패할것입니다!
우리는 왜 패배하였는가? 우리는 왜 죽는가? 저의 부하인 한 장교가 야간정찰중 농가에 매복하였던 조선농민의 도끼에 뒤통수를 찍혀 즉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 며칠후 공산군은 아군의 배후에 돌입하여 왕청시가를 공격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우리는 총퇴각을 명령받았습니다.
아군장교의 뒤통수로 날아든 도끼는 이 전쟁의 특징을 암시하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죽음을 하나의 우연적인 재해로
여기고 인차 망각해버렸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안되는 모든것을 우연적인것으로 밀어버리는 그 저주맞을 사고방법때문에 황군
각하!
아십니까? 소화8년, 지난겨울 아군 대무력이 두만강연안 적색근거지들에 대한 포위를 완성하였을 때 그안에 공산군병력이 얼마나 포진되여있었는지 아십니까. 매 근거지에 반일자위대라는 반군사조직까지 합하여 불과 몇개 중대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알았을 때 바위를 내리쳐 군도를 꺾어버리고싶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공산군은 그 렬세한 력량으로 황군에게 완강하게 저항할수 있었으며 주동적인 공세를 반복 취하면서 우리를 이런 파국에로 몰아넣었는가?
아군이 적색근거지의 좁은 구역에 포위환을 둘러치고있을 때 우리 배후의 광활한 지역에서는
각하는 이것을 알았습니까?
저는 알게 됐습니다.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알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거목의 큰 뿌리와 잔뿌리들처럼 도시와 공장지구, 읍들과 산간마을, 어촌, 광산막장에까지 뻗어내리고있습니다.
언제 이렇게 되였는가? 각하는
사방으로 뻗은 이 진출방향만 봐도 많은것을 상상할수 있습니다. 그 진군이 황군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자는데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는것이 지금에는 명백해졌습니다. 장학량군벌에서 반변해나간 구국군두령들도 그들과의 련합을 형성하였으니 하물며 조선인들이야 더 말할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황군
치안당국자들은 지금에야 경악하여 그 종심을 이룬 조직선들을 드러내자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조선인들속에 저항의식만 격증시켜 그 조직선들은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가며 걷잡을수 없이 뻗어나갑니다. 인체에 생긴 암조직처럼 메스를 잘못 대면 확산되여갑니다.
각하, 저는 이 최후의 순간 각하와의 첫 상봉을 회고합니다. 룡정제국령사관에서였지요. 그때 각하는 한 문필가의 글때문에 몹시 불쾌해했습니다. 그 문필가는 갓 생긴 적색근거지를 제국의 암으로 묘사했던것입니다. 페하의 시종무관 가와기시소장을 맞으러 가던 그 잊지 못할 밤마차에서도 각하는 문필가의 신경쇠약증을 비난하며 불쾌감을 참지 못해했습니다. …
입원실천장을 들었다놓으며 단말마의 함성이 터져올랐다. 모포가 날아나고 베개가 튀여올랐다. 구니모도는 털이 부르르한 다리를 드러내고 맹수처럼 뛰여일어나 문을 차고 복도로 뛰여나갔다. 때마침 문앞을 지나가던 간호부가 약병들을 떨구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갔다. 마주 걸어오던 안경쟁이담당의사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되여 뒤걸음질치며 손에 들었던 청진기를 떨어뜨렸다.
구니모도는 눈에서 불찌를 펄펄 날리며 그에게 덮쳐들어 멱살을 움켜잡고 마구 휘둘러댔다. 의사의 비명과 환자의 함성에 병원이 진감하였다. 온 병원이 발칵 뒤집혀졌다. 복도와 층계를 가득 채우며 의사와 간호부들이 밀치고 닥치며 달려내려왔다.
구니모도는 얼굴이 흙빛이 되여 담당의사의 머리를 복도벽에 짓쫗아대며 입거품을 날리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를 속였지? 속였지? 나는 암이다.… 암이다!… 나는 암이다.… 살려내!… 살려내라!》
그리고는 복도바닥에 쿵 하고 둔중하게 굴러떨어졌다. 죽어버린것이다.
저녁 사고심의에서 누가 환자에게 병명을 대주었는가고 엄격히 추궁되였을 때 안경쟁이담당의사는 환자의 침대밑에서 주었다는 한장의 편지를 제시하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편지가 환자에게 그 어떤 련상작용을 일으킨것 같습니다.》
구니모도의 시체는 륙군장의조례에 따라 즉시 화장가마로 실려가 석회질분말로 되여 작은 목함속에 포장된 다음 땅속에 깊숙이 묻혔다.
관동군사령부는 직속병원에서 생긴 의미심장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이 사건을 여러가지 고려로 엄비에 붙이기로 하고 대본영에는 고인의 명예를 생각하여 순사라고 보고하였으며 유가족들에게는 경건한 조의를 표하였다.